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체념' 강렬한 사운드에 담아

모던 록 밴드 '허클베리핀'의 리더 이기용은 "보통 가사 하나를 쓸 때 2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언제나 그 시점에서 제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을 화두로 삼는다"고 말한다. 밴드의 음악작업을 거의 도맡아 작업하는 그에게 노래 가사는 인생여정에서 시기 시기마다 맞이한 가장 내밀하고 치열한 정서가 반영된 결과물인 것이다.

20대 청년시절에 쓴 '보도블럭'의 가사에는 실존 인물과 가상으로 상정한 망자까지 세 명의 젊은 친구들이 화자로 등장한다. 세 친구가 함께 있을 때 실제로 이야기했을 법한 가상의 내용은 상반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비 오는 날에 전화를 걸어 어제 그 친구를 다시 만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는 첫 줄 가사는 오랫동안 온갖 부조리한 것들을 함께 겪은 친구들이 공유하는 세상에 대한 체념의 정서를 암시하고 있다.

두 친구는 세상을 떠난 친구의 기일 날에 무덤에 가려고 만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죽은 가상의 친구는 단순한 친구일 수도 있고 사회적 불합리에 저항하다 먼저 떠난 선각자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이기용은 "사회 부조리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냈던 모든 사람일 수 있다.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설정해 가사를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싸우는 거라고 니가 해준 말'이라는 부분은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는 두 친구의 가슴에 묻어둔 먼저 떠난 망자의 말로 읽힌다.

아무 말 없이 무덤을 향해 가는 것은 청춘의 끓는 에너지가 있기에 포기할 수 없지만 아무런 전망이 없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두 친구가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죽은 친구를 '그녀'로 명기한 것은 닥쳐올 어마어마한 분노의 폭발음을 음악적으로 순화시키기 위한 장치다. 실제로 노래는 느릿한 템포에 서정적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담겨 시작되는데 읊조리는 것 같던 노래는 한순간에 폭발하는 파괴적이고 강력한 사운드로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다.

음악적으로 가상 강력한 질풍노도 같은 노래의 절정 부분이 'Beneath the pavingstone there lies beach Upon the pavingstone a tomb of socirty'라는 영어가사로 표현된 점은 흥미롭다. 해석을 하자면 '보도블록 아래에는 해변의 백사장이 있고 보도블록 위에는 사회의 무덤이 있다.'는 뜻이다. '프랑스 6.8 혁명'을 다룬 영어 원서를 읽다 발견한 'beneath the paving stone beach'란 짧은 문장을 보고 영감을 얻은 이기용이 완성시킨 이 부분은 처음 경험한 모티브의 오리지널리티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보도블록을 사이에 두고 표현된 이 완벽하게 상반된 질감의 세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실제로 온갖 사람들과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다니는 보도블록을 살짝 들어보면 완충효과를 위해 거의 다 모래가 깔려 있다. 이기용은 보도블록을 중심에 두고 아래에 있는 모래를 통해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근사한 해변의 백사장이 되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절망적인 사회적 무덤일 수도 있겠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했다.

허구와 실존이 공존하는 상반된 세계를 보도블럭의 위아래를 통해 그려내는 기막힌 가사로 승화시킨 셈이다. 이 얼마나 세기말의 상황을 근사하고 놀랍게 표현한 가사인가!

이제 엔딩 부분이다. 이기용은 걸어가는 들판은 전에 와 본 듯하고 하늘은 무심히 졸고 자신의 마음은 바람이 되어 떠돈다고 적고 있다. 산에 올라가 친구의 무덤에 보고 들판을 걸어 돌아오는 길에 느낀 화자의 감정은 몽롱하고 나른한 상태다. 이 부분은 절망적이고 복잡한 심리적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정서가 은유적으로 드러나 있다. 자연스럽게 세상을 부슬 듯 폭발했던 비트는 사라지고 다시 비애감에 빠져들게 하는 서정적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짧은 가사 안에 담긴 불안, 체념의 서정적 분위기와 분노의 폭발 같은 서사적 분위기가 공존하는 '보도블록'은 진정 범상치 않은 우리 시대의 명곡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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