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은 마음으로 만드는 음식”… 일본도 드문 가라스미 등 직접 만들어

당대의 박갑용 조리사 스승으로 모셔…비지로 김밥 만들며 ‘공기초밥’ 익혀

스승 통해 터득한 김성태 셰프 초밥 일류호텔 일본인 조리사들도 인정

처음 연 초밥집 ‘이화(二和)’ “일본 현지 초밥 못지않은 곳” 소문나며 번창

국내 거주 일본인, 일본관광객 줄이어… 현 ‘스시하코’ 로 명성 이어가

가라스미, 니싱소바용 청어 등 직접 만들고 손질…최고 식재료로 음식 대접

“초밥의 기본은 손님에 대한 배려”…후배 양성 바라며 ‘기본’ 강조

비지로 만드는 김밥?

한 달이 지났다.

두부를 만들고 나면 비지가 남는다. ‘김’에 비지를 넣었다. 마치 밥 같이. 고르게 자른 신문지는 김이다. 나무젓가락이 김밥 속의 고명을 대신했다.

어느 날, ‘스승님’이 “두부 배달 오면 비지 한 ‘바케스’만 받아두어라”고 했다. 어려운 시절이니 “저걸로 비지찌개 끓이려는가?”했다. 스승은 비지로 김밥을 말아보라고 했다. 신문지, 비지, 나무젓가락으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비지는 푸슬푸슬하다. 밥과 같은 접착력은 없다. 쉽게 말리지 않는다. 일주일 정도 비지 김밥을 말고 나니 온몸에서 비지 냄새가 났다. 한 달 동안 비지 김밥을 말았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스승 앞에 내놓았다. 스승은 “아직 멀었다”고 했다. 1백 개를 말아보라고 했다. 과연. 말아놓고 보니, 굵기와 길이가 모두 들쭉날쭉 이었다. 속도도 문제였다. 식당에서 손님 앞에 내놓을 음식이다. 가능한 빨리, 완벽해야 할 터이다. 다시 비지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결국 그분한테 ‘공기초밥’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다 배우진 못했지요. 그분이 불과 네 달 후인가 돌아가셨으니까. 초밥의 기본 원리는 배운 셈이지요.”

1960년대 후반이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청년 김성태’는 박갑용 조리사가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도 몰랐다. 나중에야 1940년대 일본의 초밥대회에서 1등을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을지로 3가의 ‘일중’이라는, 이제는 없어진 초밥 집에서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소개해준 이가 “굉장히 유명하고 초밥의 전설 같은 분이니 잘 배우라”고 했지만 흘려들었다.

당시 박갑용씨는 집이 김포였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니 출퇴근하는 일은 힘들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가고 나머지는 가게에서 젊은 직원들과 더불어 지냈다. 빨래도 해드리고 담배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나름 정성을 기울이면서 모셨지만 ‘초밥 쥐는 법’을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초밥 쥐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지라시 초밥’이라는 이름도 아는 이가 드문 시절이었다.

운명은 때로 엉성한 기회를 통해 다가온다. 스승은 나이가 드셨으니 제자를 두고 싶었을 터이다. 자신의 기술을 누구 하나쯤은 전수받았으면 했을 것이다. 마침 사근사근하고 똑똑한 젊은 아이가 있으니 ‘저 녀석에게 가르쳐볼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쯤은 스승의 눈에 찼으니 ‘다시 해보라’고 했을 것이다. 불행한 것은 그 귀한 만남이 짧았다는 점. 그래도 그 귀한 ‘만남’은 깊고 무거웠다. 김성태 셰프는 그 후 50년 동안 한순간도 스승 박갑용 조리사와 그의 공기초밥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일중’을 그만두고 나서 오래지 않아 박갑용 스승의 초밥 내공을 확인할 기회가 다가왔다. 다음 직장으로 프라자호텔 일식부에 취직했을 때 일본인 조리사를 통해서 박갑용 조리사의 솜씨를 알게 되었다.

“초밥을 만질 줄 아는 한국인 조리사가 드물던 시절이니 일본에서 조리사를 초청했습니다. 사이토라는 분이 있었고…. 일본에서도 대단한 조리사라고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초밥을 쥐는데 박갑용 선생님이 쥐는 것 하고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공기초밥이었지요. 그걸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확 솟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 박갑용 선생님이 진짜 대단한 분이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일본인 조리사들도 김성태 세프가 빚어내는 초밥에 대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한국에서 이런 초밥을 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프라자호텔은 젊은 초밥 조리사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6개월의 일본 현지연수 기회가 주어졌다.

“일본에서 여러 생선을 보면서 공부를 했지만 어차피 한국에는 없는 생선들이 많았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은 배웠지만 오히려 ‘선생님’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이 어린 ‘형님’이자 선생님

먹고 살기 힘들어서 고향 대전을 떠났다. 열여덟 살의 나이, 중학교 졸업이었다. 대전에서도 어려웠지만 서울은 더 냉혹했다.

“서울 올라와서 공장에도 가봤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고단해서 곧 그만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고요. 그때 누나 집에서 더부살이로 있었는데 사지 멀쩡한 녀석이 밥만 축내고 있으니 죽을 지경이더라고요.”

마침 누나네 집이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부근이었고 인근에 인력시장이 열렸다. 우연히 음식점을 소개받고 여기저기 음식점을 다니기 시작했다. 힘들어도 식당 일은 왠지 하고 싶었다. 인력시장을 통해 해장국 집과 중국집을 떠돌았다. 고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알바’ 같이 며칠 혹은 일주일, 한 달씩 일을 하는 식이었다.

이문동 해장국 집을 거쳐 삼선교 부근의 일식집으로 갔다. 이미 나이 어린 선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취직(?)을 했다.

“나이 어린 선배가 ‘선생’이었던 셈입니다. 그이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일하는 조건은 좋지 않았습니다. 식당 내의 테이블을 붙여놓고 잤는데 전철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한 달 정도 지나니 전철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잠이 오더라고요.”

나이 어린 선배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형님’은 이것저것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제가 볶음밥을 잘 만듭니다. 일식조리사지만 볶음밥은 웬만한 중식요리사들 만큼 하지요. 그때 그 ‘형님’한테 처음 배운 것이 프라이팬으로 종업원들이 먹는 식사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50여 년 전에 배운 원조 볶음밥 기술이지요.(웃음)”

어려운 시절, 누구나 하는 고생도 퍽 많이 했다. 겨우 볶음밥 만드는 기술을 익히고 다시 취직했던 곳이 명동 사보이호텔 부근의 일식집. 월급도 받는 걸로 근무조건을 정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주방에 난생 처음 보는 활어가 등장했다. 내륙지방 출신이다. 생선을 봤을 리가 없다. 생선 이름도 모르는 판이니 조리법을 알 리가 없다. 결국 쫓겨났다.

스승 박갑용씨를 만난 것은 이런 과정을 다 거친 다음이었다.

“박갑용 선생이 제 스승이지만, 그 이전에 볶음밥을 가르쳐 준 ‘형님’도 사실은 큰 선생이었지요. 프라이팬 쥐는 것부터 일식이든 경양식이든 그이가 하는 걸 보고 어깨 너머로 배웠으니까요.”

우리나라에는 왜 초밥전문점이 없을까?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북창동에 초밥전문점 ‘이화(二和)’를 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초밥전문점이었다. 18평 반지하였다.

“호텔에도 초밥 전문 식당은 드물었습니다. 연수를 하면서 보니까 일본에는 초밥전문점이 있더라고요. 운영도 잘 되고. 우리는 왜 초밥전문점이 없을까? 내가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지요.”

‘이화’도 처음에는 힘들었다. 우리나라 사람 중 초밥을 찾는 이는 드물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생새우초밥(아마에비), 고등어초밥, 아구간, 닭가슴살 등을 사용하니 손님들 중에도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어리초밥을 내놓았더니 “싸구려 생선, 비린내가 나는 생선을 사용한다”고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어리를 뒤집어 흰 부분을 보이게 초밥을 말았다. 다 먹고 나서 손님이 “이거 맛있는데 뭐냐?”고 물으면 그때서야 정어리라고 말했다.

초밥은 일본인들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홍보를 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광고할 돈도 없었다. 엽서는 비교적 쌌다. 엽서를 일일이 써서 일본인들이 많은 동부이촌동, 한남동, 이태원 일대에 보냈다. 신기하게 반응이 있었다. 초밥을 열심히 배달했다. 갈 때는 택시를 타고, 올 때는 버스로. 그렇게 한동안 초밥 배달을 다녔다.

여자들이 ‘이화’의 초밥을 먹고 곧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일본 현지 초밥 못지않은 초밥을 내놓는 곳이 있다”. 오래지 않아 서울 주재 일본회사의 일본인들이 가게를 찾았다. 일본학교의 행사에 600 명분의 초밥을 배달하는 일도 있었다. 마침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이 줄을 이었다. 일본관광객들이 초밥을 찾았다. 일본잡지에 ‘일본 현지 못지않은 곳’이라고 소개되었다.

김성태 셰프의 초밥은 입에 넣으면 스르르 풀어진다. 잘 손질한 생선의 눅진한 맛과 더불어 밥알이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갈라보면 속에는 일정하게 빈 부분이 있다. 공기주머니가 있다고 ‘공기초밥’이라고 부른다. 겉모양은 다른 초밥과 비슷하지만 그의 초밥을 맛본 이들은 대를 이어서 그의 초밥을 찾는다.

“제일 기쁜 순간은 3대가 손잡고 저의 가게를 찾을 때입니다. 할아버지가 제 단골이었는데 아들, 이제는 손자까지 데리고 오지요. 가장 기쁜 순간입니다.”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을 고집하고 있다. 가라스미(唐墨, 건조 숭어알)를 직접 손질해 발효. 숙성시키는 경우는 일본에도 드물다. 대부분 일본, 대만의 공장제조품을 사용한다. 국내 고급 집들도 마찬가지. 김성태 셰프는 여전히 직접 가라스미를 만들고 니싱소바에 사용하는 청어도 직접 손질하여 사용한다.

“박갑용 선생님과 달리 저는 후배를 몇 명 정도는 가르치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그저 모양초밥만 배우려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일본이나 한국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초밥의 기본은 손님에 대한 배려입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손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초밥의 시작입니다. 초밥은 마음으로 만드는 음식입니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스시하코’ 김성태 셰프

- 스시하코의 초밥들

- 스시하코의 오마카세를 주문했을 때 나오는 사시미

- 술안주로 내놓는 가라스미. 주방에서 직접 손질한 숭어알로 만든수제 가라스미

방배동 일식 맛집들

‘스시하코’ 부근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는 일식집들이 더러 있다.

‘스시하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바루’는 소바전문점이다. 국물에 면을 찍어먹는 ‘자루소바’가 아주 좋다. 가게 바로 옆에 제분, 제면실이 따로 있다. 면이 부슬부슬하다. 일식 우동도 가능하다.

일본식은 아니지만 한국식 메밀국수집 ‘양양메밀국수’도 권할 만하다. 일본 소바가 칼이나 작은 작두로 자르는 면이라면 한국 메밀국수는 압착식이다. 좁은 구멍을 통하여 면발을 눌러서 만든다.

‘댓짱돈카스’는 일본식으로 ‘잘라서 내는’ 돈카스 전문점이다. 오래 전부터 서초구 일대에서 수준급의 돈카스 전문점으로 자리잡았다. 우동 등을 더한 세트 메뉴도 있다.

서울교대 부근의 ‘미나미’는 ‘청어소바(니싱난방)’로 널리 알려진 집이다. 면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기울인다.

*사진 캡션

-‘스바로’ 소바

-‘양양메밀국수’

-‘댓짱돈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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