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노출과 특징적 안무가 난무하는 아이돌그룹의 비주얼음악과는 달리 사람향내가 진동하는 7080음악에는 순수와 낭만의 향내가 가득하다. 통기타 음악으로 대변되는 당대의 포크송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장르자체가 대중적 외면을 받았지만 최근 세시봉 통기타 열풍과 더불어 부활해 중장년세대를 넘어 젊은 세대들의 관심까지 이끌어냈다.

한국인만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특히 군사정권이 구축한 단체문화에 익숙했던 80년대 이전세대들은 새마을운동 노래를 들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학교에서는 애국가와 교가를 심지어 회사에서도 사가를 부르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또한 MT나 소풍, 캠핑을 가면 어김없이 둘러 앉아 캠프 송을 부르는 그들만의 필수 놀이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와 디지털이 세상을 지배한 후 단체문화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어폰을 끼고 디지털 노래파일을 듣는 혼자놀이문화가 대세를 이룬다. 이제는 공동체보다는 개성이 중시되고 가슴 뭉클한 감동적 메시지보다는 오감을 자극하는 각종 섹시 춤과 단순반복적인 후크송이 범람하는 시대가 되었다.

결혼 골인한 혼성듀엣

1971년에 결성된 혼성 듀엣 <바블껌>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중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노래들은 70-80년대 청소년들이 가장 애창했던 캠프 송의 명곡들이다. '연가','짝사랑', '토요일 밤에(첫 버전은 목요일 밤에)'를 최초로 노래했던 캠프송의 지존 <바블껌>은 음악활동을 통해 결혼에까지 골인한 혼성듀엣이다. 이들의 막내딸 이자람은 어린 시절 '예솔이'란 이름으로 유명했던 꼬마가수였고 18세 때 판소리 심청전 여덟 마당을 완창한 사상 최연소 최장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된 천재 소리꾼이다.

리더 이규대는 1967년 배재고 1학년 때 진명여고 강당에서 열렸던 문학의 밤에 놀러 갔다. 그날 초청된 중동고 3중창단이 들려준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화음에 정신이 몽롱해 친구들과 국내 최초로 고교생 4중창단 <마일스톤>을 결성했다. 고2때 서울YMCA의 하이Y 연합합창단인 Y코러스 합창단에 들어간 그는 <바블껌>의 여성멤버 조연구를 처음 만났다. 당시 경기여고 신입생이었던 그녀는 양희은의 친구다. 여장부 기질이 강했던 조연구는 학창시절 반장을 도맡았던 엘리트 학생이었다. 노래재능까지 뛰어났지만 복잡한 가정사로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1971년 대학생이 된 이규대는 YMCA의 대학Y 서클활동을 했다. <바블껌>의 히트곡 '연가', '짝사랑'등은 Y 대학 연합서클 '부족사회' 활동 때 회원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다. 1971년 4월, 이규대는 숭실대 정문 앞에서 조연구와 우연하게 다시 만났다. 운명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조연구가 예고도 없이 짐을 싸들고 그를 찾아왔다. 술, 담배, 도박과는 거리가 먼 범생이었던 그가 사고를 쳤다. 생활이 힘들었던 여자 친구 조연구에게 방을 얻으라고 등록금 전액을 건넸던 것. 결국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이규대는 1학년을 마치고 자퇴를 했고 봉천동 산꼭대기에 단칸방을 마련한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청평 페스티벌서 즉흥무대

1971년 여름, 남성듀오 <4월과 5월>을 결성한 친구후배 이수만이 집에 놀러왔다. 그를 따라 두 사람은 청평 페스티발에 구경을 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창작 곡 '이 말만 전해주오'를 노래한 서유석을 만났다. 그 곡은 최백호의 '입영전야'와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가 나오기 전까지 군 입대를 앞둔 친구를 환송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각광받았던 노래다. 이수만의 주선으로 서유석과 인사를 나눈 이규대, 조연구는 예정에도 없이 무대에 올랐다. 그날 주간한국 기자 정홍택과 팝스 잉글리쉬를 진행했던 신동운이 사회를 봤다.

팀 이름도 없이 무대에 오른 두 사람은 Y에서 즐겨 불렀던 번안 곡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를 불러 예상치 못한 앵콜 세례를 받았다. 연이어 뉴질랜드 민요를 번안한 '연가'를 불렀다.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이 아닌 생소하지만 귀에 박혀오는 근사한 노래를 부른 두 사람은 이 무대를 통해 공식 데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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