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식 불고기 명성…최고 한우 사용, 정성 깃든 어릴적 어머니 음식 맛 재현

한우 암소 1⁺ 등급 고집, 당면 대신 소면 사용

서울식 불고기 판ㆍ개량형 병용, 본래 맛 유지

18세기 정조 때 ‘난로회’음식 불고기와 유사

불고기는 한국 특유의 소고기 구이다. 인류가 오랫동안 발전시킨 고기 음식은 수육이다. 유독 한반도에서는 날고기, 익힌 고기(수육), 삭힌 고기(육장), 불고기 등 다양한 고기문화가 발달했다. 불고기를 뒤돌아본다. 서울 을지로4가 ‘보건옥’의 불고기 이야기도 듣는다.

불고기는 무엇인가?

불고기는 한글 이름이다. 반대어는 한자어다. 수육 즉, 즉 숙육(熟肉)이다. 숙육은 수육의 본디 말이다. 숙육은 익힌 고기다. 물로 익힌 고기를 말한다. 찌거나 삶은 고기다.

수육, 숙육의 반대말이 불고기는 아니다. 수육의 반대말은 생육(生肉), 날고기다.

왜 이런 묘한 혼란이 일어났을까?

불고기가 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생육과 수육이 있었다. 최소한 18세기까지 한반도에는 생육과 수육만이 있었다. 18세기 초반인 숙종 조부터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0년을 넘겼다. 조선을 휩쓸었던 대기근들도 서서히 사라진다. 청나라와의 관계도 안정적이다. 병자호란 후 ‘멘붕’을 겪었던 조선의 사대부들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서서히 청나라를 받아들인다.

영, 정조를 겪으며 이른바 조선의 ‘제2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먹는 것이 조금씩 좋아진다. 영조는 계몽군주였다. 스스로 살림살이를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도 금주(禁酒), 금육(禁肉)을 강권한다. 정조는 딱딱한 규제를 푼다. 조정의 관리들과 더불어 ‘난로회(煖爐會)’를 즐겼다. 정조는 할아버지이자 선대 국왕의 금육령을 허물었다.

드디어 쇠고기를 먹는 시대다. 정조는 1776년부터 1800년까지 통치했다. 이 무렵 오늘날의 불고기가 시작된다.

18세기, 불고기, 전골이 시작되다

한번 풀면 다시 묶기 힘들어진다. 정조 시절 풀린 고기 문화는 조선말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지금까지 이어진다. 지금의 쇠고기 전골, 불고기는 정조 시절 시작된다.

을지로 4가 언저리. 블로거들 사이에서 “서울식 불고기를 잘한다”고 알려진 ‘보건옥’이 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 그나마 천막 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정작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게의 입구도 평범하다. 요즘 음식점들에 비하면 초라한 편이다.

원래 서울식 불판이 있었다. 중간은 마치 돔DOME처럼 동그랗게 솟아오르고, 가장자리에는 깊은 홈이 있는 구조다. 어린 시절 불고기를 먹었던 이들은 누구나 가장자리에 고인 고기국물에 밥을 말아 먹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달싹하고 고소한 그 국물 맛을 못 잊는 이들도 많다. 불고기보다 그 국물 맛이 기억에 남는다는 뜻이다.

“별다른 비법이랄 것도 없고, 그저 늘 사용하는 한우를 구해서 사용합니다. 자꾸 비법을 묻는 이들이 많은데 비법은 없습니다. 좋은 식재료를 구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참 싱거운 대답이다. 두세 번을 물어도 마찬가지. 힘이 빠진다. 헛갈린다. 진짜일까?

“굳이 비법이라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재현했다는 정도? 어머니가 해주신 그 음식 맛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 따라하려고 하지요. 음식점 음식이지만 뿌리는 가정식입니다. 어린 시절, 전북 순창, 남원에서 자랐는데 그때 집에서 꼬리곰탕을 해주셨어요. 그 음식이 지금 ‘보건옥’의 바탕이지요.”

‘보건옥’의 김계수 대표는 올해 일흔 둘이다. 안주인 고옥자 씨는 두 살 어리다. 주방부터 홀까지 실제적인 일은 아내 고옥자 씨가 도맡아 운영한다.

“가게를 처음 시작한 것은 ‘우래옥’ 옆의 자그마한 곳이었지요. 11평쯤 되었나? 그때도 불고기 내놓고 찌개 종류들 내놓고 했는데, 너무 좁아서 몇 년 하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불고기는 그때도 주력 메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이사하면서 달라진 것은 몇몇 메뉴가 늘었다는 것. 불고기 전문점에서 김치찌개, 비빔밥도 내놓는 집으로 바뀐 것이다.

가게가 넓어지면 아무래도 주방이 넉넉해진다. 홀이 넓어지면 손님을 채울 여러 메뉴가 필요하다. 다행히 방산시장 일대의 시장 경기가 좋을 시절이었다.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이들도 많았고 저녁 술자리도 쏠쏠했다.

서울식 불고기를 고집하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은 기억한다. 방산시장, 건너편 광장시장까지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청계천 일대 시장. 제법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이다. 세월이 지나며 가게 건물들이 점점 허름해진다. 한때 화려했던 시장의 모습은 추레하게 변한다. 동대문을 중심으로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일본 관광객, 중국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오히려 인근의 크고 작은 재래시장들은 예전의 영화를 잊었다.

시장들을 끼고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많았다. 당시 시장 상인들은 괜찮은 고객이었다. 외식을 하는 이들이 드물었던 시절, 이들은 식당의 큰 고객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시장 경기가 가라앉고 인근 식당들의 경기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 지금은 유명한 가게들이 죄다 문을 열고 유명식당으로 이름을 얻었다. ‘보건옥’ 부근의 ‘우래옥’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문을 열었다. 인근의 ‘을지면옥’은 ‘보건옥’보다 역사가 오히려 짧다. 콩국수, 콩비지로 유명한 ‘강산옥’은 그 훨씬 전에 문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번듯한 건물에 자리 잡았던 북한식 콩비지 전문점이다. 조금 떨어진 곳의 ‘오구반점’이나 ‘춘천산골막국수’의 경우, ‘보건옥’보다 일찍 문을 연 경우다.

‘보건옥’은 을지로 통의 유명 음식점으로 자리매김한다. 역시 다른 음식점들과는 차별화된 메뉴, 불고기 때문이었다.

‘보건옥’은 서울식 불고기 판을 사용했다. 둥근 중앙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불기운이 바로 올라왔다. 잘 숙성된 불고기 감은 때로는 열로 익고 더러는 불기운을 쏘이면서 가뭇가뭇 탔다. 마늘, 간장, 후추 등을 넣고 잘 재운 불고기는 최고의 외식 메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먹었기 때문에 지금도 당면은 사용하지 않고 국수를 넣어서 먹습니다. 차라리 소면 맛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당면 대신 소면을 사용합니다.”

‘보건옥’의 고집이다. 당면은 미끈거린다. 당면은 맛이 없다. 국물과 간장의 맛이다. 밀가루 소면은 다르다. 곡물의 맛이 더 낫다. 쉽게 풀어지니 국물에 잘 섞이기도 한다.

한우암소 1⁺ 등급을 사용한다. 전지 부위다. 한우 가격은 꾸준히 오르고 있다. 그래도 한우 암소를 사용하고, 1⁺ 등급을 고집한다.

난란회(煖暖會), 난로회(煖爐會), 전골, 불고기까지

다시 조선시대의 고기 문화로 돌아가자.

정조 시절, 18세기 후반이다. 중국에서 난란회, 난로회가 유행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이 대열에 동참한다. 국왕이 신하들과 난로회를 즐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설후야연’이라는 그림에는 남산 쯤 되는 산 밑 성벽 아래의 ‘고기 파티’가 등장한다. 남자 몇과 여자 기생 두엇, 그리고 중간에는 불판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테두리가 있고 중간은 움푹 파여 있다. 테두리는 널찍하다. 불을 피우고 여기에 고기를 굽는다. 파인 부분에는 장과 채소를 넣고 끓인다. 테두리에서 구운 고기는 중간의 움푹한 부분의 소스에 찍어 먹는다. 오늘날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는 방식과 비슷하다. 난란회, 난로회의 모습이다.

중간의 움푹 파진 부분이 더 커지고, 가장자리 테두리 부분이 줄어들면 마치 냄비 같은 모습이 된다. 마치 벙거지 모자 같다. 벙거지 모자는 전립투(氈笠套)다. 전립투에 ‘섞을 골滑’을 더하면 ‘전립투골’이다. 벙거지 모자 같은 그릇에 채소와 고기, 양념, 간장 등을 섞고 끓인 것이다. 전립투골이 전골이 된다.

이 그릇을 뒤집으면 중간이 동그랗게 솟아오르고 테두리에는 홈이 지는 모습이 된다. 오늘날의 서울식 불고기 판이다.

“그릇이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서울식 불고기 판을 좋아했는데…. 고기를 직접 불에 구워먹는 방식이 유행하고, 불고기 판을 사용하면 가끔 가스가 불완전 연소를 해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원하는 손님이 있으면 예전 불고기 판을 내놓지만 평소에는 평평한 그릇을 내놓고 있습니다.”

김계수 대표의 이야기다. 마지막까지 서울식 불고기 판을 사용했던 집. 이제 서울식 불고기 판은 서서히 사라진다. 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들고 정작 불이 올라오는 구멍은 없는 불고기 판들도 많다.

1920년대 한반도에 들어온 당면은 잡채에 들어가서 엉뚱하게 ‘궁중잡채’를 만들었다. 당면이 들어간 불고기가 우리 식 불고기인 줄 아는 이들도 많다. 그렇지는 않다. 1920년대에 들어온 당면이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의 난로회나 난란회, 전골이나 불고기에 나타났을 리는 없다.

‘보건옥’의 서울 식 불고기판, 불고기가 전북 순창 출신 김계수 씨의 손에 의해서 오랫동안 관리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다. 곰탕, 꼬리곰탕 등과 더불어 불고기 역시 한국전쟁 후에는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보건옥’의 김계수 대표. 72세. 좋은 불고기는 좋은 한우 암소를 사용해 ‘어머니가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건옥’ 불고기

-쇠고기 육회

-육회가 들어간 ‘보건옥’의 비빔밥

불고기 맛집들

성주 새불고기식당

경북 성주의 불고기 전문점이다. 밑반찬으로 내놓는 음식들이 웬만한 한식집의 반찬보다 낫다. 시골이지만 상차림도 수준급이다. 특이하게 불고기에 시금치를 사용한다.

영덕 아성식당

바닷가에 있는 불고기 전문점이다. 고기는 현지 생산 한우를 사용한다. 불판이 서울식 불고기 판이다. 식당에서 자체 제작한 것. 서툴지만 소박하고 제대로 된 불판이다.

별내 황소한마리육개장

특이하게 국산 황소고기를 사용하여 불고기를 내놓는다. 바싹 불고기 형태다. 불향이 적절하다. 깔끔하면서도 투박하다. 간장 배합을 통하여 고기를 부드럽게 한다.

진주부엌 하모

진주식 불고기는 진주비빔밥, 육전과 더불어 진주의 음식을 대표한다. 고기를 육전 혹은 불고기 형태로 자유롭게 사용한다. 깔끔하게 구워낸 불고기는 불맛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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