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마을, 원시생태로 돌아오다

삶의 터전 잃고 흩어진 구름골 사람들

1980년대로 접어들 무렵 전남 영광 일원에 우울한 소문이 나돌았다. 가마미해수욕장 인근 바닷가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이내 사실로 드러났다. 1981년 6월 착공한 영광원자력발전소는 1985년 12월부터 핵연료를 장전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핵발전소의 여파는 이웃 고을 고창에도 밀어닥쳤다. 1983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조달을 위해 아산면 운곡리에 댐과 저수지가 들어섰다. 일부 마을은 물밑으로 잠겼고 수몰되지는 않았으나 경작이 금지되어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정든 고향땅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안개와 구름이 많이 끼어 구름골 운곡(雲谷)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었다. 풍족한 땅은 아니었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로 아쉬움 없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었다. 주민들이 딱밭이라고 일컬었던 닥나무밭도 제법 넓었다. 운곡리 중에서도 운곡저수지 남쪽 언저리는 오베이골이라고 불렸다. 다섯 방향으로 흩어지는 골짜기라는 뜻인 오방골(五方谷)의 이 지방 사투리다. 오베이골은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다섯 고개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운곡저수지가 들어선 이후 강산이 세 차례 변하는 동안 오베이골 주변은 인적이 뚝 끊겼다.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저수지로 들어와 물고기 잡는 낚시꾼들이 드문드문 목격되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16번째 람사르 습지로 등록

오랫동안 잊혔던 운곡리 오베이골이 바깥세상에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계기는 2009년, 당시 고창군 부군수였던 한웅재씨(현 익산시 부시장)에 의해서였다. 환경 담당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일해 왔던 한웅재 전 고창 부군수는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가 오베이골의 옛 논밭을 발견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폐경된 논밭은 놀랍게도 내륙 산지형 저층습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농경지와 집터가 수십 년간 자연 상태로 방치되면서 생태계 스스로가 원시적 습지로 되돌아온 것이다.

잊힌 늪이었던 이곳은 이때부터 오베이골 운곡습지로 불리기 시작했다. 생태 전문가들은 이곳의 가치가 비무장지대(DMZ)의 생태계와 버금갈 만큼 높다고 평가한다. 운곡습지에는 멸종위기종인 삵, 수달, 말똥가리 등과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붉은배새매 등이 서식한다. 2011년 3월 고창군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2011년 4월 7일 우리나라 16번째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2011년 조사에서는 식물 459종, 포유류 11종, 조류 48종, 양서류와 파충류 9종 등 549종의 동식물이 발견되었지만 2014년 10월 국립환경과학원 조사 결과 864종으로 크게 늘었다. 2013년 환경부가 지정한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운곡습지를 찾는 발걸음이 점차 늘고 있다.

운곡습지 탐방은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8년 9월 문을 연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 및 생활상과 세계의 고인돌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상설전시관 밖에는 다섯 채의 움집 등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야외전시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습지 탐방 후 만나는 국내 최대 고인돌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10여 분 걸으면 고창천 위로 걸린 고인돌교를 건너 고인돌유적지에 다다른다. 너른 들판에 바둑판형 53기, 탁자형과 바둑판형의 중간 형태인 지상석곽형 20기, 형태불명 55기 등 128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어 고창고인돌유적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다. 고인돌유적을 지나면 이내 오베이골 운곡습지가 반긴다.

운곡습지 탐방로는 흙길과 나무로 된 데크로 이루어져 있다.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데크는 늪에서 1미터가량 공중에 떠있고 너비는 1미터가 채 안 된다. 데크 바닥에 깔린 발판도 5㎝ 간격으로 틈이 벌어져 있어 하이힐처럼 굽이 높은 신발을 신으면 발이 빠지기 십상이다. 데크 아래 습지에 사는 식물이 원활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햇볕을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울창한 원시림과 생명력 넘치는 늪, 허물어진 돌담과 집터 등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탐방로가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고인돌유적에서 1시간 남짓, 생태습지연못과 소망의종을 지나 삼거리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로 3분가량 가면 운곡고인돌, 왼쪽으로 잠시 걸으면 운곡서원에 닿는다. 국내 최대인 운곡고인돌은 덮개돌 길이 5.5미터, 높이 4.5미터, 두께 4미터에 이르며 무게는 300톤이 넘어 우람하기 그지없고 울창한 숲속에 파묻혀 있어 운치도 그윽하다.

운곡서원은 1797년 도학의 사표인 백암 김제, 농암 김주,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등 4인의 선산김씨를 모시기 위해 창건했다. 그 후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우가 철거되고 강당만 보존되다가 1900년 복원되었다. 운곡서원 앞에는 내무부 지정 보호수 1815호인 당상목 느티나무가 운곡저수지를 바라보며 우뚝 서있다. 사라진 마을의 역사가 300년이 넘었음을 말없이 대변해주는 유일무이한 산증인이다.

여행메모

▲ 찾아가는 길=고창 나들목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아산 방면 15번 국지도(국가지원지방도)로 잠시 달리다가 고인돌 교차로에서 고창고인돌박물관으로 들어선다. 대중교통은 고창에서 고인돌박물관 입구로 가는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 맛있는 집=고창읍내의 정통옛날쌈밥(063-564-3618, 2700)은 오로지 우렁쌈밥 하나로 승부하는 맛집으로 우렁이를 듬뿍 넣은 강된장 방식의 쌈장이 인기의 비결이다. 노란 좁쌀을 넣은 구수한 보리밥이나 쌀밥에 우렁이와 쌈장을 얹고 다양한 채소에 싸서 먹는 맛이 그리운 고향의 맛 그대로다. 칼칼한 호박된장찌개와 더불어 제육볶음을 비롯한 15가지가량의 밑반찬도 입맛을 돋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