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와 더불어 양대 비빔밥…100년 넘은 ‘천황식당’ 대표적

비빔밥은 한국 음식의 원형…삼남(三南) 중심 진주 특성에서 비빔밥 발달

진주성 전투ㆍ기생 관련설 근거 없어… 진주 헛제사밥도 영향

3대 전승 ‘천황식당’ 1910년대 진주성 부근에서 시작…핵심은 ‘장’

진주비빔밥을 찾아서

‘진주(晉州)비빔밥’을 생경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비빔밥 하면 당연히 전주다. “갑자기 진주라니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다. 비빔밥은 전통, 정통을 따지기 힘든 음식이다. 이른바 원형도 찾기 힘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만의 비빔밥을 만들 수 있다. 점심시간에 된장찌개가 나오는 식당에 간다. 큰 그릇에 밥을 담고 된장찌개와 나물 몇 가지를 더해서 비비면 비빔밥이다. 굳이 화려할 필요도 없다. 반드시 쇠고기 육회가 있어야 비빔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지금의 백과사전이다. 당시 유행하던 각종 문물을 모아서 분류한 다음 해석을 붙인 책이다. 이 책에 ‘오이비빔밥’이 등장한다. 오이와 장을 넣고 비빈 것으로 추정한다. 적어도 오이는 반드시 들어갔을 것이다. ‘게장비빔밥’도 있다. 멍게비빔밥을 보고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비빔밥의 원형은 없다. 밥, 장, 채소, 해물, 고기 등 형편 닿는 대로 넣고 비비면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한국 고유의 형태다. 중국에는 골동반이 있었고 일본에는 지금도 가마메시가 있다. 그러나 어떤 음식도 한국의 비빔밥처럼 큰 그릇에 넣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비비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비빔밥을 만들 수 있다. 비빔밥은 한국 음식의 원형을 보여준다. 원형이 정확치 않지만 ‘비빈다’는 공통점을 가진 음식이다. 이게 바로 비빔밥이다.

굳이 전주비빔밥, 진주비빔밥을 나누고 따지는 것은 그 지역의 독특한 비빔밥이 있었고 지금은 상업적으로 널리 발전하고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비빔밥을 만든다?

진주비빔밥이 진주성 전투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진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막바지.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밥을 짓고, 나물반찬을 마련하고 소를 도축했다. 그릇에 밥, 나물 등을 담고 고기를 얹은 것이 바로 진주비빔밥의 시작이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야담 수준의 이야기다. 추측이고 근거도 없다. 기록으로 남은 것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서적들이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진주성 전투를 이야기했고 진주비빔밥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와 “그러지 않았을까?”가 발전한 이야기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풀어보자.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다. 제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5일부터 10일 사이에 있었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다. 우리 측이 김시민 목사를 중심으로 군ㆍ관ㆍ민이 집결하여 승리한 전투다. 왜군 3만 명 중 2만 명 이상이 죽었다.

‘진주비빔밥이 나타났다’는 시기는 2차 전투다.

2차 전투는 이듬해인 1593년 6월 19부터 29일 사이에 있었다. 2차 전투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황진, 최경회, 김천일 장군들이 분전했지만 전투 중 황진 장군이 죽었다. 여름철이어서 비가 많이 왔고 그 와중에 서쪽의 흙 성벽이 무너졌다. 황진 장군은 성벽 쌓는 이들을 독려 차 서문 쪽에 갔다가 왜군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2차 진주성 전투의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2차 전투를 지휘했던 지휘부 중 한 축이 무너졌다. 성은 곧 무너졌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진주성은 군데군데 토성이었다.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왜군은 5만 명이었고 성안의 사람들은 민간인을 합쳐서 6만 명이었다. 조선 측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훨씬 많았다. 전투를 시작하면 모든 일손들이 모두 필요하다. 흙을 날라야 하고 각종 병기들도 옮겨야 한다. 밥을 해먹을 틈도 없다. 곡물도 귀했을 것이다. 진주성의 경우 그 전해인 1592년 가을은 전쟁시기였다. 원래 곡물이 귀한 판에 더더욱 곡물이 귀했을 것이다. 쌀은 당연히 더 귀했을 것이다. 군수품이 부족한데 비빔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력 6월이면 나물은 흔할 수 있다. 그러나 들판의 나물이 흔하다는 것이지 좁은 진주성에 나물이 흔했을 리는 없다. 진주성 안에 6만 명이 있었다면 나물이든 곡물이든 남질 않았을 터이다.

소의 도축도 마찬가지. 이 바쁜 와중에, 도구도 없다. 소 도축은 힘들다. 성은 늘 물 부족으로 힘들다. 당시의 방식으로 몇 만 명이 먹는 쇠고기를 생산하는 것은 힘들다. 시간, 도구가 모두 부족하다.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적은 수시로 몰려오고, 장마철의 성벽이 무너지는 판에 밥 짓고, 나물 만들고, 소를 잡는다는 이야기는 ‘동화’다.

기생들이 비빔밥을 만들었다?

진주성 전투에서는 논개라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한다. 더불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진주 기방(妓房)에서 비빔밥이 발전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엉터리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기방, 기생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이다. 이른바 ‘권번(券番)’이다. 권번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기생들의 조합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기생들의 조합이 없었다. 기생들은 천민계급이다.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평소에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지방관청의 크고 작은 행사에 불려나가서 춤, 노래, 웃음을 팔았던 이들이다.

갑오경장(1894년)으로 신분제도는 무너졌다. 신분이 직업이 되었다. 신분상 천민이었던 기생들은 직업 기생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기생방, 권번에서 비빔밥을 먹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그 이전 조선시대에 기방에서 비빔밥을 먹었다는 것은 엉터리다. 진주 중앙시장 무렵의 ‘천황식당’은 업력 100년을 넘겼다. 1910년대 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초기다. 길거리 음식점에서 이미 비빔밥을 팔았는데 일제강점기 기방에서 비빔밥이 시작되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이전에 민간에서 먹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더하면 기방에서 비빔밥이 시작, 발전되었다는 말 역시 ‘동화’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기생조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역시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법적으로는 ‘천민’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상놈’은 있었다.

비빔밥은 삼남의 중심 진주의 음식이다

‘북에는 평양, 남에는 진주’라는 표현이 있다. 진주는 전통적으로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진주에는 관찰사, 목사 같은 문관들과 병권을 쥔 절도사가 무시로 상주하거나 드나들었던 큰 도시였다. 관리들이 많으면 상인들이 모여든다. 시장이 서고 물산의 교류도 활발했다.

평양, 해주, 의주, 개성 등은 조선의 대 중국 통로에 있는 도시다. 관리들이 많이 드나들지만 현지의 사대부가 많지는 않다. 본관을 진주로 둔 성씨들도 많다. 진주가 큰 도시였고 양반, 사대부들이 많았던 도시였다는 뜻이다.

갑오경장 이전에는 경상, 전라, 충청을 동서로 갈랐다. 한양에서 바라볼 때, 낙동강을 중심으로 왼쪽은 경상좌도, 오른쪽은 경상우도다.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이자 삼남(三南)의 중심지였다. 왜군들이 진주성 전투에 매달린 이유가 있다. 동래, 경남 해안 지역으로 상륙한 왜군은 진주를 거쳐야 지리산을 지나 호남평야로 진입, 군량을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는 정신적인 요충지다. 진주 함락은 조선의 반 이상, 삼남을 얻는 것이었다.

크고 발달한 도시 진주에서 비빔밥이 시작한 까닭이다. 진주 관청에 많은 물산들이 몰려들고 더불어 소비자들도 풍부하다. 관리, 상인, 일반 서민 등 모두 소비자다. 소, 돼지 등 짐승의 도축도 마찬가지다. 짐승의 도축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가장 큰 소비자 층은 바로 지방 관청이다. 백정들은 지방 관청에 호적을 올리고 세금 대신 소, 돼지 등을 도축해서 납품했다. 쇠고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진주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 시작되어 1930년대 후반까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형평사’ 운동도 바로 진주에서 비롯되었다. 형평사, 형평운동은 진주의 백정들이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진주 백정들의 사회주의 평등’ 운동, 단체였다.

헛제사밥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양반, 사대부들이 제사를 모신다. 제사 음식은 최고의 음식이다. 조상들에게 바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제사음식을 평소에 해먹었던 것이 바로 헛제사밥이다. 진주의 헛제사밥도 진주비빔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3대 전승 100년의 역사 진주 ‘천황식당’

‘진주비빔밥’을 이야기하면 늘 ‘천황식당’이 등장한다. ‘천황식당’은 업력 100년을 넘겼다. 이름 ‘천황’은 일본과는 관련이 없다. 인근에 영남 알프스가 있고 천황봉, 천황재, 천황산이 있다.

현재 진주 중앙시장 자리에 땔감, 장작 시장이 있었다. 이른 아침, 장작을 지게에 지고 온 사람들은 요깃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서울 청진옥의 주 고객들도 바로 외부에서 한양도성으로 땔감을 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관청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서고, 시장에 온 사람들은 요깃거리를 찾는다. ‘천황식당’의 시작은 1910년대 진주성 언저리의 시장, 땔감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현재 주인은 3대째다. 업력 100년 중 27년이 현재 주인 김정희 대표의 몫이다. 처음 문을 연 강문숙 할머니, 2대 오봉순 할머니는 모두 돌아가셨다. 두 분은 김정희 대표의 시할머니, 시어머니다. 김정희 대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2년간 그리고 혼자서 25년간 가게를 이끌어왔다.

“진주비빔밥에는 속대기가 반드시 들어갑니다.”

속대기는 김, 파래 등과 비슷한, 깊은 바닷물 속에서 자라는 해조류다. 잘 무쳐놓으면 씹는 맛이 독특하다.

고사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물을 얹고, 반드시 선지가 들어간 보탕국이 더불어 나온다. 그러나 진주비빔밥의 핵심은 장이다. 전통적인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고, 된장, 고추장 등도 ‘천황식당’에서 만든 것들을 사용한다. 식당 내부 마당의 장독대에서 ‘천황식당’의 맛이 시작된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천황식당’의 모습. 일제강점기에 지은 일본식 건물이다.

-‘천황식당’의 3대 주인 김정희 대표. 시어머니 모시고 2년, 혼자 25년, 모두 27년의 세월을 천황식당에서 보냈다. 김 대표는 천황식당 진주비빔밥의 맛은 장맛이라고 말한다

-‘천황식당’의 진주비빔밥은 인근의 시장, 혹은 오랜 거래처에서 받는 우리 식재료로 만든다. 검은 것이 숙대기나물.

-‘천황식당’' 진주비빔밥. 보탕국과 육회 등이 보인다. 김치, 깍두기 등도 직접 만든다.

-‘천황식당’ 진주비빔밥의 맛은 장맛이다. 가데 뒤편 마당에 장독대가 빼곡하다

진주& 진주 음식 맛집들

제일식당

진주 중앙시장 안에 있는 진주비빔밥, 해장국 등을 내놓는 곳이다. 시장통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점.

수복빵집

업력이 긴 노포. 예전 방식의 빙수, 빵에 팥을 끼얹은 주전부리 등이 유명하다. 진주 여행 시 들러볼 집.

진주부엌 하모

서울 도산사거리 부근의 진주음식 전문점. 진주비빔밥과 육전 등이 특이하다. 말린 고구마로 만든 뼈대기 죽도 있다.

소문

서울 광화문의 진주음식 전문점. 비빔밥과 생선전 등이 수준급이다. 정갈한 진주음식과 인테리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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