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든다” 일념 40년 실천

일흔 살 넘긴 노부부의 세월과 정성으로 만든 돼지국밥 ‘맛’의 정수 보여

“아무리 음식솜씨가 좋아도 좋은 식재료의 맛을 이길 수는 없어”

사골과 등뼈만 사용, 가마 솥에서 고아 내 맛 더해… ‘토렴’하는 드문 식당

“돼지국밥에서 잡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조미료 없이 깔끔하고 맛있다”는 평가도 줄을 잇는다. ‘희한한 음식’이라고 하면서 “왜 그럴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맛있다. 그저 이 말만 되뇌는 이들이 많다. 알고 싶었다. 일흔 살을 넘긴 노부부가 운영하는 ‘성화식당’. 40년 세월 동안 묵묵히 돼지국밥을 말아내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평범한 이야기다. 젊은 세대들은 “또 그 이야기야? 가난하게 살았던 이야기? 너무 지겨워!”라고 할 법한 그런 이야기다. 또 그 이야기다. 가난한 시절 이야기.

젊은 처자,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육심옥, 1942년생이다. 처자는 서태화, 1945년생이다. 처자는 대구 북구 산격동에 살았다. 1940, 50년대에는 대구에서도 외진 외곽지역이었다. 가난한 동네. 총각은 성주 출신. 두 사람이 결혼한다. 서태화씨의 사촌언니가 중매를 섰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그저 그런, 가난한 집의 아들, 딸이었다. 신혼시절, 대구 신암동으로 들어왔다. 지금 ‘성화식당’이 있는 곳 언저리다.

1980년 언저리다. 재래시장이 있고 시장 주변으로 올망졸망 작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도 신암동에는 꼬불꼬불, 크고 작은 골목길이 남아 있고 나지막한 집들이 많이 있다. 도심도 부자동네도 아니다.

요즘은 작은 음식점이라도 열 때, 기획, 마케팅, 시장조사 등 준비를 한다. 당시 음식점이 그랬을 리야 없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신념?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을 뿐.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살림살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우연히 돼지고기, 뼈를 손에 들었다.

“이것저것 하다가 접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늘 살 궁리만 하는데, 마침 돼지고기, 뼈를 만져보니까 참 맘이 편한 게 희한하더라고요.”

아내 서태화 씨의 이야기다.

남편은 재료를 사들여서 식재료를 준비하고, 아내는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일을 시작했다. 식당 공간이 별도로 있었을 리 없다. 사는 집 한 귀퉁이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내놓았다. 와서 먹는 이들보다 크고 작은 행사에 ‘돼지고기를 맞추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돼지고기를 몇 점 썰어서 내놓는다. 색깔이 돼지고기와 다르게 검붉다. 맛도 돼지고기 맛이 아니다. 쇠고기의 진한 맛이 숨어 있다. 쇠고기 수육 같다.

“돼지머리 고기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쇠고기 수육 아니냐고 묻습니다. 돼지고기도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가게 문을 연 초기, 어느 모임에서 행사가 있다고 해서 돼지고기 수육을 준비했다. 붉은 색이 도는, 마치 쇠고기 같은, 돼지머리고기를 준비해서 보냈다. 곧 전화가 왔다. “다른 곳으로 가는 쇠고기가 잘못 온 것 같다. 고기 바꿔 달라”는 내용이었다. 웃으면서 답했다. “쇠고기보다 더 맛있겠지만 돼지고기다. 돈 더 받지 않을 테니 쇠고기라고 생각하고 드세요”라고. 며칠 후 전화했던 이가 몇몇 일행과 더불어 식당에 들렀다. 손에는 박카스 통이 들려 있었다. “손님에게 박카스를 접대해야 하는데 거꾸로 손님한테 박카스 선물을 받았습니다.” 노부부는 30년을 넘긴 그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묘하다. 일흔의 나이를 넘긴 식당 바깥주인에게 “아무리 음식솜씨가 좋아도 좋은 식재료의 맛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을 듣는 기분은 참 묘하다. 이런 ‘유식한’ 말은 대부분 외국에서 양식 등을 공부한 젊은 세프들에게 들었다. 또 한 가지. 일흔을 넘긴 노부부에게 “음식은 연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참 묘했다.

“처음 돼지고기 국밥 집을 여는데, 아는 것도 없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고. 무작정 돼지국밥 잘한다는 집을 찾아 헤맸지요.”

다행히 남편 육심옥씨는 입맛이 정확했다. 한번 먹어보면 그 음식 맛을 정확히 기억했다. 국밥 잘 한다는 집들을 죄다 찾아다녔다. 낮에는 먹어보고 저녁에는 만들어봤다.

솥 두 개를 나란히 걸고, 각기 다른 양, 다른 재료를 넣고 불을 지폈다. 둘 중 하나가 좋다 싶으면 나머지 하나는 버렸다. ‘좋다’ 싶은 방식과 또 다른 방식을 택해서 ‘둘 중 하나를 찾아내는’ 일을 반복했다. 먹어본, ‘잘 하는 집’의 음식 맛을 기억하면서 그 음식 맛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열 번, 백번 되풀이하면서 어느 순간 재료에 대한 나름의 ‘감’을 찾을 수 있었다.

“재료를 이기는 기술이 없다”는 말은 어디서 들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숱한 실험(?)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당연히 고생도 많이 했다. 자본 없이 시작한 일이니 모든 일을 몸으로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뼈를 손질할 공간이 없으니 가게에서 뼈 가르는 도끼질을 해야 했다. 보기도 좋지 않지만 주변에서 시끄럽다는 항의가 들어왔다.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내가 사는 집 옆에서 뼈를 빠개는 도끼질을 하고 있으면 그 소리가 거슬리는 것은 당연하다.

육심옥씨는 “차가 지나갈 때 도끼질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좁은 골목길에 차가 지나가면 소음이 생긴다. 소음 때문에 도끼질 소리는 덮어지기 마련이다.

음식점에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떻게 뼈를 고는지, 그 방법을 물어보는 것은 실례다. 숱한 프랜차이즈점, 대박 맛집들이 ‘비법’을 내세운다. 며느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 비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거짓말이다. 이제는 온 국민이 식당의 ‘비법’은 인공조미료 배합 비율임을 잘 알고 있다. 좋은 식재료, 스스로 알아차린 음식 만드는 방법이 최선이다. 굳이 더하자면 비법은 ‘마음’이다. 국밥 먹고 나가는 손님들의 얼굴 표정을 살핀다. 푸근한 얼굴, 만족스런 얼굴, 뭔가 부족한 얼굴, 불만스러운 얼굴들은 바로 표시가 난다. 남긴 음식의 양을 보고, 손님의 얼굴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한 40년 해보니,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든다는 말의 이치를 알겠습디다.”

어떻게 손질하고, 어떻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못 알려줄 것도 없다고 덜렁 뼈가 담긴 큰 고무 통을 내놓는다. 사골과 등뼈가 담겨 있다. 비법은 있다. “잡뼈는 쓰지 않는다. 고기 곤 국물이 맛있긴 하지만 사용하지 않고 다 버린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실제 고무 통에 사골과 등뼈만 소복하다.

“아무리 피 빼기를 잘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뼈를 고아도 잡뼈는 비린내, 누린내가 나거나 잡내가 납니다. 잡뼈가 싸고 맛이 진하니까 식당 하는 사람이야 잡뼈를 사용하면 좋지요. 그런데 잡뼈는 비린내, 노린내, 잡내 때문에 힘듭니다. 그저 내가 해본 방식대로 비싼 사골이나 등뼈를 사용하는 게 제일 낫지요. 고기도 마찬가지입디다. 고기 삶은 물은 입에는 단데 그게 또 묘한 냄새가 나서 사용하기 힘들고.”

살림집 귀퉁이에 문을 연 돼지국밥 집은 다행히도 운영이 잘 되었다. 주문이 밀려들어 미처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식당 이름이 ‘꿀꿀이식당’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지은 이름이 아니다. 돼지고기를 주로 만지니 ‘꿀꿀이식당’이었다. 처음 문을 연 곳에서 지척 간에 있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기 전 ‘똘똘이식당’으로 바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대구, 경북 지방에서 돼지를 몰 때 ‘똘똘똘’이라고 소리를 낸다. ‘꿀꿀이’나 ‘똘똘이’나 모두 돼지를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성화식당’은 나름 깊이(?) 생각하고 정한 이름이다. 성화는 ‘聖火’다. 올림픽 같은 경기 때 릴레이로 전달되어 메인 스타디움에 오르는 바로 그 ‘불’이다. ‘성화식당’으로 이름 붙이고 간판에 성화도 하나 그려 넣었다. 지금의 간판에는 성화는 없고 ‘(구)똘똘이식당’만 적어 넣었다.

이름이야 어떻든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마음속으로 늘 “이문이 작더라도 많은 손님이 찾아오면 그게 낫다”라고 되뇌었다. 다행히 손님들은 주인 부부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외진 골목 안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넥타이를 맨’ 손님이 밀려들고, 외부 행사에서 가져가는 돼지수육의 양도 적지 않았다.

늘 식재료가 가진 맛을 살리는 음식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무턱대고 ‘국산 식재료가 좋다’고 고집피지 않았다. 써보면 음식 맛이 다르니 자연스럽게 국산 식재료만 고집하게 되었다. 조미료를 사용하면 음식 맛이 아니라 양념의 단맛, 감칠맛만 나니 피했을 뿐이다. 늘 가게 앞에 대형 가마솥을 걸어놓았다. 처음 가게 문을 열 때는 10말 들이 가마솥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크기가 준 것이 일곱 말들이다.

가마솥에서 고아낸 국물 맛은 달랐다. 깊은 맛이 나고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쇠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나고 돼지고기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도 인터뷰 도중에 들었다.)

가마솥이 우리 것이고 좋으니까 쓴다, 가 아니라 막상 여러 번 써보니 가마솥에서 곤 것이 좋았기 때문에 사용했다는 식이다. 가게 안팎에 가마솥을 설치했다. ‘성화식당’ 국밥 국물이 맑고 깔끔한 이유다.

부추도 사용하지 않는다. 돼지고기, 돼지 뼈의 좋은 맛을 오히려 가리기 때문이다. 쌀뜨물도 마찬가지. 국물 맛에 거슬리니 사용하지 않는다. 양념 하나하나 신경 써서 챙기는 이유도 간단하다. 돼지고기, 국물 맛을 돕기 때문이다. 서투르게 사용하는 식재료는 결국 음식 맛을 해친다. 99개를 잘 하고 마지막 하나가 서투르면 음식은 망가지기 마련이다.

800원 짜리 돼지국밥에서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돼지국밥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밀양에서 시작했거나 배웠나, 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가진 것 없는 젊은 부부가 외지고 허름한 골목 언저리에서 ‘먹고 살려고’ 힘겹게 시작한 일이 돼지국밥 6, 7천원 시대로 연결된 것이다. 호평이 이어지고 손님이 많아지면서 아들, 딸 남매를 대학 졸업시킬 정도로 돈도 벌었다. 아내 서태화씨가 식당 주방에서 일하다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적이 있었다. 과로였다. 어느새 두 사람 모두 칠순을 넘겼다.

“아들이 우리가 만드는 국밥이 의미가 있다고 하대요.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그게 제일 반갑고 고맙지요. 물려받을는지는 알 수 없지요. 아직 바깥에서 하는 일이 바쁘니까.”

‘토렴’을 하는 집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안주인 서태화씨가 국물을 토렴하고 있다. 이제 토렴 방식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남편 육심옥씨는 “우리 부부가 고생한 것은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요. 그래도 손님들이우리 국밥 먹고 ‘잘 먹었다’ ‘고맙다’라고 하니 저야 말로 고맙다”고 말한다.

-40년 가까이 가마솥을 고집해 왔다. 큰 가마솥을 밖에, 또 안에 걸고 국물 맛을 잡았다.

-‘성화식당’ 돼지국밥과 돼지고기 요리.

돼지국밥 맛집 4곳

대건명가

뽀얀 색이 도는 돼지국밥 집이다. 국물을 낼 때 별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원칙대로 만들어서 내놓는다. 맑고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볼 만하다. 부산 초량 부근.

단골집

밀양 중앙시장 골목 안에 있다. 음식 맛과 더불어 낡고 오래된 건물, 분위기에서 추억을 찾을 수 있다. 나이 드신 할매들이 장식한 벽의 글귀들에서 인생을 느낄 수 있다.

할매돼지국밥

전국적으로 유명한 노포다. 국물의 맛과 더불어 어슷하게 썰어 내놓는 수육들도 먹음직스럽다. 방송 소개 후, 긴 줄이 늘어서니 조심. 부산 범일동이다.

단골식당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돼지, 순대 국밥 노포다. 부엌 한 면에 토렴을 하는 공간이 있다. 최근 토렴이 아니라는 불만들도 있다. 푸짐한 시골 국밥.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