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만에 돌아와 세계를 노래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뮤지션의 변신은? 이 문제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인기를 뽐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가수일지라도 중년을 넘어서면서 대부분 퇴행적 음악행보를 거듭했던 사례를 무수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젊은 뮤지션들도 다르지 않다. 그동안 구축했던 이미지와 음악 스타일에 변화가 느껴지면 어김없이 대중적 호불호 반응에 부닥칠 각오를 해야 된다. 그만큼 대중가수의 음악적 변신은 언제나 모험적이다.

음반이 팔리지 않는 디지털 음원의 시대다. 어쩌면 파격적인 변신을 담아낸 나이든 가수의 새 음반은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신과 도전은 실종되고 트렌드에 민감한 상업성만을 추구하는 엔터테이너들로 한국대중음악계가 넘쳐난다면? 끔찍한 일이다. 아무리 음악적으로 뛰어난 신보를 발표해도 추억이라는 이름에 매몰되어 외면당하는 중장년 가수들의 암울한 현실은 안타까운 장벽이다. 그래서 상업적 성과 여부와 상관없이 음악적 발전과 진보를 성취한 뮤지션의 변신은 찬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화가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던 최백호가 또다시 범상치 않은 변신을 시도했다. 무려 12년 만에 발표한 정규앨범인 19집 '다시 길 위에서'를 통해 이번에는 '월드뮤직' 가수로 거듭났다. 그동안 몇 차례의 싱글과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지만 정규 앨범은 2000년에 발표한 18집 '어느 여배우에게' 이후 처음이다. 신곡 10곡을 포함해 총 11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은 팝 재즈, 누에보 탱고, 라틴, 집시 스윙, 로맨틱 발라드 등 실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 최백호의 놀랄만한 음악적 도전이 담겨있다. 일단 추억과 과거의 히트곡에 매몰된 생계형 가수가 아님을 증명한 그의 변신과 도전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최백호는 1994년 45세의 나이에 신곡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다. 발표 초기, 전혀 반응이 없었던 이 노래는 IMF 경제 환란으로 고통 받았던 중년세대들을 위로하는 시대의 명곡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쓴 좋았던 시절을 반추하게 하는 아름다운 노랫말은 힘겨운 경제위기에 고통 받는 중년세대들에게 무한 공감대를 일으키며 잃어버린 낭만의 가치를 환기시켰다. 최백호가 단숨에 '낭만전도사'로 불리기 시작한 이유다. 시기적절한 변신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그가 다시 한 번 파격적 변신을 담은 이번 음반은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페이소스 넘치는 애잔함과 파워풀한 보컬이 매력적인 최백호는 '늙어가면서 더욱 멋있는 가수'로 평가받는다. 이번 앨범에서도 그는 늙어가는 시간의 무상함과 존재에 대한 연민,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낭만시대에 대한 회한을 드라마틱하게 노래하고 있다. 최백호의 신보는 자신만의 색채를 담보한 보컬리스트의 가창력과 아름다운 멜로디와 시적인 노랫말, 그리고 고급스런 편곡이 어우러져 수준 높은 사운드와 완성도를 구현했다.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담아낸 이 앨범은 아이돌로 대변되는 K-POP과 인디음악으로 양분된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중장년 가수들이 지향할 대안적 콘텐츠를 제시했다. 가왕 조용필이 무수한 명곡들을 쏟아냈던 8집에서 그랬듯 싱어송라이터 최백호도 이번 앨범에서 타인의 곡들로 트랙을 구성하는 변화를 통해 노래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따라 부르기 좋은 가요가 아니기에 나이든 팬들의 '어렵다'는 반응은 예견된 수순이다. 수록곡들은 기존에 그가 노래했던 가요 질감과는 멀찍한 간극을 두기에 기존 팬들에게 그의 변신은 유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핫트랙스 가요부문 일간 판매 상위권에 올랐을 정도로 그를 잘 모르는 젊은 층에서 뜨거운 반응이 감지되고 있다. 트위터나 포털 사이트에는 '최백호 할아버지 새 앨범 좋다', '최백호옹이 박주원과 만난 것은 신의 한수였다'는 호평이 오르고 있다. 뮤지션 JK김동욱은 최백호의 신보를 듣고 트위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글을 남겼다. 이쯤 되면 최백호의 변신은 무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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