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된 서울식 추탕…‘전통’ 그대로

홍기녀씨 ‘용금옥’세우고 운영, ‘영원한 주인’

현재 신동민 대표 ‘또 다른 주인’ 손님 뜻 존중

‘용금옥’ 고유 서울식 추탕, 공간 그대로 유지

‘용금옥’의 3대 사장 신동민씨. 그는 늘 “용금옥에는 사장이 ‘세 사람’ 있다”고 믿는다.

‘용금옥의 첫째 사장’은 돌아가신 할머니 홍기녀씨다. ‘용금옥’을 세우고 운영하신 분이다. ‘용금옥’ 주인은 할아버지 신석숭씨지만 ‘용금옥’ 손님들을 누구나 할머니 홍기녀씨를 ‘용금옥 주인’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많은 추억들도 할머니와 얽혀 있다. 신 대표가 어린 시절. 할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십여 명에 달하는 손자, 손녀들을 불러 모았다. 할머니 손에는 ‘1천원 신권’이 한 다발 들려 있었다. 할머니는 매주 토요일 손자들에게 용돈을 나눠주었다. 신 대표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활 쏘러 다니고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였던 분이다. 할머니는 통 크고 손도 큰 여장부였다.

서울신문 기자이자 ‘용금옥’의 영원한 단골이었던 이용상씨가 기록한 ‘용금옥 시대’에는 당대 문인, 정치가, 경제인들의 이름이 빼곡히 등장한다.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모두 ‘용금옥’ 단골들이었고 ‘용금옥’은 그들의 사랑방이었다. 1932년에 문을 열었으니 한국현대사의 고비를 모두 겪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신흥지역이었던 청계천 바깥(지금의 코오롱빌딩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1960년대 초반 지금의 자리로 이사했다. 행정구역은 ‘다동’이지만 손님들은 여전히 ‘무교동 용금옥’이다.

남북정상회담 차 한국에 왔던 북한 부주석 박성철과 휴전회담 당시 김일성의 통역이었던 전 고려대 교수 김동석이 ‘용금옥’과 홍기녀씨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 남았다. 유석 조병옥 박사가 수술 차 미국으로 가기 전 이 집에서 추탕을 두 그릇 먹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할머니 홍기녀씨의 이름이 떠돈다.

신동민 대표는 2011년 가게를 물려받았다. 할머니를 도와 ‘용금옥’에서 일했던 막내 숙모는 지금 통인동에 ‘용금옥 작은 집’을 운영하고 있다. 신 대표는 아직도 자신이 ‘용금옥’을 맡아, 주방에서 음식을 내던 첫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할머니를 도와서 주방 일을 했던 ‘큰엄마’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할머니 손맛을 그대로 유지한 분이었죠. 할머니로부터, ‘큰엄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음식을 먹어봤고 또 조리법도 듣고 거기에 나름대로 제가 생각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내놓는데, 막상 그날 손님들이 드시지 않거나 혹은 ‘음식이 달라졌다’고 할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용금옥’을 맡고 나서 체중이 8Kg 빠졌다.

“할머니가 만드신 음식이고 가게입니다. 할머니가 영원한 주인입니다. 손님들도 또 다른 주인이지요.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저보다 ‘용금옥’에 더 깊은 애정을 가진 분들도 계시고요. 외국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돌아오면 먼저 ‘용금옥’을 찾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에게는 ‘용금옥’이 곧 고향입니다. 혹시 ‘용금옥’이 달라졌다, ‘용금옥’ 맛이 예전 그 맛이 아니다, 라고 할까봐 늘 걱정됩니다.”

메뉴도, 음식 맛도 달라졌다. 청계천에도 흔하던 미꾸라지는 이제 사라졌다. 서울서 자연산 미꾸라지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한때는 “서울 추탕은 미꾸리로 만들고 지방의 추어탕은 미꾸라지로 만든다”고 했지만 역시 무망한 일이다. “서울 추탕은 ‘통추’로, 지방 추어탕은 ‘갈추’로 낸다”는 말도 먼 이야기다.

수육도 내고 남은 고기들을 잘게 썰어서 추탕에 넣던 시절도 있었다. 손님들이 “추어탕에 왜 고기가 들어가느냐?”고 해서 고기는 넣지 않는다. 이제 서울식 추탕과 지방의 추어탕을 구분하는 것은 붉은 색의 매운 맛 정도다.

“할머니의 음식 뼈대와 그 마음만은 잊지 않습니다. 주인이라 하더라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용금옥’입니다. 가게를 넓히거나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손님들이 원하지 않으니까요.”

‘잘 나가는 유명 노포’의 주인이지만 ‘돈 이야기’를 하면 어색하게 웃는다. 유명인사부터 오래간만에 자식들의 손을 잡고 오시는 ‘일요일의 손님’들까지 모두 주인이다. 음식 값 올리는 것도 부담스럽다. 늘 “손자가 운영하더니 ‘용금옥’ 망가뜨렸다는 말을 듣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23평, 86년의 역사. 좁은 마당에 차곡차곡 우리 삶이 덧쌓여 간다. 번듯한 집은 아닐지라도 이런 공간 하나 정도 가지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서울식 추탕 노포 3곳: ‘형제추어탕’ ‘용금옥’ ‘곰보추탕’

일제강점기 ‘형제추어탕’ ‘용금옥’ ‘곰보추탕’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희망의집’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곰보추탕’의 창업주는 정부봉씨다. 며느리 조명숙씨가 물려받아 ‘서울식 추탕’에 가장 가까운 맛을 유지하고 있다. ‘형제추어탕’은 잠깐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장소는 바뀌었다. 상명대학교 부근이다. 서울추탕은 남부지역의 추어탕과는 다른 매운맛이 특징이다. 육수도 양파 등 채소와 내장 등 고기를 사용한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 ‘용금옥’은 23평 좁은 가게다. 그러나 옮기지도 넓히지 않는다. 손님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9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용금옥’의 신동민 대표

- ‘용금옥’의 서울식 추탕 색깔은 붉고 맵다. 통미꾸라지가 보인다.

- 평창동 ‘형제추어탕’

- ‘곰보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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