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군사정권 연장을 위해 유신정권을 가동한지 40년이 되는 해다. 긴급조치 가동으로 사회통제 강화를 본격화했던 1972년 그 해는 남북대화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건은 채찍과 당근이라는 의혹을 가지게 할 만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튼 유신군사정권의 연장을 위해 사회정화운동이란 미명으로 자행된 긴급조치 9호는 금지곡을 양산했고 당대 중요 뮤지션들을 퇴장시키며 대중음악의 암흑기를 불러왔다.

활기를 잃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안으로 시작된 한 오디션 경연대회는 대안적 오락의 의미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음악 패러다임을 형성시켰다. 저 유명한 MBC 대학가요제다. 제1회 대회가 열린 1977년 9월 3일, 전국에서 333개 팀이 열띤 예선전을 벌여 19개 팀이 서울 정동의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본선무대에 올랐다. 실황음반을 들어보면 그 시절의 감흥과 추억이 되살아난다. 헌데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아마추어급인 음악에 왜 그리 당대 대중이 열광했고 사회적 파급이 들불처럼 일어났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만큼 새롭고 선선한 음악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극심했다는 증명일 것이다.

1회 MBC대학가요제 동상

막 시작한 제1회 대학가요제는 방송사, 참가자, 시청자 모두 대회의 정체성에 대한 마인드가 없었다. 참신한 대학 노래꾼들이 지상파 방송에서 경연을 한다는 사실은 분명 화제의 중심이 될 만했지만 본선 진출 곡들은 창작곡과 번안곡, 기성 가요가 어지럽게 혼재되었고 참가자들의 음악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이스라엘 민요와 고려가요를 버무린 '가시리'와 혜은이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당신은 모르실 거야'가 당당하게 은상을 공동수상했고 '세노야'는 물론이고 번안곡인 '권투선수', '나의 어머니', '제비'까지 1회 대회의 출전 곡들은 그야말로 아마추어리즘의 정수였다.

참가팀 중 유일한 밴드였던 서울농대 <샌드 페블스>의 대상 수상은 이후 캠퍼스밴드의 양산을 불러왔고 '나 어떡해'의 빅히트는 젊은 층에 파급력을 발휘했다. 금상을 받은 상명여대 박선희의 '하늘', 동상을 수상한 전남대 트리오의 '저녁 무렵' 같은 창작곡들은 대학가요제의 향후 정체성과 성공에 기여한 기름진 자양분이었다. 또한 동상을 수상한 창작 포크송인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은 대학가요제 수상 후 캠퍼스는 물론이고 중고등학생층에까지 꽤나 인기가 많았던 노래다. 민경식, 정연태, 민병호 3명으로 구성된 <서울대 트리오>는 수상 후 하늘을 찌르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로가수로 전향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대학가요제에 나온 것은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노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인기에도 프로전향 안해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방희준이고 작곡가는 민병무다. 서울공대 출신인 작곡가 민병무는 <서울대 트리오>의 멤버인 민병호의 친형이다. 원래 '젊은 연인들'은 작사 작곡자인 방희준과 민병무로 구성된 아마추어 포크듀오 <훅스>의 노래로 대학가에 제법 알려진 노래였다. 이 노래에 담긴 사연은 저 유명한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적인 참사를 불러온 화재사건은 가수 정훈희 패밀리의 악기를 다 태워버리는 상처를 남겼고 남성듀오 <훅스>에게는 잔인한 순간이었다. 당시 성탄절 아침에 호텔에 불이 났을 때, 두 사람은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작사가 방희준의 생일파티를 위해 호텔방을 잡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 그만 작곡자 민병무가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

멤버 한 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로 듀오 <훅스>는 자동 해체되었고 노래는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잃었다. 몇 년이 지난 1975년. 김성호와 박진섭으로 구성된 남성듀엣 <아도니스(호와 섭)>가 이 노래를 '다정한 연인들'로 제목을 수정해 리메이크했지만 히트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이에 작곡가 민병무의 동생 민병호는 고교동창인 농대생 민경식과 미대생 정연태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해 형의 유작을 들고 제1회 대학가요제 본선에 출전했다. 다행히 동상을 수상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세상에 이 노래를 알렸던 것.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젊은 연인들'은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명곡으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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