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발표된 안정애의 '대전블루스'는 한마디로 대박이 났던 빅히트곡이다. 음반은 출반 3일 만에 서울과 지방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이에 신세기레코드는 야간작업까지 강행했을 정도로 창사 이래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연 작사, 작곡가는 물론이고 가수에게 특별보너스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음반 최다 판매 특별보너스

195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대중가요와 영화가 공생하며 윈윈했던 시절이다. 영화가 흥행 대박을 터뜨리면 영화 주제가 또한 동반 히트되었고 노래의 빅히트로 제작된 영화 또한 노래의 인지도를 등에 업고 어느 정도의 흥행이 담보되었다. 엄청난 흥행몰이를 한 '대전블루스'도 예외는 아니다. 노래 가사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사용한 영화가 1963년 제작되었다. 이종기 감독이 연출하고 최무룡, 엄앵란, 신성일 등 당대의 인기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이다. 당연 안정애의 노래는 주제가로 채택되었다.

'대전 발 0시 50분' 막차는 숱한 만남과 이별의 장면을 연출했다. 심야의 대전역은 인근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장사꾼과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리고 방학 철에는 캠핑을 가거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보슬비가 뿌려지거나 눈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밤을 막론하고 이 열차에서 헤어지는 연인들의 모습은 슬픈 노래 그 자체였다. '대전블루스'의 가사는 이별을 아파하고 서러워하는 트로트의 전형이다. 이 노래의 성공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이별의 슬픈 정서를 통한 공감대 형성에 있다. 실제로 국가재건과 경제개발을 모토로 했던 196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호남선은 가난과 이농으로 고향을 떠났던 수많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하나의 상징이었다.

대전역하면 '대전블루스' 노래와 더불어 추억의 명물이 하나 더 있다. 가락국수다. 열차가 대전역에 잠시 서면 사람들은 급히 내려 가락국수 한 그릇을 후루룩 먹고 타는 즐거움을 만끽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그 시절 많은 대중가요들은 서민의 질펀한 삶과 만남과 이별의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기차역을 소재로 힘겹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당대 서민의 애환을 투영했다. '대전 발 0시 50분' 호남선 막차를 타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역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상상해보면 그 자체로 노래의 소재로 더없이 근사한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었을 것 같다.

조용필·심수봉 등 리메이크

현재 '대전 발 0시50분' 열차는 사라지고 없다. 노래가 발표된 지 1년 후인 1960년 2월에 3시간 연장된 '대전 발 3시05분' 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이 노래를 부른 오리지널 가수 안정애는 생존해 있지만 역무원과 신신레코드(신세기레코드 전신) 영업부장을 거쳐 아세아레코드사 대표까지 지낸 작사가 최치수와 작곡가 김부해 또한 이 세상에 없다. 현재 대전역광장에는 거대한 돌로 제작된 '대전블루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새겨져 있으나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은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가수 안정애가 1983년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이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다시금 후대에 알렸던 후배가수 조용필의 이름을 함께 새기지 않는다면, 자신의 이름을 넣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대전역 인근의 중구 대흥동에는 동명의 선술집이 있다. 그곳에서는 시민단체, 예술단체 등이 주도해 '대전 부루스 부르기 콘테스트'가 열리기도 했다. 어느 지역이나 지역 색을 상징하는 대표 곡이 있다. 부산하면 '부산갈매기'를 떠올리듯 대전하면 '대전블루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명곡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시대마다 후배가수들의 리메이크 작업은 필수적이다. '대전블루스'의 국민가요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조용필 말고도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가수는 무수하다. 심수봉, 김부자, 은방울자매, 문주란, 조미미, 이수미, 김연자, 임주리, 김지애 등 여자가수는 물론이고 나훈아, 김정호, 장사익, 위일청 등 남자가수들까지도 이 노래의 리메이크 대열에 합류해 존경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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