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는 말처럼 격변의 역사가 펼쳐진 시대나 빈곤과 억압이 난무했던 암흑의 시대에는 어김없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한 명곡과 명반이 탄생했다. 대중음악의 존재가치는 오락적 기능이 아닌 희망과 위로의 기능이 발휘될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대중음악은 한국대중문화의 핵심장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시대마다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고 공감을 이끌어낸 뮤지션들의 치열한 고뇌와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이 공존했던 격변의 80년대는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그 소임을 다했다. 록밴드 <들국화>와 김현식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거칠고 애절한 감성으로 지치고 성난 대중의 마음을 위로했다면, 남성듀오 <시인과 촌장>은 상처받은 대중의 감수성을 어루만지는 은유적인 노래들을 통해 한 줄기 희망을 제시했다. 학창시절 여러 미술대회에서 수상했던 화가지망생 하덕규는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동창생 오종수와 후배 전홍찬과 트리오 <바람개비>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명동 쉘부르에서 노래한 다운타운 가수를 거쳐 오종수와 듀오 <시인과 촌장>을 결성해 데뷔음반을 냈다. 1981년의 일이다. 팀 이름은 서영은의 단편소설 제목을 차용했다. 1집은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내용보다 음악장르의 탐색이 치열했었다. 삶과 음악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치열했던 그는 이병훈의 '님타령'과 남궁옥분의 재기 곡 '슬픈 재회'의 빅히트로 작곡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는 격변의 시대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는 반항과 고민을 담기보단 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맑고 건강한 노래를 추구했다. 하지만 위스키 반병을 마셔야 잠이 들고 하루 2갑 이상씩의 줄담배를 피웠던 차가운 현실은 그의 심신을 망가뜨렸다.

양희은의 '한계령','찔레꽃 피면'을 통해 작곡가로 명성을 이어간 하덕규는 탁월한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2기 <시인과 촌장>을 재결성해 1985년 프로젝트 음반 <우리노래 전시회>에 참여해 '비둘기에게'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1986년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시대의 명반 <시인과 촌장> 2집이 세상에 나왔다. 화가지망생답게 직접 그린 그림으로 장식된 음반재킷은 신선했다.

음반재킷 그림 직접 그려

<시인과 촌장> 2집은 80년대 서정주의 포크를 대표하는 명반이다. 이 앨범은 함춘호, 이병우, 조동익, 하덕규가 빚어내는 상큼한 기타 사운드의 정수가 담겨있다. 또한 고난 극복과 위무의 메시지가 선명한 이 음반은 마치 동심으로 가득 찬 동요 같은 노래들로 가득 차 있다.

하덕규는 처절했던 외로움과 괴로움을 거칠고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보단 놀라운 서정과 은유의 어법으로 노래했다. '푸른 돛' '고양이에게' '사랑일기' '진달래'등 동화 제목 같은 노래들은 함춘호의 기타 연주와 합체되며 서정의 극치를 구현했다. 모든 곡에는 어두운 정서가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지만 소박하고 상큼한 가사와 경쾌한 기타 사운드로 극복하는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고양이'는 날렵하고 경쾌한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입체적인 기타사운드가 압권이다. '얼음 무지개'는 80년대가 배출한 포크 록의 정수다. '사랑일기'는 새소리 효과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가 귀에 박혀오는 이 앨범의 백미다. 서정의 극치를 들려주는 '풍경'도 필청 트랙이다.

수록곡 중 제목에 '비둘기'가 들어간 노래만 3곡이나 된다. 그 중 거친 하덕규의 보컬이 인상적인 마지막 곡 '비둘기 안녕'은 영롱한 종소리의 파장처럼 여운이 강력했다.

어린 시절의 이상향 담아

사실 그의 성장기는 상처투성이로 얼룩져 있다.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극도의 가난을 경험했다. 방황이 극심했던 고등학교 때는 여러 번 가출로 설악산에 텐트를 치고 살았고 자살까지 기도했었다. 역경 속에서도 그가 언제나 그리워했던 것은 고향 동해바다. 2집은 그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아롱져 있는 어린 시절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이상향을 담아낸 한 폭의 파스텔화 같은 명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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