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동군 화산리 절골

중화사 요사채와 범종각.
굵어진 눈발 사이로 감나무들은 하얗게 물들고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영동역에서 내린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부슬부슬 눈이 내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팔각정자인 용두정이 흰 눈으로 뒤덮인 수풀을 품고 동산 꼭대기에 올라앉아 나그네를 굽어보고 있다.

역 앞 정류장에서 당곡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며 영동의 가로수인 감나무들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20분쯤 달렸을까? 버스는 화신리 절골 입구에 길손을 내려놓고 다시 바퀴를 굴린다.

백두대간 삼도봉에서 북북서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빚은 삼봉산 자락에 똬리를 튼 절골은 가멸찬 산 기운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이루어진 아늑한 산마을이다. 바람이 잔잔하고 물이 풍부한 덕에 넉넉하고 평화로운 이 마을은 예부터 임산물과 과수재배로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광복 이전부터 양잠으로 높은 소득을 올려온 절골은 1970년대 초반부터 영동군의 특산물인 포도 재배로 눈길을 돌려 더욱 풍족해졌으며 감과 배, 사과 등 다양한 과실을 수확하고 있다. 포도밭의 비가림막과 곶감 건조장 위로 쌓인 눈이 풍요로운 새해를 기원하는 듯하다.

절골 마을 주변 산이 눈으로 덮여 있다.
수령 600여 년의 느티나무 숲은 한폭의 수묵화

마을자랑비를 지나면 키다리 느티나무 숲이 눈길을 끈다. 탁 트인 동구 앞을 풍수상 비보(裨補)하기 위해 조성된 숲으로 역사가 600년이 넘는다니 마을의 연륜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으리라. 100여 그루의 느티나무 중에 가장 큰 나무의 가슴높이 둘레 지름은 130㎝에 이른다. 과수를 가꾸던 주민들이 짬짬이 쉬던 휴식공간이었던 이 숲은 1991년 바닥을 고르게 다지고 정자와 평상을 세워 공원으로 조성한 이후 외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여름날 찾았던 이 숲은 한낮의 뜨거운 햇볕과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별천지였다. 숲속으로 들어서면 이파리에 걸러진 희미한 빛과 시원한 바람이 편안하게 온몸으로 스며들곤 했다. 숲을 끼고 흐르는 맑은 실개울에서는 물고기들이 제 세상 만난 양 노닐고, 다슬기들은 바닥에 깔린 자갈에 붙은 이끼를 핥았다.

겨울의 숲은 또 다른 정취에 안겨 있다. 이파리를 떨군 나뭇가지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어느 화가인들 이토록 순결한 인상의 수묵화를 그려낼 수 있을까. 흑백의 간결한 명도만이 살아있는 그림을 마주하노라니 딴 세상처럼 신비로운 대자연의 선물에 감사할 따름이다. 더욱이 고요한 적막감마저 휘감겨 도니 1920년대의 무성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다.

왜군과 맞선 승군의 얼이 깃든 천년고찰 중화사

포도밭의 비가림막 위로 눈이 쌓여 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경사진 오르막이 드리운다. 절골이라는 마을 이름을 낳은 천년고찰 중화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순백의 아름다움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오른다. 길 좌우로 펼쳐진 빽빽한 숲은 설국이 부럽지 않은 눈부신 설경을 담은 채 길손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이윽고 절집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버스정류장으로부터 2㎞에 불과한 거리지만 주변 풍광에 홀린 까닭인지 1시간 가까이나 걸렸다.

삼봉산 줄기인 천마산 중턱에 위치한 중화사는 신라시대인 700년 무렵 의상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당시에는 남각산(지금의 삼봉산) 기슭에 있었으며 용화사라고 불렀다. 그 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명종(재위 1545∼1567) 때 서산대사 휴정이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이름을 중화사(重華寺)라고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되었으며 승려들은 영규스님이 이끄는 승군에 참여해 왜군과 싸웠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중화사 대웅전은 1677년(조선 숙종 3) 신축한 뒤 여러 차례 보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폿집으로 2002년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13년 7월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안타깝다. 다만 산신각과 나한전을 비롯해 인근 야산으로 불이 옮겨 붙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다.

중화사는 풍수적으로 외풍을 막아내고 좋은 기운을 안으로 끌어안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으며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어우러진 주변 풍광도 인상적이다. 절 마당에 서서 저 멀리 겹겹이 이어진 산봉우리를 타고 넘어오는 눈구름을 바라본다. 눈발은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불타버린 대웅전 터 위로 소복소복 무심하게 내려앉는다.

▲ 찾아가는 길

중화사 장독 위로 흰 눈이 쌓였다.
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영동읍-황간·김천 방면 4번 국도-회동교 앞(우회전)-절골 버스정류장(좌회전)을 거친다. 대중교통은 영동역 앞에서 당곡-삼봉 방면 버스를 타고 절골 정류장에서 내린다.

▲ 맛있는 집

영동읍내의 토가(043-745-3384)는 산양산삼을 넣고 삶은 닭백숙과 오리백숙으로 유명하다. 담백하고 쫄깃한 고기맛과 약간 쌉싸름한 향이 나면서 구수한 국물이 어우러져 일품이다. 백숙을 맛본 뒤에 채소와 버섯을 넣고 끓인 국수도 별미다. 이외에 전복이나 참옻을 넣은 삼계탕과 토종닭해물볶음탕, 산양산삼 물로 숙성한 생오리구이, 자연산 버섯만으로 끓인 버섯찌개 등도 인기다.


수령 600여 년 느티나무 숲의 설경.
설경에 파묻힌 천년고찰 중화사.
용두공원 정상에 올라앉은 용두정.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중화사 삼성각.
절골의 마을자랑비.

글 사진=신성순 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