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에서 시작된 향토음식서울 하층민이 주로 운영한 길거리 음식'문화옥' 노포들의 메뉴인 '지라' 나와'마포옥' '한양설농탕' '마포양지설렁탕' 등30년 넘은 노포… '양지설렁탕'은 설렁탕의 진화

마포양지설렁탕
"설렁탕의 역사가 어떤 것일까?"에 대한 대답은 '소 문제'부터 짚어야 한다. 설렁탕은 곰탕과 다르다. 설렁탕은 소의 뼈, 쇠머리, 내장 등 이른바 부산물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반해 곰탕은 '고기를 곤 국물'이다. 고기는 궁궐과 관청, 반가에서 소비한다. 고기를 얻으면 반드시 부산물이 나온다. 설렁탕은 부산물로 만든 것이다.

소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쇠고기 식육을 금했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니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고려 말기에도 '금살도감(禁殺都監)'은 있었다. 똑 같은 이름은 조선초기에도 등장한다. 유교를 바탕으로 세운 나라 조선에도 여전히 금살도감은 존재한다. 하는 일도 동일하다. '가축 도축을 금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살'이 모든 동물의 식육용 도살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죽이지 마라'고 말하는 가축은 다른 동물이 아니라 '소'다.

소 등의 불법 도축은 주로 한양에서 중국을 잇는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중국 사신이 오가는 길이다. 중국 사신이 오면 가장 큰 문제가 소를 도축하는 것이었다. 인조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인 삼전도에서 '오랑캐의 청나라 군사'들에게 굴욕을 당했다. 병자호란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미웠지만 홀대할 수는 없었다. 인조 시절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조와 신하들 사이의 '중국 사신 접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하가 보고한다. "돼지고기를 접대하기로 했으나 양이 부족하여 쇠고기를 얼마간 더 마련했습니다". 인조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중국 사신 접대에 관한 것이니 무작정 "하지 마라"고 할 수도 없다. 인조의 궁색한 발언은 "소는 농사짓는데 필수적인데 함부로 도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조가 궁색한 핑계로 농사 운운한 것이 아니다. 실제 소는 농사의 필수적 도구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겼다.

세종의 사촌형제가 소의 밀도살로 유배를 갔던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도정 이덕생이 소 밀도살로 귀양을 간다. 이덕생은 정종의 아들이니 세종과 사촌형제다. 이덕생의 하인들이 소 밀도살과 더불어 소를 훔친 죄도 저질렀다. 중죄다. 세종이 머뭇거렸으나 신하들은 완강했다. 결국 이덕생은 호남 땅으로 유배를 갔고, 신하들의 이배移配 요구에 더 추운 북쪽으로 향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목숨을 잃었다. 신분 차별이 철저했던 시절에 왕족, 그것도 국왕의 사촌형제가 유배를 갔고 이배 도중 목숨을 잃었다. 소 밀도살은 중한 범죄였다.

소의 부산물이 있어야 가능한 설렁탕은 이 무렵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초기까지도 소의 도축은 주로 이민족이 맡았던 걸로 추정한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소의 도축과 관련하여 주로 달단 족 등 이민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양-중국 국경'을 잇는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 살면서 소의 도축으로 생계를 잇는다. 정부에서 강하게 소의 도축 금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은 슬슬 한양도성으로 스며든다. 공식적으로 소를 도살하는 곳은 궁궐이나 관청, 반가 등이다. 이 주변으로 이들은 이주한다. 정부도 강하게 대처한다. 밀도살이 발각되면 이들은 도성으로부터 90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나곤 했다.

문화옥
소의 부산물을 이용하는 설렁탕은 조선초기에도 있었을 것이다. 쇠고기가 귀하고 당연히 쇠고기 부산물도 귀했던 시절에 뼈, 내장, 피, 소머리 등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냉장 시설이 없었으니 소의 부산물은 주로 탕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궁궐, 관청 등에 쇠고기를 납품한 후의 부산물들은 궁궐과 관청 주변의 도축 현장에서 소모했을 것이다.

기록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가의 음식이 아니라 길거리 음식이다. 소의 부산물을 상민(常民)들이나 하층민이 먹었기 때문이다. 유교사회는 제사나 궁중의 행사, 반가의 음식일 경우에만 기록을 남긴다. 피를 끓이고, 뼈를 고아서 먹는 음식 아닌 음식, 상민과 하층민의 음식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하층민의 음식인 '추두부탕'이 기록된다. 오늘날 추어탕의 전신으로 본다. 음식 레시피가 아니라 '사회 현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나마 저자 오주 이규경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금육의 나라 조선이 무너지고 법적으로 금육정책이 사라지는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설렁탕 집들은 급격히 등장한다. 주막과 더불어 길거리의 '전문 음식점'이 생기는 것도 이 무렵이다. 냉면집 등이 생긴다.

'이문설렁탕'은 1904년 무렵 문을 열었다. 영업신고제도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니 정확치는 않다. 지금의 주인, 주인 집안이 문을 연 것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노포로 인정받고 있다. 소의 부산물로 설렁탕을 끓였다는 것은 이집의 '마나'를 보면 알 수 있다. 마나, 혹은 '만하'는 소의 지라다. 맛이 쓰고 피 비린내, 쇠 냄새가 나기도 한다. 원래 지라의 맛이다.

마포옥
종로통의 '영춘옥'도 노포다. 일제강점기 말기 문을 열었다. 한양 도성 4대문 언저리의 노포들도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다. 청계천 변 '옥천옥'이나 남대문 밖 '잠바위 골'에서 문을 연 후 지금은 중앙일보사 부근으로 이사한 '잼배옥' 등이다.

우설(牛舌), 소 머리고기, 마나 등이 국물 속에 들어있다. 부산물들이다. 국물은 소뼈를 곤 것이다.


한양설농탕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