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과 속리산 사이의 백두대간 마루금에 솟은 해발 998미터의 명산 희양산(曦陽山). 옛 사람들은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인 희양산을 우러러 보며 갑옷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형상이라고 칭송했다. 당당하고 우람한 암봉이 기세등등한 희양산 남쪽 자락에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 지선이 창건한 천년고찰 봉암사가 안겨 있다.

지증대사는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은 듯하고,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 같다”고 경탄하면서 “하늘이 준 땅이니 승려들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면 도적떼 소굴이 될 것이다” 하며 절을 세웠다. 그리하여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이 개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후삼국시대의 전란으로 극락전을 제외하고 폐허로 변하자 고려 태조 18년(935) 정진대사가 중창했으며 조선 세종 13년(1431)에는 함허당 기화가 중수하고 머무르면서 <원각경소>와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저술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극락전과 일주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지만 예전의 영화를 되찾지는 못했다.

절경의 봉암용곡이 천년고찰 정취 돋우고

유서 깊은 고찰인 만큼 봉암사에는 문화재가 즐비하다. 국보 315호인 지증대사적조탑비는 경애왕 원년(924) 세워졌으며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혜강이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보물 1574호인 극락전은 목탑 양식이 특징으로 외관상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층 건물이다. 신라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을 피해 숨어들어 원당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불타는 장작을 극락전 지붕 위로 던졌으나 장작개비만 타고 건물에는 불길이 옮겨 붙지 않자 물러났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외에 높이 6.31미터의 9세기 작품인 삼층석탑, 팔각원당형 부도인 지증대사적조탑, 정진대사원오탑, 정진대사원오탑비 등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봉암사 일원에는 절경의 계곡이 굽이쳐서 산사의 정취를 한결 돋운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鳳岩)에 용 같은 계곡(龍谷)이 흐른다 해서 봉암용곡이라고 일컫는 이 깊은 골짜기에는 물속의 바위가 희고 맑아 밤에도 놀 수 있다는 야유암, 불상이 조각된 너른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옥석대, 최치원이 낚시를 즐기고 친필을 새겼다는 취적대 등의 비경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천년고찰 일원의 비경을 쉽사리 만날 수는 없다. 1982년 6월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면서 봉암사는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1년에 단 하루 석가탄신일(올해는 양력 5월 14일)에만 굳게 닫힌 산문의 빗장을 여는 것이다. 이날을 놓친다면 다시 이듬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최치원이 풍류 즐긴 문경선유동

봉암사를 둘러본 다음 인근 문경선유동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괴산선유동과 구별하기 위해 문경선유동이라고 일컫는 계곡으로 편안히 쉬면서 자연미 넘치는 경관을 감상하기에 알맞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괴산선유동을 외선유동, 문경선유동을 내선유동으로 표기했다.

퇴계 이황은 괴산선유동에 머무르며 9곡의 이름을 지었고, 고운 최치원은 문경선유동에서 풍류를 즐기며 아홉 절경을 꼽아 선유구곡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문경8경의 하나인 문경선유동은 칼로 두부를 자른 듯한 바위와 온갖 형태의 기암괴석, 아름드리 노송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비경을 펼친다. 하류부터 상류 쪽으로 길이 1.8㎞의 계곡을 따라 제1곡~제9곡이 차례로 이어진다.

선유구곡의 1곡은 옥 같은 안개가 드리운다는 옥하대, 2곡은 뗏목 모양의 바위인 영사석, 3곡은 활기차게 흐르는 맑은 웅덩이인 활청담, 4곡은 어지러운 마음을 씻어낸다는 세심대, 5곡은 여울목을 본다는 관란담, 6곡은 심신을 맑게 씻는다는 탁청대다.

7곡~9곡은 서로 이웃해 있는데다 자동차로 다가가기 쉬워 찾는 이들이 많다.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뜻의 제7곡 영귀암과 제8곡 난생뢰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낸다. 난생(鸞笙)은 선계에서 연주되는 대나무 악기로 만물이 소생하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제9곡 옥석대는 선인들이 이곳에서 도를 깨우쳤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유구곡의 하류에는 칠우정, 상류에는 학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1927년 건립된 칠우정(七愚亭)은 우은(愚隱), 우석(愚石) 등 우자 호를 가진 일곱 사람이 세운 정자이며, 학천정(鶴泉亭)은 숙종부터 영조까지의 학자인 도암 이재(1680~1746)를 기리기 위해 1906년 후학들이 세운 정자다. 학천정 일원에서는 MBC 드라마 <김수로>를 촬영하기도 했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 찾아가는 길=문경새재 나들목에서 중부내륙(45번)고속도로를 벗어난 다음, 점촌 방면 3번 국도-소야 3거리-901번 지방도-가은-922번 지방도-상괴리를 거친다. 봉암사 입구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에 마련된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를 타거나 1시간가량 걷는다. 문경시 점촌에서 봉암사 방면 시내버스 운행.

▲ 맛있는 집=문경시 호계면에 있는 문경약돌돼지한마리(054-553-7339)는 약돌돼지구이로 유명하다. 문경 특산물인 약돌돼지는 게르마늄, 셀레늄, 세륨, 홀뮴 등의 특수성분을 함유한 거정석(페그마타이트)의 가루를 사료에 섞어 기른 돼지를 말한다. 약돌돼지는 필수 아미노산과 불포화지방산이 많고 육질이 쫄깃하며 누린내가 나지 않아 산뜻한 맛이 일품이다. 삼겹살, 목살, 갈비, 항정살, 가브리살, 갈매기살 등을 고루 맛볼 수 있는 돼지한마리구이가 인기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