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깊은 한옥에서 빚은 궁중한식의 깊은 맛… 품격있는 ‘변신’ 더해

100년 넘은 대원군의 ‘석파정’ 한식전문점 ‘석파랑’으로 단장

음식 통해 품격있는 한국문화 알려… 겉으로 뽐내기보다 깊은 맛을 내

김주원 대표와 아들 딸 2대(代)가 시류 편승 않고 올곧은 길 걸어

美 CIA 나온 딸 ‘석파랑 2.0’인이태리 식당 ‘스톤 힐’ 열어 새로운 길 더해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지나온 세월이 길다. 이야기도 많이 묻혀 있다. 켜켜이 쌓아놓은 시루떡 같다. 한 겹을 벗겨내면 또 다른 한 겹이 나타난다. 한 겹, 한 겹 숱한 사연들이 숨어 있다. 조선 말기의 이야기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가까운 1990년대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 한식전문점 ‘석파랑(石坡廊)’ 이야기다.

‘석파랑’ 100년을 넘긴 세월

‘석파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의 일부를 옮겨온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긴 이야기는 줄이자. ‘석파랑’에는 모두 두 개의 ‘의미 있는 건물’이 있었다. ‘별채’는 석파정의 일부분이었다. 당시의 유행을 반영한 청나라 풍.

‘본채’ 건물은 옥인동에 있던 ‘순정효황후’ 윤 씨의 생가를 옮긴 것이다. 기와 선이 아름다운 한옥이다. 윤 씨는 순종의 계비다. 흥선대원군과 윤 씨는 시할아버지와 손녀 며느리 사이. 시대를 넘는 두 사람과 연관 있는 건물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조선 말기 중신 김흥근(1796∼1870년) 사이의 ‘석파정’을 둘러싼 야사의 이야기도 간단하게 기술할 필요는 있다. 김흥근. 안동 김 문 출신의 세도가로, 영의정까지 지낸 조선 말기 조정 중신이었다. 안동 김 문의 반대를 뚫고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고종으로 등극시켰다. 편안한 관계는 아니었겠지만 김흥근은 고종 치세 초기까지 고위직 중신으로 살아남았다. 야사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김흥근 소유의 별장을 ‘억지로’ 취한 것이다.

두 건물을 같은 공간에 모은 이는 소전 손재형(1903∼1981년)이다. 소전은 예총회장, 국회의원을 거쳤던 서예가. 소전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져오기도 하는 등, 우리 문화재 보존에 대한 업적이 있다. 지금의 ‘석파랑’ 경영진은 1989년 소전의 후손들로부터 ‘석파랑의 한옥과 부지’를 매입했다.

김주원 대표, ‘낡은 한옥’을 만나다

김주원 대표, ‘석파랑’의 주인이다. 1947년 생, 올해 일흔이다. 부모님 고향은 황해도 연백. 김 대표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다. 한국전쟁 전, 그가 네 살 때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쭉 서울서 살았으니 김 대표는 서울토박이나 다름없다. 전쟁 때 부산까지 피난을 갔고, 1950, 60년대의 누구나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서울에서 겪었다.

김 대표는 음식점, 외식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0년대까지는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석파랑 건물, 부지를 사들인 후에도 오랫동안 고민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다른 일’을 했다. 김주원 대표 삶의 ‘제1부’다.

“1972년 동업자와 같이 문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를 넘기면서 문구사업이 사양사업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 회사가 많이 생긴 것도 있지만, 컴퓨터가 우리 생활에 들어오면서 문구 사용량이 줄어들기 시작했지요.”

문구업의 주력은 종이와 필기도구다. 그 사용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니 전체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김 대표가 운영하던 회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바른손문구’다.

1980년대 후반, 김 대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문구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북한산 언저리로 등산을 할 때 지나다니던 길, 그 길 한 쪽에 낡은 한옥이 몇 채 보였다. 외식업을 할 생각이 없었으니 ‘식당 자리’로 생각하고 눈여겨 본 것은 아니었다. 문구사업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업에는 ‘창고자리’가 필요하다. 외진 곳, 땅값이 싸면서 시내 중심지 혹은 본사, 공장과 교통이 편리한 곳이면 좋다. 한식전문점 ‘석파랑’ 자리는 원래 ‘창고를 지을 곳’으로 점찍었던 곳이다.

“상당히 힘든 경로로 지금 ‘석파랑’ 자리를 구했습니다. 문화재 관리를 받아야 하는 곳이니 신축, 개축, 증축 모두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처음엔 ‘문화재 건물에 식당 한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관청에 들어가면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고 정작 건물을 증, 개축하려면 아무런 보조도 없고….”

짊어져야 할 짐은 무겁고 도와주는 이는 없는 상황이었다. 심하게 낡은 건물과 땅은 구했는데 막상 무엇을 할는지 막막했다. 공장으로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다 낡은 건물이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이다. ‘우리 전통 한옥에 맞는 아이템이 없을까?’라고 고민했다. 이전 문구사업을 할 때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남이 하지 않는 것, 의미가 있는 일을 하자’.

주변에서는 “가마솥을 걸고 국밥집을 하면 대박”이라고 이야기했다. 흘려들었다. 한옥 국밥집은 이미 시내 군데군데 있었다. 설혹 대박을 친다고 해도 문화재 건물에 남이 다 하는 국밥집을 내기는 싫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수상이 단골로 다니고, 외국에서 정상급 손님들이 오면 대접하는 그런 음식점들이 있습니다. 부러웠지요. 나카소네 수상과 레이건 대통령이 같이 앉아 식사하는 공간, 그런 걸 한국에도 만들고 싶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 미야자와 전 총리와 일본 교토의 전통 일본 건물에서 만나 식사하는 걸 보면서 부러웠지요.”

1993년 무렵 관광산업에 대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다. ‘한국방문의 해’도 지정해서 홍보하고 이런저런 관광산업 관련 사업에 대한 지원도 있었다.

“주변의 조언을 얻어서 전통 한식을 선보이는, 넉넉한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올림픽 이후 외국 손님들은 많이 오는데 막상 외국인들에게 ‘이게 한식이고 이게 한식당’이라고 내세울 만한 곳은 드물었습니다.”

오늘날 ‘석파랑’의 시작이다. 1993년 겨울 ‘석파랑’은 문을 열었다.

“건물의 기왓장 하나하나까지 직접 챙기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느리지만 제대로 걷기로 했습니다.”

오랜 세월 공을 들였다. 나무 하나, 돌 하나, 벽돌과 기와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 지금도 김 대표는 특별한 외부 약속이 없는 한 늘 ‘석파랑’으로 출근한다. 시작할 때보다 규모는 한결 커졌다. 하는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제 든든하다. 딸도 이 공간에서 같이 일한다. 아들도 ‘석파랑’의 바깥일을 하고 있다. ‘석파랑’의 문을 열 때부터 일하던 주방 스텝들, 자기 몫을 너끈히 해내는 직원들이 늘 함께 하고 있다.

딸 김수진 실장도 직원들이 늘 든든하다고 말한다.

“창업할 때부터 같이 한 주방 스탭들도 계시고, 제가 막 ‘석파랑’에서 일할 때 같이 시작한 분들도 계시고요. 이분들이 큰 힘이 됩니다.”

돌을 깨는데 7년이 걸리다, ‘석파랑’의 변신

부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것은 ‘운명’이다, 싶다.

김 대표의 딸 김수진 실장은 미국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음식 공부를 했다. 엉뚱하게도 대학 전공은 ‘도시공학’.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음식공부를 하게 되었다.

“아버님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지만 늘 기억에 남는 건, ‘지금 배우고 있는 것, 또 배운 게 삶을 사는데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젠가 꼭 쓰일 데가 있으니 잘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데 김 대표가 불쑥 전화로 딸에게 “뉴욕의 CIA라는 곳을 한번 가보라”라고 했다. 전 세계 3대 요리학교 중 하나라는 사실도 몰랐고, 평소 음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번 가보라고 하니 갔다가 결국 입학지원을 하고 그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 갔을 때는 그저 학교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니고 싶었습니다. 입학 후에는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요.”

졸업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1년 정도 인턴을 마치고 귀국한다. 김 실장은 미국에서 2년 반 정도 머물다 돌아왔다. ‘도시공학을 공부하던 공학도’가 음식, 음식점 경영 공부를 한 것이다.

문구사업을 하다가 음식점 경영자가 된 아버지와 도시공학을 공부하다 음식점 경영에 발을 담근 딸.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석파랑’은 2대가 미련하지만, 올곧게 걷는 길이다. ‘딸’이 합류하면서 ‘석파랑’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기존의 ‘석파랑’ 건물 곁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이태리 식당 ‘스톤 힐(STONE HILL)’도 문을 열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의 한식당은 ‘석파랑 2.0’이라고 이름 붙였고요.”

단순한 한식전문점이 아니라 ‘공간을 제공하는 전문점’으로 거듭나고 있다. 직원도 늘었다. 주방 조리장 한 사람 뽑는데 몇 달씩 걸리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느리고 깊게’ 걷고 있다.

새로 지은 건물. 겉보기와는 다르다. 겉보기엔 ‘잘 지은’ 건물 하나지만, 속을 보면 누구나 감탄한다. 느리지만 깊다.

“새로 건물을 지으려니 지반이 전부 돌 덩어리였습니다. 돌을 쉽게 깨고 건물을 짓는 대신 돌 하나하나를 진동도 없이 깨는 작업을 했습니다.”

6, 7년 동안 ‘미련스럽게’ 돌을 깼다. 지금도 새로운 건물의 벽면 군데군데에는 돌을 깨뜨린 자국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돌을 깨뜨린 자국들이 마치 미술품 같다. 그 자국들을 고스란히 남겼다.

음식은 꾸준하다. 다행히 ‘석파랑’의 주방은 바뀌지 않았다. 음식점은 음식을 내놓는 곳이다. 문을 열 때부터 더불어 한 스탭들이 있다. 새로운 음식도 찾지만 바탕이 순한 음식이다. 요란하게 궁중음식이라고 표시하지 않는다. 겉으로 뽐내기보다 깊은 맛을 내는 음식들이다. 궁중음식도 반가음식도 아니다. ‘석파랑이 보여주는 한식’일 뿐이다.

#사진 캡션

- ‘석파랑’김주원 대표와 딸 김수진 실장

- 김주원 대표가 ‘석파랑’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 유서 깊은 한옥을 신ㆍ개축해 석파랑을 열었다.

- ‘석파랑’의 음식은 ‘석파랑식의 한식 밥상’이다.

- 새롭게 시작하는 이태리 레스토랑 ‘스톤힐’은 ‘석파랑’의 소중한 미래 중 하나다.

-

한식맛집

두루담아

경기도 여주의 한식당. 버섯전골을 기본으로 잘 차린 한식밥상이다. 각종 장류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5∼10년 묵은 간장, 된장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두레

인사동의 한식 전문식당. 외국인들에게 권해도 좋을 만한 한식이다. 신선한 재료를 구하는 노력도 놀랍고 묵은 장류를 사용하는 솜씨도 좋다. 제대로 된 ‘두레 식 한식’.

토담

대중적인 한식 밥상이다. 호남풍의 편안한 한식 밥상. ‘허리띠를 풀고 먹는’ 비교적 낮은 가격의 호남 밥상이다. 시래기에 된장을 넣고 끓인 국이 아주 좋다.

진주부엌 하모

처음부터 진주음식을 내세웠다. 육전, 진주비빔밥 등이 아주 좋다. 말린 고구마, ‘삐대기’로 만드는 고구마죽도 일품.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하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