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마루금에 솟은 두타산(1,357m)이 동해로 내리막을 타다가 북동쪽 3㎞ 남짓한 지점에서 마지막 힘을 내어 솟은 봉우리가 쉰움산이다. 해발 688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정상 주변에 울퉁불퉁한 암반들이 늘비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암반들 사이사이의 웅덩이에는 쉰 개의 크고 작은 천연우물(움)이 패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일이 없다니 더더욱 신비롭다. 그래서 쉰움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자로는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고 표기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쉰움산은 무속의 성지로도 이름나 산자락 곳곳에 치성을 드리는 제단과 돌탑 등이 즐비하며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쉰움산 정상부에서 동쪽 1.2㎞ 지점의 산기슭에 신라 고찰 천은사가 고즈넉하게 안겨 있다. 월정사의 말사인 천은사는 758년(신라 경덕왕 17) 인도에서 온 세 승려인 두타삼선(頭陀三仙)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타삼선은 두타산 언저리에 각기 한 곳씩을 맡아 세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금빛 연꽃을 가지고 온 승려는 남쪽에 영은사를, 검은 연꽃을 가지고 온 승려는 북쪽에 삼화사를, 흰 연꽃을 가지고 온 승려는 동쪽에 백련대를 창건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천은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839년(문성왕 1)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세우고 중창하면서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동안거사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하다

1280년(고려 충렬왕 6)부터 1298년(충렬왕 24)까지 동안거사 이승휴(1244~1330)가 은거하면서 이곳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왕의 실정과 부원(附元) 세력가들의 횡포를 비판한 10개조를 상소하다가 파직된 그는 이곳으로 들어와 용안당을 짓고 인근 삼화사에서 대장경을 빌려 읽는 등,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남긴 저작물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1287년 지은 역사책이자 대서사시인 제왕운기(帝王韻紀)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제왕운기는 상·하 각 1책씩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 하, 은, 주, 진, 한 등을 거쳐 원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역사를 7언시로 담고 있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동국군왕개국연대'에는 지리기, 단군의 전조선, 후조선, 위만, 삼한,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과 후삼국 및 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을 7언시로 담았으며 '본조군왕세계연대'에는 고려 태조로부터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를 5언시로 읊었다.

보물 제418호인 제왕운기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단군신화와 더불어 옥저, 동부여, 예맥을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풀이했으며 발해사 역시 우리 역사로 끌어들인 최초의 기록이다. 아울러 신라의 통일과 달리 고려의 통일이야말로 완전한 통일이므로 단군조선 이래 완벽한 민족국가는 고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이승휴는 자신의 별장인 용안당을 절에 시주하여 간장암(看藏庵)을 세웠는데 이 이름은 대장경을 모두 읽었다는 뜻이다. 천은사 일원의 이승휴 유적지는 사적 421호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동안사(動安祠)가 세워져 있으나 평상시에는 굳게 문이 닫혀 있다.

겨울 나그네에게 진한 감흥을 안기다

1598년(조선 선조 31) 서산대사 휴정은 이 절을 중건하면서 남서쪽 봉우리가 검푸르다고 해서 이름을 흑악사(黑岳寺)로 바꾸었다. 1899년 인근에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릉을 만들면서 이 절을 원당사찰로 삼았으며, 임금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이름을 지금의 천은사(天恩寺)로 바꾸었다. 아울러 목조의 아버지, 즉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소인 준경묘를 보수하면서 천은사를 조포사(造泡寺), 즉 나라의 제사에 쓰이는 두부를 맡아서 만드는 절로 정했다.

그 후 한국전쟁 등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6년 일봉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삼성각, 영월루(보광루), 범종각, 육화료, 설선당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극락보전 안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147호인 이 불상은 15세기 후반~16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천은사 일원은 철따라 다양한 정취를 선사하지만 겨울철 운치가 단연 매혹적이다. 폭설이 자주 내리는 곳이어서 눈부신 설경을 만날 수 있는 까닭이다. 일주문에서 사찰로 들어서는 진입로변의 침엽수림과 보호수로 지정된 300년 가까운 수령의 느티나무 세 그루의 가지들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 전각들의 지붕과 담장을 푹신한 이불인 양 뒤덮은 새하얀 눈, 설원과 어우러진 쉰움산의 의연한 산세 등이 겨울 나그네에게 진한 감흥을 안겨주노니…….

■ 여행 메모

▲찾아가는 길=동해고속도로-동해 나들목-삼척 방면 7번 국도-단봉 삼거리-태백 방면 38번 국도-도경 교차로-미로 방면 강원남부로-사둔 삼거리-내미로 방면 동안로를 거친다.

대중교통은 삼척에서 하루 5회 운행하는 내미로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천은사 입구에서 내린다.

▲맛있는 집=천은사 입구의 천은쉼터(033-573-2244)와 두타순두부(033-572-9484)는 순두부와 모두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아마 조포사로 지정되었던 천은사의 손맛이 이어진 덕분이리라. 뜨거운 순두부에 양념장과 김치를 넣고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한겨울 찬바람에 얼었던 몸이 절로 풀리는 듯하다. 공깃밥에 비지찌개를 덜어 비벼 먹는 맛도 일품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