지인의 배신으로 극도의 허무감에 시달렸던 강인원은 영화주제가 제작 제안이 들어왔지만 선뜻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재택 작업이 가능한 영화OST인지라 영화사와 지구 레코드에서 제작비를 받아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다양한 색채를 담아낸 노래 전부를 자신이 부를 수는 없었기에 김현식, 권인하, 신형원을 참여시켜 완성도를 높였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1989년 발표한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 OST 앨범은 세상과 잠시 단절했던 그에게 음악 인생을 만개시키는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의붓 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영화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강인원은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거뒀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1990년 제 2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주제가상, 제 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음악상,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 KBS 가요대상 작사상, 한국 노랫말 대상 등 무려 7개의 각종 가요 상을 휩쓰는 선풍적 반응을 이끌어 냈다.

김현식 음주로 트리오 녹음

주문 제작된 이 명곡의 탄생 비화는 흥미롭다. 사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연주인들이 녹음실에 왔을 때까지 곡을 완성하지 못해 즉흥적으로 녹음을 마친 사연 많은 노래다. 앨범의 타이틀곡은 권인하가 부른 '오래 전에'였고, 서브 타이틀은 김현식이 노래한 '그 거리 그 벤치'였다.

강인원과 고 김현식, 권인하가 트리오로 부른 이 노래 또한 원래는 김현식과 권인하의 듀엣 곡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녹음 날 김현식은 '소주 한 병을 먹어야 녹음하겠다'고 버텨 소주 반 병을 마신 후에야 녹음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노래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 진한 탁성의 보컬이 매력적인 노래꾼 김현식은 고역의 샤우팅 부분은 기막히게 소화했지만 '빛 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서 서서…'로 시작되는 맑은 감성이 요구되는 도입 부분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그 부분을 미성의 보컬을 지닌 강인원이 맡으면서 예정에 없는 트리오 버전이 됐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곡 마디 수, 코드까지 녹음실에서 즉흥적으로 정해 일종의 가이드 송으로 부른 급조한 곡이었다. 당연 영화 속 어느 장면에 삽입할지 여부조차 마땅치 않아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다.

B면 첫 곡 간신히 수록

관계자들 모두 신통치 않게 여겼기에 음반에는 B면 첫 곡으로 간신히 수록되었다. 영화의 중요 장면은 권인하가 부른 '오래 전에'가 메인 배경 음악으로 깔렸다. 푸대접을 받았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영화 개봉 이후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을 불러왔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끝부분에 간신히 삽입된 이 노래를 끝까지 듣기 위해 관객들은 자막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수선한 사회 빅히트 일조

이 노래의 빅히트에는 대중가요계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일조했다. 영화OST 앨범이 나왔을 당시, 대중가요계는 PD뇌물사건으로 뒤숭숭했다. 의혹을 받았던 각 방송국의 PD들이 행적을 감추면서 '대중가요는 돈이 오가는 검은 거래를 통해야만 방송을 탄다'는 부정적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 때 가창력이 공증된 김현식, 강인원, 권인하 3명의 가수가 모여 부른 영화 주제가는 명분 있는 노래로 여겨지며 방송 출연과 마케팅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수하게 방송을 탔다. 이에 강인원은 단숨에 주류 가요계의 메이저급 프로듀서 및 작사 작곡자로 각인되었고 그의 곡을 받으려는 가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강인원은 "공연을 다녔을 때 김현식의 건강이 악화되어 부려 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는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은 '김기덕의 2시 데이트' 방송에서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대학생들이 뽑은 인기가요' 7주 연속 1위로 선정되자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 활동을 접는 결심을 했다.

이 곡은 지인의 배신으로 극도의 허무감을 경험했기에 창작이 가능했던 곡이다. 완성은 마지막까지 쉽지 않아 발표 당시엔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이 곡이 무수한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각인된 것은 순백의 진정성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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