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정원에 깔린 붉은 융단, 꽃무릇 별천지

단풍인들 이보다 고울 수 있을까? 가느다란 꽃줄기 위로 여러 장의 빨간 꽃잎이 한데 모여 말아 올린 자태가 마치 빨간 우산을 펼친 것 같다. 꽃잎보다 훨씬 긴 까닭에 꽃 밖으로 뻗으며 곱게 치켜 올라간 수술들은 붉은 마스카라를 칠한 여인의 속눈썹처럼 요염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천수만에 이르는 꽃들이 일제히 활짝 피었으니, 흡사 대자연의 정원에 드넓은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아름답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황홀한 장관이다.

꽃무릇. 꽃이 무리 지어 핀다는 뜻으로 붙인 그 이름이 딱 어울린다.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석산(石蒜)에서 피는 꽃으로 석산화(石蒜花)라고도 한다. 잎이 없는 비늘줄기(알뿌리)에서 올라온 30~50㎝ 높이의 꽃대 끝에 우산모양(산형 傘形) 꽃차례를 이루며 우산살처럼 퍼져 핀 모습이 매혹적이다. 그러나 장미에 가시가 있듯 이 꽃에는 독이 있다. 가까이하면 눈에서 피가 날 만큼 독성이 강해 ‘눈에피꽃’이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고 ‘상여꽃’이라 하여 아이들의 접근을 막는 지방도 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꽃무릇 자생지

꽃무릇과 상사화(相思花)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꽃이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즉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점은 같지만 모양새와 꽃피는 시기가 확연히 다르다. 꽃무릇은 잎이 좁고 수술이 길며 꽃이 빨간 반면에, 상사화는 잎이 넓고 수술이 짧으며 꽃빛이 연분홍색이다. 또한 상사화는 칠월칠석 전후(양력 8월경)에 피고, 꽃무릇은 백로(양력 9월 8일경) 무렵부터 피기 시작해 추분(양력 9월 23일경)을 전후하여 만개하며 10월 초순까지 붉은 빛을 이어간다.

우리나라에서 꽃무릇 향연이 가장 화려하게 펼쳐지는 곳은 함평 용천사 일원이다. 사찰 진입로로 접어들면 운암마을의 논두렁 사이로 띠처럼 길게 드리운 꽃무릇이 눈길을 끌기 시작하다가 광암저수지를 지나 꽃무릇공원에 이르러 붉디붉은 꽃마당이 절정을 이루며 사찰 경내 곳곳에도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용천사 꽃무릇 군락지의 총면적은 약 2㎢(60여만 평)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자연보호 100경 가운데 제48경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꽃무릇 별천지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산책로 주변에는 원추리, 산매발톱, 꽃창포 등 20여 종의 들꽃으로 이루어진 야생화 단지도 있고 조롱박, 꽃호박, 수세미 등으로 꾸며진 200여 미터 길이의 터널도 있으며 1,500여 기의 돌탑도 늘어서 있다. 해마다 9월에 여는 꽃무릇 큰잔치에 가면 다채로운 문화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

석등과 해시계 등 문화재 품어

용천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백제 문주왕 때(475~477년) 행은선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 1년(600년) 행은선사가 세웠다는 말도 전해져 혼란스럽다. 어쨌거나 고려시대 전성기에는 3천여 승려가 수도한 대찰이었던 용천사는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현존하는 당우들은 근래에 다시 세운 것이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대웅전 층계 아래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용천은 서해로 통하는 샘으로 용이 살다 승천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용천사에서 볼만한 문화재는 석등과 해시계다. 높이 2.38미터의 석등은 조선 숙종 11년(1685년) 쑥돌(단단하고 푸른 잔 점이 많은 화강암의 하나로 애석이라고도 함)로 만들어졌으며 짜임새가 투박한 편이다. 그러나 옥개석 네 귀에 달린 거북 조각이 세련되어 눈길을 끈다. 다만 두 귀의 거북 조각은 파손된 상태여서 아쉽다. 전남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용천사 해시계는 재질이 쑥돌이어서 석등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잃어버렸으나 1980년 무렵 경내 흙더미에서 발굴되었다. 본디 두께(높이) 14㎝에 가로세로 모두 39㎝의 정사각형이었으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낮 시간에 해당하는 묘시(오전 6시 전후)에서 유시(오후 6시 전후) 사이는 남아 있어 사용하는 데 지장은 없다.

용천사는 늦가을 단풍도 아름답다. 꽃무릇이 진 뒤에는 그 많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므로 호젓하게 단풍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 찾아가는 길

영광 나들목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함평 방면 23번 국도를 타고 남하하거나 함평 나들목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영광 방면 23번 국도로 북상한다. 원산 3거리에서 해보 방면으로 4.5㎞쯤 달린 뒤에 좌회전해 1.8㎞ 북상하면 용천사 주차장이다.

대중교통은 서울에서 고속버스, 광주․목포․전주 등지에서 함평행 직행버스 운행. 또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함평역에서 내려 함평읍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함평읍에서 용천사로 가는 버스는 하루 4회 운행.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해보면(문장)까지 간 다음 택시를 탄다.

# 맛있는 집

함평 장터는 비빔밥으로 역사가 깊다. 옛날에는 삶은 돼지고기를 비빔밥에 얹었는데 1980년경부터는 쇠고기 육회를 쓴다. 윤기 자르르 도는 쌀밥에 채 썬 육회, 콩나물, 애호박나물, 김, 깨소금 등을 듬뿍 얹고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비게도 얹어준다. 곁들여 먹는 선짓국도 색다른 맛이다. 함평읍 기각리 5일 장터의 여러 집 가운데 TV 프로 ‘먹거리 X파일’을 통해 ‘착한 육회’로 선정된 화랑식당(061-323-6677, 322-3569)이 유명하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