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11월 30일이었다. 고찰의 정취에 젖어들고 싶어 무등산 기슭의 증심사로 발길을 옮겼다. 정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가을의 마지막 날이자 다음날이면 겨울이 시작되는 12월이니 늦가을 정취는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증심사로 올라가는 길 주변과 사찰 일대는 아직도 단풍이 한창이었다. 횡재한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해남 대흥사가 우리나라 가을 단풍의 종착지로 알고 있었는데, 참으로 뜻밖의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앉아 있는 증심사는 순천 송광사의 말사로 1986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860년(신라 헌안왕 4)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하고, 1094년(고려 선종 11)에 혜조국사가 중수했으며, 1443년(조선 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김방이 자신이 받은 녹봉으로 다시 중창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에 석경·수장·도광 등의 3대 선사가 4번째로 중창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해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1970년대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개미의 전설 어린 오백전과 오백나한상

현존하는 당우로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오백전을 비롯하여 대웅전ㆍ지장전ㆍ비로전ㆍ적묵당ㆍ범종각ㆍ일주문ㆍ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443년의 중창 때 김방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오백전과 그 안에 있는 오백나한상에 대해서는 개미의 전설이 얽혀 있다. 광주에서 경양방죽(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인공호수) 공사를 하던 김방은 어느 날 공사 현장에서 커다란 개미집을 발견했다. 불심이 깊은 그는 개미집을 허물지 않고 무등산 기슭으로 옮겨 주었다. 그 무렵 김방의 가장 큰 고충은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양식 창고에 가보니 개미들이 줄지어 쌀을 물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후 개미들의 행렬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김방은 개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증심사에 오백전을 짓고 오백나한상을 봉안했다는 것이다.

오백전 옆에 있는 높이 205㎝의 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은 10세기경의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증심사에는 창건 당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고려 초기의 작품인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칠층석탑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그러나 1933년 오층석탑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던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은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남종화의 대가 허백련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증심사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는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1891∼1977)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의재미술관, 문향정, 춘설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999년 12월 말에 착공하여 2001년 11월 17일 개관한 의재미술관은 약 6,000㎡ 부지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수장고, 세미나실, 다도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군자와 서예 등 허백련의 대표 작품과 미공개작을 비롯해 사진과 편지 등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의재미술관은 풍경 속의 미술관이라는 기본 콘셉트를 바탕으로 하여 무등산의 지형적 요건을 살린 친환경화적 건물로 2001년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의재미술관 건너편의 문향정은 춘설차의 청아한 맛을 음미할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의 전통찻집이다. 증심사 왼쪽 산자락의 차밭에서 허백련이 재배해온 전통 녹차인 춘설차를 마시노라면 그의 숨결이 절로 느껴진다. 약 3만여 평의 이 차밭은 본디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해 가꾸어왔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광복 후에 허백련이 인수했다.

문향정 뒤로 잠시 걸어 오르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5호인 춘설헌(春雪軒)에 다다른다. 문향정에서 춘설헌에 이르는 오솔길도 늦가을 단풍 빛이 퍽 곱다. 진도 출신으로 1938년 광주에 정착한 허백련이 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여 년간 기거하던 두 동의 집을 춘설헌이라고 일컫는다.

앞 건물에는 장마루를 깐 대청과 온돌방, 일본식 다다미방, 부엌이 이어져 있으며, 중심축을 약간 벗어나 다음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2동 모두 벽돌 건물이며 모르타르로 외벽을 마감했다. 허백련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육당 최남선과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등 국내외 명사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 여행 메모

▲ 찾아가는 길=동광주 나들목이나 문흥 나들목에서 호남(25번)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제2순환도로를 달리다가 증심사 이정표를 따라간다.

대중교통은 증심사 입구로 오는 광주 시내버스 이용.

▲ 맛있는 집=증심사 입구의 중앙식당(062-222-1834)은 50년 전통의 닭요리 전문점이다. 메뉴는 철판닭볶음과 영계백숙, 단 두 가지인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철판닭볶음을 주문한다. 이 집의 닭볶음은 국물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부드러운 닭고기와 큼직한 감자, 아삭한 양파 등이 비법의 양념과 어우러져 깊은 맛이 우러난다. 매콤하다기보다는 살짝 칼칼하면서 달달한 맛이다. 남은 양념을 이용한 볶음밥도 일품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