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에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25분 남짓 걸었을까? 넓은 길이 끝나고 공터에 이르자 좁다란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책하기 딱 좋은 길이다. 오솔길 따라 쭉쭉 뻗은 아름드리 노송 숲이 펼쳐지다가 빨간 동백꽃이 수줍은 듯 미소 짓는가 하면, 짙푸른 바다와 산자락이 숨바꼭질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15분 남짓, 낭만 가득한 이 길이 더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하얀 등대가 동화 속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 전 추억일 뿐이다. 예전의 공터에는 팔각정 쉼터가 세워졌고 등대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딱딱한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그 대신 팔각정 오른쪽으로 공치산 능선과 해안 데크 산책로를 거쳐 마을로 이어지는 새 도보길이 드리워 아쉬움을 달랜다. 팔각정에 오르면 바다 건너 저 멀리로 충남 보령시에 속하는 외연도가 아스라이 굽어보인다.

1912년 3월 1일 세워진 어청도 등대는 중국 쪽 서해 바다를 지켜보면서 22해리(약 40.7㎞)까지 불을 밝힌다. 우리나라 섬에 있는 등대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예쁘고 아름답다. 등대 안에 우뚝 서 있던 노송 한 그루가 이곳의 긴 역사를 말없이 증명했으나 솔껍질깍지벌레의 피해로 몇 해 전 고사해 안타깝다.

등대 아래 암벽 위에는 구유정(鳩遊亭)이라는 정자가 새로 세워졌다. 등대지기 말로는 ‘갈매기가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왜 갈매기 구(鷗)가 아니라 비둘기 구(鳩)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지 의아스럽다. 여하튼 등대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낙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쉴 새 없이 파도가 철썩철썩 때린다. 바다로 고개를 내민 암벽에는 흡사 공룡의 등뼈처럼 얼기설기 줄이 그어져 있다. 그 천 길 낭떠러지 아래 좁은 틈새로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 그렇다. 영화 ‘빠삐용’에서 마지막 해상 탈출 장면이 바로 저랬다. 강한 북서계절풍의 침식으로 발달한 해식애라는 학술적 해석보다는, 조물주가 빚은 대자연의 걸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절경이요, 감동적인 서사시다.

어청도는 군산항에서 72㎞나 되는 긴 항해 끝에 만나는 외딴섬이다. 전라북도에서 가장 먼 까마득한 해상에 외롭게 떠 있는 절해고도로 2시간 반이나 거친 파도를 헤쳐야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처럼 늘 푸른 섬인 어청도(於靑島)는 섬 전체에 송림이 빽빽했지만 이제는 상당수의 소나무가 말라죽었다. 그나마 소나무재선충이 아니라 솔껍질깍지벌레로 인한 피해로 추정되어 불행 중 다행이란다.

넓이 1.8㎢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해안선 길이가 11㎞나 된다.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선을 빌려 타고(유람선은 없다) 섬을 한 바퀴 돌면 빼어난 아름다움에 흠씬 젓게 된다. 바다 위로 솟은 낭떠러지와 온갖 기암괴석, 해안을 맴도는 갈매기가 손잡고 낙도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은은히 풍긴다.

천연항구를 이루는 ㄷ자 모양 물굽이

이 섬에는 논밭이 별로 없고 몇몇 채소를 가꾸는 텃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의식주를 위한 생필품은 모두 뭍으로부터 사들인다. 그러나 식수가 풍부한 데다 웬만한 편의시설과 주요기관은 거의 다 있어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다. 400여 주민이 사는 마을은 ㄷ자 모양으로 휘어 들어간 물굽이(만)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1970년대만 해도 1천여 주민이 살았지만 여느 섬이나 매한가지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어청도는 서해 중부 굴지의 어업 전진기지로 소중하다. 남북 길이 1㎞, 동서 너비 500미터에 이르는 ㄷ자 모양 물굽이는 보기 드문 천연항구 구실을 한다. 병풍 같은 절벽이 바람을 막아주어 물굽이 안 물결은 언제나 잔잔하다. 그래서 태풍이나 폭풍이 몰아치면 인근 해상을 항해하던 배들이 이곳으로 긴급 대피한다. 이 섬이 아니었으면 수많은 배들이 조난사고 위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으리라. 망망대해에 천연항구를 품은 외딴섬을 빚은 것은 실로 오묘한 조물주의 섭리 아닐까.

어청도에는 여전히 수많은 어선들이 들락거린다. 한때는 주민과 외지 어부를 합쳐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어청도 일원 바다에는 우럭, 노래미, 도미, 농어, 숭어, 붕장어 따위가 많고 그 귀한 대구도 심심찮게 나온다고 한다. 섬 동쪽 비암목, 서쪽 불탄개, 남쪽 신목녀 해안 등은 바다낚시 명소로 강태공들의 사랑을 받는다.

어청도에도 외연도처럼 전횡 장군 전설이 전해진다. 기원전 200년 무렵 제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제나라 전횡 장군이 500여 군사와 함께 이 섬으로 망명 왔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청도에는 전횡 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인 치동묘가 남아 있다. 그는 과연 외연도로 왔던 걸까, 어청도로 왔던 걸까, 아니면 두 섬을 모두 망명지로 삼았던 걸까? 수수께끼 같은 전설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찾아가는 길=군산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어청도로 가는 여객선이 평일 1회(오전 9시경),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2회(오전 7시 30분과 오후 1시 30분) 운항하며 2시간 30분쯤 걸린다. 물때에 따라 출항 시간이 변경될 수도 있으므로 떠나기 전에 문의한다. 063-471-8772, 1666-0940.

▲맛있는 집=어청도에는 양식 물고기가 전혀 없으므로 자연산 생선회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해풍에 살짝 말린 우럭을 이용한 칼칼한 우럭찜도 어청도의 별미로 꼽힌다. 매운탕, 회덮밥, 물회, 다양한 해산물이 따르는 백반 등도 입맛을 돋운다. 여러 집 가운데 아름식당(063-465-2633), 동성식당(063-463-0797), 군산식당(063-466-1845) 등의 평판이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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