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에 물든 백두대간 옛길을 넘다

한때는 강원도 북부의 동서를 잇는 길, 다시 말해 영서지방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고성과 속초를 넘나드는 고갯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옛 영화는 온데간데없다. 사람 발길이 닿는 날보다 닿지 않는 날이 더 많아진, 그리하여 철저하게 잊히고 묻힌 길일 뿐. 실선은커녕 점선 한 올조차 지도에 올리지 못하는 신세가 된 길, 새이령.

강원도 북부의 백두대간 고갯길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포장된 것은 1971년 한계령이고 뒤를 이어 1984년 진부령, 1990년 미시령이 포장되었다. 새이령(샛령)은 한계령 포장과 때를 같이해 길의 족보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사회의 필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인생살이처럼 길도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것이 인간과 길의 운명이런가. 하지만 버려진 새이령 옛길은 결단코 서글프지 않다. 인간이 지나온 길에 역사가 남듯이 잊힌 옛길에는 숱한 나그네들의 애환이 보석처럼 숨은 채 남아 있는 법.

새이령이 옛길 그대로 남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길마저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관광도로로 전락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래, 그러니 새이령은 오늘도 어쩌다 발 디디는 인간을 웃음으로 반길 수 있는 것이다.

길손들의 애환이 서린 아름다운 오솔길

용대3거리에서 미시령 길로 접어든다. 조선 성종 때 길이 열렸지만 워낙 지형이 험상궂어 폐쇄와 개통을 거듭했던 미시령은 1990년 포장됨으로써 인제와 속초를 잇는 지름길로 떠올랐다. 그 후 2006년 5월 미시령터널을 뚫었고 2010년 7월에는 전구간을 왕복 4차선으로 넓혔다. 겨울철마다 폭설로 길이 끊겨 고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 새 길과 터널을 뚫은 가장 큰 이유지만 도로확장공사 탓에 백두대간의 허리는 또다시 무참히 유린당했다.

용대3거리에서 대략 1.5㎞ 지점에 있는 박달나무쉼터가 새이령으로 오르는 이정표 구실을 한다. 여기서 창암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개울을 건넌 다음, 북쪽으로 뻗은 지류 계곡을 찾아 들어간다. 새이령은 민초들의 한, 그리고 보부상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그러나 지금은 찾는 이 거의 없는, 하지만 다시 찾고 싶은 아름다운 오솔길이다.

길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40여 년. 그 옛날 길손들은 새이령 길목인 창암마을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민가 몇 채만 드문드문 보이지만 번성했던 옛날에는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며, 산짐승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새이령 옛길은 계곡 따라 울창한 원시림 속으로 이어진다.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등 온갖 침엽수와 활엽수가 우거져 한 줄기 햇살이 그리울 정도다. 물들어가는 가을빛에 젖어들다가 억새밭을 헤치는 맛도 운치 만점이다. 꼬불꼬불하지만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작은새이령(소간령)을 넘으니 신선봉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발목을 적신다. 그러더니 이내 낙엽송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빽빽한 숲길로 빨려 들어간다. 허리춤까지 잡초가 무성한 묵밭이 옛 사람들이 흘린 구슬땀을 떠올리게 하다가 너르고 평평한 곳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말들이 쉬어갔다는 전설의 땅 마장터

창암에서 한 시간가량 걸려 다다른 너른 평지는 바로 마장터. 조선시대에 새이령을 넘던 말들이 쉬어갔다는 마장터는 시인 묵객들이 머무르며 시 한 수 읊기도 했던 곳이다. 그 옛날 마장터에는 없는 게 없었다. 말발굽 파는 곳에다 함지박 공장에 길손들의 피로를 씻어주었던 주막집까지 있었다. 당시 마장터 사람들은 장보러 나갈 필요가 없었다. 동해안에서 생선이나 소금을 지고 오가는 보부상들도 수시로 새이령을 넘으니 가만히 앉아서 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40여 가구가 살았다지만 한계령이 포장되던 무렵, 때마침 불어 닥친 화전민 정리 사업으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정든 땅을 등졌고 버려진 땅은 억새가 점령했다. 다시 찾았을 때는 깔끔한 새 집이 들어서 있었지만 인적은 없다. 마장터 삼거리에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면 억새로 지붕을 인 오래된 귀틀집과 초가집이 숨어 있다.

마장터에서 큰새이령(대간령)으로 향한다. 길은 수시로 계곡을 건너며 완만히 이어진다. 해발 650미터의 큰새이령은 소파령이라고도 했는데 일제가 대간령으로 바꾸었다. 마장터 삼거리에서 큰새이령 고갯마루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동해안 쪽 도원리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 가풀막으로 푹푹 빠지는 낙엽 더미 탓에 길 흔적이 사라지기도 한다.

한 시간 남짓, 급한 비탈을 내려서면 임도를 만나고 다시 한 시간가량 내려가면 선녀폭포 등의 비경을 품은 문암천계곡을 지나 도원리에 다다른다. 인적 드문 호젓한 옛길을 네댓 시간 헤치고 넘어온 뒤 만나는 아늑한 마을이 아득한 시간 여행의 끝을 알리면서 현실 세계로의 귀환을 일깨워준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찾아가는 길=인제-원통-한계리3거리-46번 국도-용대3거리를 거친다. 속초 방면 새 56번 도로(미시령터널 길)가 아니라 옛 미시령 길로 1.5㎞쯤 가다가 박달나무쉼터 앞에 차를 세운다.

대중교통은 원통에서 용대리 방면 버스 이용. 용대3거리에서 내려 박달나무쉼터까지는 도보 25분 거리다. 도원리는 속초에서 시내버스 운행.

▲맛있는 집=용대리 일원에는 황태를 이용한 맛집들이 즐비하다. 매서운 추위에 얼부풀려(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더덕처럼 말린 북어를 황태 또는 더덕북어라고 한다. 고추장 등 갖은 양념을 하여 구운 맛이 약간 매콤하면서 부드럽게 씹혀 일품이며 황태를 우려낸 우윳빛 국은 입안에서 고소한 향기를 풍긴다. 진미식당(033-462-8866), 용바위식당(033-462-4079), 진부령식당(033-462-1877)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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