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햇볕·시간의 종합물… 발효 과정 거치며 깊은 맛 생겨배추시래기·무청시래기·갓시래기… 다양하고 독특한 맛
이 시의 끝은 슬프다. '회사원' 지인들까지 회사원을 위해서 변명을 하고 사과를 하지만 끝내 '주인'은 용서하지 않는다. 결국 용서받지 못한 '회사원'은 유치장에 들어간다. 이튿날 새벽, 유치장에서 '회사원'은 얼핏 고향집에 걸어둔 시래기와 그 시래기 같이 마른 어머니의 손을 떠올린다. 시래기는 마치 어머니의 손 같이 모양새 없이 말라 있다.
시래기를 노래한(?) 시 중에는 도종환 시인의 '시래기'도 있다. "(전략)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이 시의 시래기는 우거지다. '배추나 무청의 겉 부분'은 우거지다. '웃'은 윗부분, 겉 부분을 뜻한다. 위, 바깥에서 걷어낸 부분이 '웃걷이' 곧 우거지다. 가장 오래된, 제일 먼저 버림받은,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것은 우거지다. 우거지를 말리면 우거지 시래기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래기는 '쓰다 남은 채소 말린 것'으로 여긴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보다는 시래기에 더 '깊은 뜻'이 있다. 우리는 채소도 바람에 말리고, 조기, 명태 등도 겨울바람에 말린다. 채소 말린 것은 시래기고, 조기는 굴비가 되고 명태는 북어가 된다. 그러나 단순히 말린 것이 아니다. 단순건조는 깊은 맛이 덜하다.
'건조, 말린다'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외부의 공기, 바람, 산소와의 접촉을 뜻한다. 식재료의 각종 성분은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서 일정 부분 발효(醱酵)한다. 발효는 미생물, 박테리아 등이 외부의 공기와 접촉하여 외부의 물질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발효는 외부와의 접촉, 균이나 박테리아의 활동으로 일어난다.
열풍 건조는 짧은 시간 이루어진다. 얼마간의 숙성은 가능하지만 발효는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짧은 시간 숙성이니 맛도 얕다. 겨울철 덕장에서 얼고 녹으면서 긴 시간을 보낸 북어와 열풍기 앞에서 짧은 시간 말린 북어의 맛이 다른 이유다.
시래기는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 대부분 자연, 수제, 소량 제조한다. 열풍 건조는 드물다. 바람과 햇볕이 드는 곳에서 만드니 자연스럽게 건조, 발효, 숙성의 과정을 모두 거친다. 잘 말린 시래기는 단순 건조식품이 아니다.
김치와 시래기를 두고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힘든 겨울철을 위한 식재료"라고 표현하는 것은 틀렸다. 전국 어디서나 신선한 채소를 사시사철 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김장김치와 묵은 지 그리고 시래기를 찾는다. 배추국과 무청시래기 국은 맛의 깊이가 다르다. 배추국이 무청시래기 국보다 맛없다는 뜻이 아니다. 배추국은 배추의 맛이, 무청시래기 국은 무청시래기의 깊은 맛이 살아 있다. 잘 손질한 무청시래기에서는 채소의 잘 익은 맛이 있다. 발효와 숙성의 맛이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의 '통나무집'은 청국장 등도 좋지만 전골이나 찌개에 곁들이는 시래기가 아주 좋은 집이다.
백담사 입구 인제군 용대리의 ''은 마음먹고 만든 시래기 전문점이다. 무청시래기, 배추시래기와 더불어 갓 시래기를 내놓는다. 강원도 산 갓은 독특한 향이 있다. 이 갓을 강원도의 겨울바람에 말려서 시래기로 만들고 국밥을 끓인다. 갓시래기국밥과 더불어 산초기름에 지진 두부, 백화고 표고버섯 구이 등도 독특한 음식이다.
통영 서호시장의 ''은 장어 뼈 등을 곤 국물과 시래기를 같이 끓인 것이다. 갯가 사람들이 이른 아침 편하게 먹던 음식이다. 장어 특유의 비린내가 있으니 호불호가 갈린다. 백반 집으로 소개한 포천의 '욕쟁이할머니집'도 시래기 전문점이다.
본 기사는 <주간한국>(www.hankooki.com) 제256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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