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곡 '거리' 첫 블루스 포크 시도

1970년대 군사정권시절엔 사회문제를 언급한 노래는 대부분 황당한 이유를 붙여 금지됐다. 사전심의를 거쳤지만 이정선의 데뷔 앨범 수록곡들은 가사가 '불신감을 조성하고 냉소적'이라는 이유로 총 11곡 중 무려 9곡이 사후심의에 걸리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그의 초기 블루스 포크 명곡으로 회자되는 '거리'는 금지조치까지 내려졌다. 지금 시점에서 '거리'의 가사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 거리를 덮었네'는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 음악인의 이유 있는 발언으로 여겨지겠지만 유신정권의 색안경엔 불온하기 그지없었던 것 같다.

'금지된 노래는 팔지 못한다'는 지침이 내려지자 음반제작사는 자발적으로 배포된 음반들을 수거했고 음반은 자연스럽게 사장됐다. 문제는 이 앨범이 당시 한국대중가요계에서는 존재가 희박했던 블루스 포크를 시도한 의미심장한 음반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앨범 차원은 아니지만 소박하게 시도된 이정선의 첫 블루스 음악은 80년대에 꽃을 피우기 한 참 전에 당국에 의해 새순이 잘려나갔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신중현, 김민기에 이어 이정선의 '마이너스 집'은 또 하나의 저주받은 걸작으로 탄생됐다.

서울대 미대생이었던 그가 어떻게 직업음악인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정선은 대학 2학년 때 입대해 군악대에서 활동하며 실전 음악 감각을 익혔다.

1971년 말, 제대를 앞두고 외출을 나왔을 때 그는 대학후배 김민기의 독집을 음반가게에서 들었다. 1969년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한대수의 공연을 보고 받은 충격이 다시 느껴졌다. 그때부터 창작을 시작했다.

전역 후 복학을 앞두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음악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엔 노래하는 가수보다는 외국팝송을 번안하고 편곡, 통기타 연주를 주로 했다.

그러다 1973년 2월 종로 YMCA에서 자신의 노래를 발표하는 공연을 했다. 가수로서는 공식 데뷔 무대다. 이후 CBS방송국에 출연한 그의 노래를 들은 평론가 최경식의 격려와 김진성 PD의 주선으로 데뷔음반을 제작할 기회를 획득했다.

마이너스 집의 재킷 디자인은 서울 미대 친구가 해줬다. 밤색 배경에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근처 거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청년 이정선의 정지된 모습과 거리를 지나가는 여성을 슬로 셔터로 동감이 느껴지게 촬영했다.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를 배치한 앨범 재킷은 왠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의 앨범재킷들은 가수의 사진을 크게 실었던 당대의 획일적이고 촌스런 음반들과 차별되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미대 출신답게 그는 음반에 수록된 음악들을 재킷 디자인으로 표출하는 '음악의 미술화'라는 새로운 지평을 일궈낸 이 분야의 선구자다. 청소년기부터 학교 교실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밤을 새워 그림 작업을 했던 그는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표현하고 싶은 꿈과 사회와의 부조화를 짧고 축약적인 가사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선은 70년대 팬들에겐 포크가수로 80년대 팬들에겐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블루스 뮤지션으로 기억된다. 그의 장르 파괴적 음악행보는 포크, 록, 블루스, 심지어 트로트에까지 방대하게 펼쳐있다. 당대의 트렌드 음악을 의식적으로 배제해 온 그는 자기 색깔이 또렷한 소리여행을 계속해왔다.

음악도 예쁘고 화려하게 할 수 있는 부분과 세상에서 잘나가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다 피해갔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모자란 듯 투박해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당대의 다른 앨범들과 그의 앨범이 확연하게 차별되는 지점이다.

팔색조의 스펙트럼을 통해 발산된 그의 음악은 주류와 언더그라운드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했다. 그가 연령층에 따라 각기 다른 장르의 가수로 기억하는 것은 이처럼 자유로운 음악어법의 산물이다. 이정선은 노래를 '이야기'한 한국 블루스 음악의 개척자다. 이 음반에 수록된 '거리'는 그의 블루스 음악여정이 데뷔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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