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라디오극 방송되자마자 빅히트… 66년 휩쓸어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던 최희준은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림자', '하숙생', '종점' 등 히트곡 퍼레이드를 벌였던 60년대 최고의 보컬리스트였다. 최희준은 대학 3학년 때인 1957년, 서울대 장기자랑대회에서 법대 대표로 나가 김광수 악단의 반주로 외국 팝송을 불러 입상을 했다. 이를 인연으로 미 8군 쇼 단체 '쇼 보트'에 소속되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수입이 짭짤한 미 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프로 가수가 되려는 마음은 최희준에게 없었다. 1958년 대학 졸업반 때 고시에 낙방해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중 미 8군 무대에서 노래하던 친구의 소개로 작곡가 손석우를 만났다. 1960년 명동의 어느 다방, 새로운 목소리를 지닌 신인가수를 찾고 있던 손석우는 최희준에게 본명인 성준 대신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희준(喜準)이라는 예명을 작명해주었다.

주제가 홍수는 1960년대 가요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당시는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 주제가를 불러야 인기가수가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또한 방송국 개국이 급물살을 타 문화방송(MBCㆍ1961년), 동아방송(1963년), 동양방송(TBCㆍ1964년) 등이 KBS와 더불어 다채널 시대를 열었다. TV도 KBS, TBC, MBC 순으로 개국하며 3대 채널 시대로 자리 잡았다.

1961년 남산 KBS 스튜디오에서 열린 개국 쇼에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부른 최희준은 1963년 '진고개신사', 1964년 '맨발의 청춘', '빛과 그리고 그림자', 1965년 '하숙생', '종점' 등을 연속적으로 히트시키며 자가용까지 마련해 국내 마이카 1호 가수가 되었다.

1960년대는 극장 쇼 무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최희준에게도 극장 쇼와 관련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1965년 말 최희준이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달라며 난리가 났다. '하숙생'은 새롭게 시작된 KBS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여수 공연은 이 드라마 주제가가 나간 지 5~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최희준은 지방순회공연을 떠나기 전 급히 녹음만 마쳤을 뿐 가사를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삽시간에 치솟아 열화와 같이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 때문에 그는 당황했다.

실제로 '하숙생'은 최희준이 극장 쇼를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세 번 이상을 앙코르로 불러야 할 정도로 빅히트했다. 1966년 정식 음반으로 발표된 이 노래는 방송을 틀면 어김없이 흘러나와 "최희준 밖에 가수가 없냐"는 불평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노래로 인해 제1회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하숙생'의 가사도 좋았지만 최희준의 구수한 창법도 근사했다.

김석야가 집필한 KBS 연속극 '하숙생'의 줄거리는 지극히 통속적인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다. 젊은 화학도인 남자와 미모의 아가씨는 결혼을 약속한다. 아코디언을 연주할 정도로 음악재능이 뛰어난 남자는 약혼 기념으로 노래를 작사ㆍ작곡해 여자를 만날 때마다 들려준다. 바로 주제가인 '하숙생'이다.

남자가 근무하는 화학실험실에 놀러 간 여자는 화재사고를 낸다. 남자는 여인을 구했지만 얼굴과 온몸에 흉측한 화상을 입는다. 하지만 미스코리아로 뽑힌 여자는 약혼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복수심에 불탄 남자는 성형수술을 하고 여자가 사는 집 부근에 하숙하며 복수를 위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하숙생'을 부른다. 여자가 노래를 들을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여자는 미치게 되고 남자는 복수에 성공했지만 연민의 정에 괴로워한다는 내용이다.

연속극과 주제가를 쓴 김석야는 일제강점기 공주교보 시절 문학도였다. 1963년 어느 봄날 그는 충남 공주 동학사 쓰레기장에서 여승이 되기 위해 깎아버린 여자들의 머리카락 더미를 보았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면서 김석야는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허무한 것이란 생각에 '하숙생'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의 히트와 더불어 영화로까지 제작된 '하숙생'의 인기는 1966년 최대 히트작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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