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채색화 기법으로 그려진 보리밭이 상징하는 질긴 생명력과, 전통적 굴레와 인습에 저항하는 듯한 이브의 이미지는 한국적 삶의 근성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문학적 변주로 일컬어지며 작가 특유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왔다.
2007년 선화랑 개인전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옛 여인들의 체취가 배어있는 민예품이나, 장터나 논밭 등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그려진 1970~80년대의 작품이 출품된다. 자연에 담긴 내적인 생명력이 보리 낟알 하나하나를 통해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보리밭 시리즈, 건강하고 꾸밈 없는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 그리고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의 모태가 된 모필 크로키 등을 만날 수 있다.
이숙자는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이를 보다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해왔다. 삼국시대의 고분벽화에서부터 고려시대의 섬세하고 화려한 불화와 조선시대의 민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채색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적 정서와 역사성을 발견한 이숙자는 작품활동 초기에는 민예품과 고가구 등을 전통 채색화로 그렸다.
1970년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보리밭은 작가에게 한국적인 정취와 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소재로 다가왔다.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보리밭에는 싱그러운 초록색에서부터 눈부신 황금색, 원숙한 은색과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무지개색이 모두 담겨 있으며, 특히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는 좌우로 부대끼며 풍부한 색조를 발산하게 된다. 이러한 자연의 울림은 전통적인 채색 안료인 석채(石彩)를 이용한 선명한 색상은 물론,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 보리알의 입체적인 마티에르와 보리 수염 한 올 한 올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이숙자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작품 속에 그대로 전해진다.
홍성필기자 spho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