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TV <톱밴드>에 출연한 무명의 인디밴드 <장미여관>은 발칙하지만 서정성이 탁월한 노래 '봉숙이'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당연 인터넷 공간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경상도 사투리를 마치 스페인어처럼 위장한 구성은 기발했다. 가사는 '봉숙이'를 유혹하는 야사시한 내용이지만 시청자를 미소 짓게 하는 유머가 빛을 발했다. 모두들 웃게 만드는 이 노래는 뛰어난 연주 솜씨로 코믹송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

오랫동안 천박한 '딴따라 문화'로 폄하되었던 대중가요가 대중예술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은 그렇다 치고, 나라 잃은 설움이 극심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웃기는 만요가 대유행했었다. 만요는 익살과 해학을 담은 코믹송이다. 고 김정구는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왕서방 연서' 같은 우스개 노래를 주로 불렀던 대표적인 만요 가수다. 만요는 엔카의 영향을 받은 신파적인 트로트와는 차별되는 밝고 경쾌한 장르음악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의 스펙트럼 확장에 일조했다.

해방 이후에도 고 한복남(본명 한영순)의 '빈대떡 신사'와 민요 '영감타령'을 대중가요 어법으로 편곡한 하춘화, 고봉산의 '잘했군 잘했어', 강홍식의 '유쾌한 시골영감'을 리메이크한 서영춘의 '서울구경',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같은 코믹송들이 빅히트하며 사랑을 받았다. 그 중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는 노래 가사 대부분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운 독특한 노래다. 1940년대에는 존재 자체가 희귀했던 싱어송라이터였던 한복남의 데뷔 자작곡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당대에 주종을 이룬 슬픈 정조의 노래가 아닌 양복 입은 신사의 무전취식을 해학적으로 묘사해,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극복한 명곡이다.

1947년 월남후 가수 데뷔

데이터베이스가 열악한 한국 대중음악계의 현실을 반영하듯 지금도 애창되는 이 국민가요도 바로잡아야 할 팩트가 무수하다. 1991년 1월 27일자 한복남의 부고기사들은 '1943년 10월에 빈대떡 신사를 발표했다'고 썼다. 명백한 오류다. 한복남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 1947년 월남한 후 가수로 데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노래를 발매한 레이블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아세아레코드공사로 확인되었다. 아세아는 우리가 아는 그 레코드회사가 아니라 해방 이후 존재했던 동명의 다른 음반사다.

한복남의 데뷔곡도 '빈대떡 신사'가 아니라 같은 음반사에서 먼저 발표된 김해송 곡 '저무는 충무로'로 수정되어야 한다.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월남한 한복남은 종로에서 양복점을 열었고 당대의 단골 연예인 중에는 유명 작곡가 박시춘과 김해송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멋쟁이로 통했던 양복기술자들은 노래 잘 부르는 사람으로도 인식되었는데 한복남 역시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가수의 꿈을 가졌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에게 곡을 받기 위해 선물 공세를 폈지만 주지 않아 작곡가 김해송에게 '저무는 충무로'를 받아 공식 데뷔를 했다. 그래서 직접 작사, 작곡한 '빈대떡 신사'도 연이어 발표했다. 당시 가수가 곡을 쓴다 하면 '건방지다'고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작곡자는 트럼펫 연주가 양원배 이름으로 명기했다. 한복남의 장남인 작곡가 하기송(본명 한정일)은 "아버지 한복남으로 명기되어 있는 친필 오리지널 악보가 있다"고 말한다.

두세 시간씩 고음 발성연습

김해송과 인연을 맺은 한복남은 KPK악단에서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 앵콜곡을 거절하지 않고 부른 정열적인 가수로 유명했다. 그 바람에 후배가수들은 그의 뒤에 출연하기를 꺼렸을 정도. 작곡가 하기송은 아버지에 대해 "보통 나이가 들면 나오지 않는 고음을 내기 위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날마다 두 세 시간씩 발성연습을 하셨다"고 전한다. 한복남의 노래 '빈대떡 신사'와 '엽전 열 닷 냥', '전복타령'은 한국전쟁 이후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대중에게 삶의 활기와 흥을 안겨준 대중가요의 전형이었다. 대표곡 '빈대떡 신사'의 가사에 등장하는 대폿집은 실제 집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노래로 인해 '빈대떡'은 서민 음식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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