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60년 넘긴 메밀국수 전문점… 많은 게 변해도 맛과 향은 그대로

강원도 산골 필수 행사음식 ‘(메밀)국수’대중화되면서 ‘막국수’로 불려

메밀 흔한 인제의 권수일, 양구의 한채숙 부부 인연…상호는 인제 남북리 차용

어린시절 고향의 메밀국수 그대로 내놓아…곁들이는 강원도 산골식 갓김치 별미

‘메밀국수’ 역사 60년. 시어머니, 맏며느리, 막내며느리로 3대 전승이 되었다. 막국수의 역사는 도회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의 ‘남북면옥’. 우리 시대 막국수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권수일, 한채숙 부부를 만났다.

막국수가 아니라 국수 혹은 냉면

막국수, 냉면 혹은 국수는 혼란스럽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1970년대까지도 어색했다. 막국수의 고장이라는 강원도, 춘천 혹은 깊은 산골에서는 ‘국수’라고 불렀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없었다. 국수였다.

밀가루는 귀했다. 미공법 480조(Public Law 480)에 의해 한반도에 밀가루가 상당히 흔해졌지만 강원도 깊은 산골에는 여전히 밀가루가 귀했다. 잔치에는 반드시 국수가 필요하다. 밀가루가 귀하고 메밀가루는 비교적 흔하던 시절, 메밀로 국수를 만들었다. 누구나 메밀로 국수를 만드니 그냥 국수라고 불렀다.

‘남북면옥’의 권수일 대표는 1961년생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늘 국수라고 불렀습니다. 차게 해서 먹으면 냉면이라고 부르기도 했고요.”

권 대표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이면 1970년대 후반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깊은 산골, 인제, 원통 언저리에서 살았던 권 대표는 “막국수라는 이름은 그 후에 서울사람들한테 들었다”고 말한다.

메밀은 점도가 약해서 국수로 만들기 힘들다. 메밀을 가루로 만들고 또 국수로 만드는 과정은 힘들다. 힘센 장정이 필요한 일이다. 국수는 행사가 있을 때나 등장했다. 기구도 귀했다. 작은 산간마을에 한두 집 정도가 국수를 만들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분틀이다. 권 대표의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에 분틀이 있었다.

유압식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국수를 뽑던 시절이다. 분틀은 메밀국수, 막국수를 뽑던 도구다. 메밀껍질은 2중 구조다. 흑갈색의 겉껍질을 벗기면 녹색 혹은 옅은 갈색을 띤 녹쌀이 나온다. 녹쌀에서 다시 껍질을 벗기면 흰 색깔에 가까운 메밀쌀이 나온다. 녹쌀로 국수를 만들면 더러 벗겨지지 않은 겉껍질이 남아 있다. 오늘날, 막국수에 거뭇거뭇한 점이 남아 있는 이유다. 강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막국수, 국수는 검은 껍질이 남아 있는 거친 국수다. 막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치아 사이에 까만 껍질이 숱하게 남았다.

분틀로 국수를 뽑다 보면 더러는 분틀의 막대기가 사람 얼굴을 친다. “오래 막국수 뽑는 이 중에 앞니가 성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남아 있는 이유다.

과수원 운영, 농한기에는 막국수

도시의 음식점이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 강원도 깊은 산골이다. 농토가 없었다. 지금은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화전(火田)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화전은 1980년대에 대부분 사라진다. 정부는 화전을 말리는 입장이었지만 강원도 산골마을에서는 여전히 화전이 남아 있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연했던 이들은 화전이라도 있어야 생계가 가능했다. 산에 불을 지르고 그 땅에 곡물을 심었다. 감자, 강냉이(옥수수), 메밀을 심었다. 그걸로 식량을 삼았다.

“부모님들이 과수원을 했습니다. 농지가 부족하니 과수원을 했지요. 과수원을 하면 겨울에는 별 일이 없잖아요. 농사철에는 과수원을 하고 농한기에는 국수를 만들고. 지금의 막국수 같은 거지요. 집안에 분틀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이 있다. 왜 이름이 ‘남북면옥’인가?

“원래 부모님들이 인제읍내 ‘남북리’라는 곳에 살았으니까, 자연스럽게 ‘남북면옥’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요. 막국수라는 이름도 없었고. 나중에 남북리가 수몰이 되었습니다.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요. 지금 사는 곳도 상동리지만 남북리에서 이사해서 살았던 곳도 상동리였습니다. 남북리에 살다가 상동리로 왔는데 이번엔 상동리 집 옆으로 소방도로가 나면서 집 귀퉁이가 잘려져 나갔어요. 그래서 같은 상동리로 또 이사를 왔지요.”

망돌, 체로 치다, 그리고 타개다

권수일 대표는 3남 3녀의 막내다. 제일 위 누님은 올해 90세다. 막내누나가 1955년생. 막내 누나가 태어날 무렵 국수 장사를 시작했다.

거창하게 ‘막국수 전문점’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집안의 행사 때, 마을의 행사 때 해먹던 음식. 소박하지만 만들기 힘든 음식이었다. 집안의 분틀로 동네 국수를 뽑아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국수만 뽑아주면 각자 동치미 국물 등을 가져와서 국수를 만들고 먹었다. 호남사람들의 홍어처럼 강원도 산골의 행사 필수음식은 메밀국수였다.

메밀국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메밀의 상태도 각각 다르다. 어떤 집의 메밀은 돌 없이 깔끔하고 어떤 이의 메밀에서는 숱하게 돌이 나온다. 더러는 흙이 묻은 메밀도 있다. 이런 메밀부터 손질을 해야 한다. 메밀에서 돌을 골라내고, 씻고 말려서 깔끔한 상태로 만든다.

권수일 대표의 말 중에 군데군데 마치 사투리 같은 단어가 나타난다. 얼핏 듣고 그 뜻을 알아차리기 힘든 것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이 든 강원도 사람들은 “메밀을 타갠다”고 표현한다. ‘타개다’는 껍질을 벗기고 고운 가루를 만든다는 뜻이다. ‘메밀을 타개는 과정’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진행된다. 동력은 없었다. 전기가 귀했다. 물레방아, 맷돌질, 절구질을 하는 수밖에 없다.

‘망돌’은 맷돌을 말한다. ‘망돌구멍’에 불린 콩 등을 넣고 갈아낸다. 오래 전 두부를 만들 때 맷돌을 사용했고 콩은 늘 ‘망돌구멍’으로 들어갔다.

메밀껍질을 벗기는 것도 마찬가지. 맷돌, 물레방아 등을 이용했다. 메밀 1말을 갈아내면 2∼3되 정도의 ‘무거리’가 나왔다. ‘무거리’는 쓸데없는 메밀껍질을 이르는 표현이다. 처음 갈아낸 가루는 체로 친다. 고운 가루는 체 아래로 빠지고 거친 입자는 체 위에 남는다. 위에 남은 것을 모아서 다시 갈아낸다. 이 가루를 다시 체로 치고, 몇 번 반복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무를 직접 해다가 가마솥에 불을 땠지요. 나중에는 장작을 사서 쓰기도 했습니다. 보일러나 가스 불을 사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예전 상동리에서 40년을 보냈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지금 자리 이전의 상동리 ‘남북면옥’을 기억한다. 헤아려보면 40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보냈다. 권 대표가 ‘남북면옥’을 이어받은 것도 예전 상동리 시절이다. 그 무렵 결혼도 했다. 아내 한채숙씨는 인제 옆 양구 출신이다. 고만고만하게 살던 시절, 두 사람은 만났다. 산골의 처녀 총각이다. 우연한 기회에 자리가 마련되었고 결혼에 이르렀다.

예나 지금이나 큰 규모의 가게는 아니다. ‘가족경영’이다. 온 가족이 힘을 보탰다. 권수일 대표도 총각 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다. 집안 일이 바로 메밀국수 만드는 것.

아내 한채숙씨도 마찬가지. 양구에서 시집 와서 바로 집안일, 메밀국수 만드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가게 운영이 순조로웠던 것이 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1989년. 결혼 후 불과 보름 뒤에 한씨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맏동서가 물려받았다. 큰형님을 도와 식당 일을 시작했다.

국수집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힘으로 국수를 뽑던 분틀 대신 유압을 이용한 국수 기계를 들였다.

한채숙씨의 말이다.

“기계도 바뀌고, 불도 바뀌고,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국수도 점점 가늘어지고 있습니다. 가루가 곱게 나오니 국수를 가늘게 뽑아도 되지요. 저희 부부가 ‘남북면옥’을 물려받은 것은 2007년입니다. 큰 형님(동서)이 몸이 아파서 저희들이 운영하게 되었지요. 그 이전부터 부엌일을 했으니까 실제 메밀국수를 만든 것은 훨씬 전이고요. 시어머님이 하실 때나 큰 형님이 하실 때 그리고 저희 부부가 운영할 때나 변하지 않는 것은 메밀국수의 맛이나 향입니다. 기계로 하나 사람 손으로 하나 늘 메밀국수의 맛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있고요.”

수육도 마찬가지다.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고기를 거래했던 곳이 있습니다. 신남(인제군 남면)에서 고기를 가져옵니다. 오랫동안 고기를 가져오니 믿을 수 있지요.”

업력 60년을 넘긴 메밀국수 전문점. 한때 권수일 대표가 중장비 공장 일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메밀국수 만지는 일을 했다. ‘동네 결혼식이 있으면 하루 메밀국수를 400그릇’을 뽑았다. 양구에서 시집온 한채숙씨 역시 마찬가지. 친정 양구도 메밀이 흔한 지역이고 메밀국수를 먹었던 곳이다.

‘남북면옥’은 바뀌고, 한편으로는 변화하지 않는 곳이다.

장작불이 가스 불로, 메밀국수 뽑는 분틀이 유압식 기계로 바뀌었다. 메밀의 맛과 향, 돼지수육의 맛은 바뀌지 않는다. 면수의 맛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오후 늦은 시간 면수를 ‘받으러’ ‘남북면옥’에 들르는 사람들도 있다.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 그 사이에 ‘남북면옥’의 역사가 70년, 100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사족 한 토막.

강원도에도 갓이 있고 맛이 여수 갓과는 달리 작고 가늘며 더 맵다는 걸 이 집에서 처음 알았다. 갓김치가 특이하다. 늦가을 갓을 수확, 소금과 배합하여 독에 담아둔다. 이른바 염장 갓이다. 이른 봄에는 갓이 노랗게 익는다. 염장 갓을 꺼내서 물에 헹군다. 소금기를 빼낸다. 김장 양념으로 다시 버무린다. ‘남북면옥’에서는 이런 강원도 산골식 갓김치를 내놓는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남북면옥’의 권수일, 한채숙씨 부부. 인제 총각과 양구 처녀가 만나서 1989년 결혼했다. 남북리에서 상동리로 이사를 하면서 ‘남북면옥’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먹었던 그 메밀국수를 그대로 내놓고 있다.

-장미꽃이 참 아름다웠던 이사 오기 전의 ‘남북면옥’이다. 이 자리에서 40년간 ‘남북면옥’을 운영하고 지금의 자리로 왔다. 기와집 뒤로 소방도로가 뚫리면서 집이 일부 허물어졌다.

-비빔막국수와 물막국수.

-수육. 인제 남면 신남의 도축장과 수십년째 거래를 하고 있다.

-‘남북면옥’의 갓김치. 강원도 갓은 작고 맵지만 특유의 맛이 있다.

인제, 양구 일대 맛집들

전씨네막국수(인제)

막국수가 수준급이다. 100% 메밀 사용. 막국수와 더불어 두부도 아주 좋다. 이른 아침 막국수 먹기가 불편하면 두부전골을 선택하면 좋다.

양구재래식손두부(양구)

갑자기 유명해진 ‘짜박두부’가 가능한 집이다. 모두부뚝배기가 이집의 시그너처 메뉴. 두부 관련 음식을 내놓는 ‘두부전문점’이다.

전주식당(양구)

모두부와 두부전골이 아주 좋다. 두부전골에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채널A_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집이다. 양구 시내에 소재.

백담갓시래기국밥(인제)

갓시래기 국밥이 시그너처 메뉴다. 강원도 갓을 늦가을부터 말려 시래기로 만든다. 갓 시래기에 무청 혹은 배추 시래기 등을 더해서 국을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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