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이어온 중식당…한국ㆍ중국 사람과 음식 뒤섞인 ‘韓中食’

조부, 1940년대 산둥성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중식당 열어

경주에서 ‘산둥반점’ 60년 운영…서울에서 ‘마마수교’ 출범

샐러리 만두로 시작…한국인에 이상적이며 가장 중식다운 음식 기대

짜장면은 중국 음식일까? 그렇다. 짜장면은 중국 ‘자장미엔(炸醬麵, 작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짜장면은 한국음식일까? 그렇다. 한국 짜장면은 중국 ‘자장미엔’과 다르다. 서울 은평구 ‘마마수교’의 장수향 대표를 만났다. 화교 집안의 태어난 장 대표에게 한국, 중국이 뒤섞인 중식 이야기를 듣는다.

짜장면의 시작은 인천이 아니다

인천이 짜장면의 시작이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인천, 제물포는 중국과의 통로였다. 19세기 말부터 많은 중국인들이 산동반도-인천을 잇는 배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 왔다. 인천은 화교들의 한반도 진입로였다. 인천은 화교들이 고향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화교들은 인천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산동반도로 떠났다.

화교들을 재우고 먹이는 시설도 많았다. ‘회관(會館)’ 혹은 ‘반점(飯店)’이다. 부두 노동자 중에도 화교들이 많았다. 그들이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영사관도 가까이 있었다.

가난한 이들이었다. 화교들은 집에서 먹던 음식을 길거리에서 사먹었다. 소박한 음식, 일상의 음식을 적은 돈으로 사먹었다. 짜장면이 있었다. 중국식 이름은 ‘자장미엔(炸醬麵, 작장면)’. 넓고 두터운 국수에 중국식 ‘장(醬)’인 ‘첨면장(甛麵醬)’을 볶아 얹었다. ‘국수+첨면장’은 한국의 ‘밥+된장찌개’ 정도 음식이다. 밥 대신 국수, 된장찌개 대신 볶은 중국식 첨면장이었다.

인천에서 짜장면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중국 전통 가정식을 인천에서 널리 팔았을 뿐이다. 길거리 수레에서도 팔았고 어느 순간부터 가게, 회관, 반점에서 팔았다. 구체적인 증언은 없다. “그랬다더라”는 이야기만 남았다.

‘자장미엔’은 서민들의 소박한 가정식이었다. 오래된 중식 중 하나였다.

밀가루 한 부대 메고, 대구에서 경주로

“할아버님이 먼저 한반도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무렵이었고요. 대구에 큰할아버님이 살고 계셨는데 그곳에 갔다가 할아버님은 밀가루 한 부대 메고 경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청요릿집 일이니까 경주에서 가게를 여셨겠지요.”

서울 은평구 ‘마마수교’의 장수화 대표 집안 이야기다. 중국도 난리가 난 상태였다. 일본은 1920년대 불황을 겪었다. 일본은 대륙침략으로 경제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만주사변을 거치며, 1937년 ‘노구교사건’을 일으켰다. 제국주의 일본의 자작극이었다.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명분 삼아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한다. 중국 전역이 어수선했다. 가난한 산동성 일대는 더 살기 어려운 땅이 되었다. 산동성의 중국인들 중 일부는 한반도로 향했다. 한반도도 가난했지만 전쟁의 어수선함은 없었다. 장수화 대표의 할아버지도 한반도로 향한 산동성 중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장 대표의 아버지 장충선 씨는 1938 년생.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한반도에 있었다. 어린 장충선은 열 살 무렵까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한국전쟁 직전 그는 아버지를 찾아 한반도로 건너왔다. 어머니와 통통배를 타고 ‘아버지가 사시는’ 한반도로 향했다. 서해 뱃길은 위험했다. 바다를 건너다 전복되는 배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한화(韓華)들이 겪었던 일이다.

할아버지가 ‘산동반점’을 낸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중국 화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중식당을 여는 일이었다. 식당을 열면 가족들이 배를 곯을 일은 없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청요릿집이었다. 1950년대. 미 공법 480조 덕분에 한반도에 밀가루가 흔해졌다. 채소도 쌌다. 중식당, 청요릿집의 전성시대였다.

“예전에는 요리를 만들 때도 첨면장을 사용했습니다.”

첨면장(甛麵醬)의 ‘첨(甛)’은 ‘혀 설舌+달 감甘’이다. ‘첨밀밀(甛蜜蜜)’도 같은 글자를 쓴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면=국수’다. 면을 먹는데 단맛을 느끼게 하는 장이 첨면장이다. 당연히 요리를 만들 때도 첨면장을 넣었다. 어린 시절, 장수화 대표는 집안에서 첨면장을 넣고 식재료를 볶거나 튀기는 모습을 봤다. 1980년대 경북 경주 화상 중식당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한국 분이세요. 경북 의성 출신인데 상당히 넉넉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분이시죠. 할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중식당을 아버님이 물려받아서 운영했습니다. 결혼 후 가게 운영부터 음식 만드는 일까지 많은 일을 어머님이 하셨지요. 어머님은 여장부 스타일입니다. 고생도 많이 하셨고요. 나중에 경주 동국대에 진학하고 보니까 교수님들 상당수가 저희 식당 단골들이시더라고요. 어머님 덕분에 저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어머니 강태란 씨는 화교 남편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중식을 배우고 익혔다. 딸 장수화 씨가 가게 문을 열면서 이름을 ‘마마수교(媽媽水餃)’라고 붙인 이유가 있다.

“마마는 중국어로 ‘엄마’입니다. 수교는 수교자, 물만두이지요. 마마수교는 ‘엄마의 만두’라는 뜻입니다. 가게 이름을 보고 아버님이 엄청 섭섭해 하셨습니다(웃음). 나중에 가게를 하나 더 열면 이번엔 ‘파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빠 식당’인 셈이지요.”

60년 된 가게의 ‘장’이 남아 있네

할아버지, 아버지가 운영하던 경주의 ‘산동반점’은 2014년 무렵 문을 닫았다. 부자 2대가 60년간 운영하던 가게였다. 문을 계속 열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70대 중반의 나이였고 아들, 딸들은 외국 혹은 외지로 흩어졌다. 물려받을 사람이 없었다.

한식과 마찬가지로 중식도 ‘장’이 음식의 중심이다. 60년 운영한 가게의 문을 닫고 나니 ‘첨면장’이 남았다.

“2010년 무렵,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서울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 7년간 집안 살림만 했습니다. 몇 년 동안 이태원에서 가방 가게 일을 했지만 설마 식당을 운영할 줄은 몰랐지요. 음식도 할 줄 모르고.”

장수화 대표는 경주 동국대 중어중문학과 동기생인 김경훈 씨와 결혼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지금도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마마수교’의 시작은 샐러리였다. 치료 차 서울로 온 어머니는 딸집에 머물렀다. 어느 날 음식을 만들고 남은 샐러리 잎을 넣고 만두를 만들었다. 지금 ‘마마수교’에서 내놓고 있는 ‘샐러리만두’의 시작이었다.

“어머님은 화교보다 중식을 더 잘 만지셨어요.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중 하나가 샐러리만두였고요.”

샐러리만두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걸로 가게를 내겠다고 하니까 “6개월을 버티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다. 중식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은 퍽 무겁다. 힘든 일은 애당초 시작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샐러리만두를 배워서 가게를 운영하다가 망해도 좋다. 문을 닫으면 아이들에게라도 그 만두 맛을 알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에게 짜장면 등을 배웠다. 경주 ‘산동반점’의 쓰다 남은 장과 도구를 가져왔다. 흔히 보는 까만 짜장면 소스가 아니라 수제 원형 첨면장이었다. 중국에서 대량 생산된 첨면장을 쓰는 집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처음엔 수제 첨면장 사용을 반대했다. “서울 사람들은 이 장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마수교’는 만두전문점으로 문을 열었다. 경주에서 가져온 첨면장으로 소스를 만든 ‘산동짜장’을 선보였다. 일체 색소를 넣지 않아서 멀건 색깔의 짜장면을 내놓으니 손님들이 당황했다.

“지금도 처음 오는 분들께는 ‘산동짜장’보다는 일반적인 짜장면을 권합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짜장면이냐?’고 항의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꾸준히 첨면장을 사용하는 ‘산동짜장’을 선보였다. 희한하게 몸이 아픈 사람들이 ‘산동짜장’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 첨면장도 배워야 한다

아직은 장을 경주에서 만든다. 부모님들이 장을 만들어서 서울로 보내준다. 겨울철이면 밀가루와 콩으로 중국식 메주를 만든다. 메주와 소금물을 섞어서 장을 빚는다. 한국 메주와 비슷하다. 중국 장은 간장, 된장을 분리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삭으면 항아리에 넣고 매일 장을 뒤집어 준다. 자주 뒤섞으면 장은 햇빛을 보고 습도와 온도 사이에서 몸을 만든다. 2년 이상 묵은 장이 좋다. 공기에 노출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은 점차 짙은 색으로 변한다. 오래 묵은, 좋은 장일수록 색깔이 짙다. 시판 공장제 짜장 소스가 검은색 색소로 색깔을 내는 이유다. 언젠가는 첨면장도 직접 만들 것이다. 언제까지 어머니, 아버지에게 기댈 수는 없다.

“어머님이 웬만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하지 않는 분입니다. 언젠가 제가 만든 음식을 드시더니 ‘이만하면 먹을 만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장 큰 칭찬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더불어 평생 힘들게 식당을 꾸렸다. 마음속으로 딸은 편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딸이 식당을 열었을 때 기술을 다 전해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늘 말릴 수밖에 없었다. 식당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 어머니는 딸을 대학까지 보내고 안심을 했다. 설마 식당일을 하지는 않겠지, 라고. 그 딸이 또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다.

음식을 만드느라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에 상처를 늘 달고 산다. 만두 빚는 것, 짜장면, 짬뽕을 배웠다. 딸은 새로운 요리를 하나씩 배우고 또 손님상에 내놓고 있다.

이제 원형 첨면장에 가까운 중국식 장도 직접 만들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3대가 한반도에 살았다. 한국, 중국 사람이 뒤섞이고 한식과 중식이 뒤섞였다. 언젠가는 장수화 씨에 의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적이면서, 가장 중식다운 음식이 태어날 것이다.

짜장면은 중식인가, 한식인가? 이제 답한다. 짜장면은 ‘한중식(韓中食)’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마마수교’의 장수화 대표. 만두전문점으로 시작했는데 샐러리만두와 더불어 산둥짜장이 인기 메뉴가 됐다.

-‘마마수교’ 산둥짜장. 첨면장이 오늘날 짜장의 원천이다. 색깔이 검은 것은 색소를 넣기 때문이다. 첨면장은 짙은 갈색 정도.

-‘마마수교’의 굴짬뽕

-탕수육에는 과일, 채소 등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른바 궈바로우 형태.

-‘마마수교’는 원래 만두전문점으로 시작했다. 어머나가 만들어준 샐러리만두가 이 집의 시그니티 메뉴.

짜장면 맛집들

신동양

전북 익산의 화상 중식당. 주인이 지금은 문을 닫은 익산 ‘국빈반점’ 주인과 친척간이다. 흰색에 가까운 ‘물짜장’을 내놓는다. ‘하얀 매운 짬뽕’도 있다. 중국음식이 한국화 되는 중간 단계의 음식이다.

신승반점

가장 오래 전에 문을 열었던 화상 중식 전문점 ‘공화춘’의 후손이 운영하는 중식당.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다. 한국식으로 변형된 짜장면, 짬뽕이다. 1980년대 잠깐 문을 닫았다가 다시 ‘신승반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홍영장

화상 중식 전문점이다. 전북 군산에 있다. 원형에 가까운 첨면장을 사용한다. 가게 벽에는 오래된 예전 ‘홍영장’의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짜장면 색깔이 첨면장에 가깝게 노란색 혹은 갈색이다.

싱가

대중적인 짜장면 소스에 삶은 콩과 두유 등을 넣은 특이한 형태다. 진화하는 한국식 짜장면 소스다. 서울 역삼동, 교대 부근에 가게가 있다. 콩의 단맛이 강하고 비교적 순한 맛이다. 중국식과 한식이 뒤섞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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