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 숲이 우거져 운치를 돋우는 무풍한송로.
동양화의 주제로 세한삼우와 사군자가 있다. 세한삼우(歲寒三友)는 엄동설한 추위에도 잘 견디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일컬으며 사군자(四君子)는 그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는 뜻으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가리킨다. 매화는 한겨울 칼바람과 눈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세한삼우의 하나가 되었으며, 우아한 가지에 송이송이 꽃을 피우는 고결한 자태로 사군자의 일원으로 꼽혔다.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인 매화는 나무의 키가 4~5미터에 이르며 청초하면서 고결한 자태, 은은한 향기가 어우러져 기품 있는 선비에 비유되기도 한다. 매화는 꽃빛에 따라 백매, 홍매, 청매 등으로 나뉘며 잎이 여러 겹인 만첩매와 가지가 늘어진 수양매도 있다.

산수유와 더불어 봄을 알리는 전령으로 사랑받는 매화는 광양 섬진마을, 해남 보해매원, 순천 향매실마을, 양산 원동마을을 비롯하여 남해안 부근 곳곳에서 대규모로 군락을 이루며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매실 수확을 주목적으로 일본에서 묘목을 들여온 왜매가 대다수여서 아쉬움을 주며 향기도 그다지 깊지 않다.

이들보다 먼저 꽃을 피우면서 빛깔이 강렬하고 향기도 짙은 토종 매화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봄나들이를 떠나보자. 신라 고찰 통도사가 바로 그곳이다. 수령 360년이 넘은 통도사 홍매화는 2월 초순 무렵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3월 초순부터 중순 사이에 활짝 웃는다.

삼보종찰의 하나인 신라 고찰

통도사 홍매화는 요염할 정도로 빛깔이 곱다.
부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와 더불어,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欄袈裟, 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봉안한 불보종찰(佛寶宗刹) 통도사는 삼보종찰(三寶宗刹)의 하나로 꼽힌다.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가사·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했다. 창건 당시 자장율사는 이곳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을 내쫓고 연못을 메운 뒤 금강계단을 세웠는데 한 마리의 용만 머물게 하여 절을 수호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 때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보물 1471호) 및 배례석, 봉발탑(보물 471호), 국장생석표(보물 74호) 등이 세워졌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03년(선조 36) 송운대사가 재건하고 1641년(인조 19) 우운대사가 중건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되찾았다.

영축산문을 들어서면 맑은 계곡 옆으로 무풍한송길(舞風寒松路)이 이어진다. '춤추는 바람에 따라 차가운 기운의 노송이 물결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명품 솔밭길이다. 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1㎞ 남짓한 이 오솔길은 쭉쭉 뻗은 노송들이 빽빽하게 우거져서 정취를 돋우며 흡사 구도자의 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국내에서 가장 운치 넘치는 사찰 진입로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360여 년 전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심어

백매와 홍매화가 어우러졌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불이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통도사는 동서축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건물이 배열되어 있는 가람배치가 독특하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 등의 상로전(上爐殿), 대광명전·용화전·관음전·장경각·황화각·화엄전 등의 중로전(中爐殿), 영산전·극락전·약사전·만세루·영각 등의 하로전(下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金剛戒壇)은 1997년 1월 1일 국보 29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인 대웅전 뒤쪽의 금강계단 사리탑 속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이에 따라 대웅전 안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다. 1645년(인조 23) 중건된 대웅전은 건물 4면의 편액이 각기 다르다.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다.

통도사에는 백매와 청매화도 있지만 홍매화가 가장 유명하다. 영각 앞과 극락전 옆에 두 그루의 홍매화가 자라고 있을 뿐이지만 고혹적인 자태와 강렬한 붉은 빛깔, 그윽하면서 짙은 향기로 봄노래를 부르며 전국 각지의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 영각 앞 홍매화는 여느 홍매화와 달리 연분홍이 아니라 진분홍빛으로 반짝여 한결 화사하다. 통도사를 세운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1650년 무렵 이곳 승려들이 심었다고 해서 자장매라고도 일컫는다. 360살이 넘은 고목인데도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바람결에 진한 향기를 사방으로 뿜어낸다. 그 옆으로는 홍매화에게만 쏠리는 눈길이 서운한 듯 산수유가 샛노란 꽃잎을 하늘거리고…….

■ 여행 메모

영각 앞 홍매화는 자장매라고도 일컫는다.
▲찾아가는 길=통도사 나들목이나 통도사 하이패스 전용 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벗어난다.

대중교통은 부산과 울산에서 통도사터미널로 가는 버스 이용.

▲맛있는 집=통도사 입구에는 산채전문점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경기식당(055-382-7772)이 유명하다. 각종 산나물 무침, 버섯볶음, 도라지볶음, 마늘종고추장무침, 파전 등 15가지쯤의 반찬에 구수한 된장국이 따르는 산채정식이 맛깔스럽다. 더덕정식에는 여기에 더덕구이가 추가된다. 6~7가지 산나물과 달걀프라이를 넣은 산채비빔밥도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은 듯 깔끔한 맛이다.


영각 옆으로 샛노란 산수유가 피었다.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통도사 계곡.
보물 1471호로 고려 초기 작품인 통도사 삼층석탑.
통도사 일주문의 편액은 대원군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일주문의편액은대원군의필체로알려져있다. 보물 1711호로 지정된 통도사 영산전 벽화.
60여 기의 부도와 50여 기의 비석이 배치된 통도사 부도전.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인 통도사 대웅전.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