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지 않고 빼는’ 담백하고 깊은 맛… “음식은 식재료의 맛”, 국산만 사용

한약재 대신 꼭 필요한 재료 사용… 값 싸고 제대로 된 족발에 단골 늘어

가난 벗어나기 위해 족발 가게 시작…재료값 올라도 늘 하던 대로 맛 유지

원조도 아니다. 대단한 역사를 지닌 노포도 아니다. 이제 ‘겨우’ 30년을 넘긴 업력이다. 대단한 스토리를 가진 집도 아니다. 인터뷰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음식이 맛있다. 음식 맛은 주관적이라지만 한번 먹어보면 누구나 참 맛있다고 인정한다. 담백하다. 아, 족발 맛이 원래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동소문로인 돈암동 ‘오백집모자족발’의 김순애 대표를 만났다.

‘더하는 음식’이 아니라 ‘빼는 음식’ 만들어

족발집을 운영하는 이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족발을 삶는 육수 이야기다. 육수에 ‘나만의 비법’ ‘우리 가게의 비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었다. “육수에 뭐 넣으세요?”. 대답이 재미있다. “별로 넣는 것 없다”.

‘오백집모자족발’. 나름 유명하다. 이른바 대박맛집 중 하나다. 인터넷에 뒤져 보면 ‘족발이 촉촉하다’ ‘때깔이 곱다’ ‘맛이 담백한 제대로 만든 족발이다’ 등등 찬사가 줄을 잇는다. 그런데 정작 족발을 만드는 이는 “육수에 별다르게 넣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족발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족(足)’은 발, 다리 등을 이르는 표현이다. ‘족발’은 결국 ‘발발’이라는 희한한 표현이 된다. 전 국민이 족발이라고 부르니 누구나 족발이라고 하지만 퍽 재미있는 표현이다.

족발은 우리 시대의 음식이다. 대단한 역사나 기원이 없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족발이 알려지고 유명해진 이유를 설명하는 ‘다수설’이 있다.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피난 온 이들이 서울 장충동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해먹던 음식,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당시 서울의 외곽, 장충동 일대에서 길거리 음식으로 팔았던 것이 족발이다. 장충체육관이 생기면서 관중들이 체육관 앞에서 편하게 먹었고 그때부터 유명해진 음식이 바로 족발이다.”

역사가 불과 반세기 정도 되는 음식인 셈이다.

족발을 흔히 중국의 오향장육(五香醬肉)과 견준다. 오향장육은 ‘오향으로 맛을 낸 간장에 재운 고기’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오향이다. 해석이 제각각이다. 회향, 계피, 산초, 정향, 진피를 오향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진피는 귤껍질이다. 진피 대신 팔각은 넣기도 한다. 중식당에서는 팔각을 널리 사용한다. 팔각은 ‘스타 아니스’라고 부르는 비교적 친근한 향신료다. 노포 중식당의 탕수육에는 흔히 팔각이 등장한다. 중국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향신료다. 오향도 이제 제각각 뒤죽박죽이 된 셈이다.

정통 중식당에 물어봐도 조금씩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오향 이외에도 사용하는 향신료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족발은 한국식 오향장육이다. 산초, 계피, 마늘, 생강, 양파, 대파, 대파뿌리, 양파껍질 그리고 각종 한약재 등을 사용한다. 어떤 맛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족발도 많이 있다. 한약재를 많이 넣은 족발의 경우 한약 냄새가 고기 맛을 대신한다.

‘오백집모자족발’의 경우 육수에 넣는 재료를 ‘줄인다’고 말한다. 뭘 많이 넣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저 마늘, 생강을 많이 사용한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를 넣지 않고, 비법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고 밝힌다.

더하지 않고 뺀다

족발은 돼지의 앞, 뒤 다리다. 고기 맛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오백집모자족발’의 경우 담백하고 깊은 고기 맛이 난다. 그뿐이다. 그렇게 배웠고 지금까지 그런 족발을 만들었다.

한약재도 사용하지 않는다. 캐러멜 색소도 없다. 콜라도 넣지 않는다. 심지어는 대추도 사용하지 않는다. 족발에서 단맛이 나는 것이 싫으니 대추를 뺀 것이다. 흔히 맛을 내기 위해 월계수 잎도 사용한다. 그것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늘, 생강에 후추 정도를 사용한다. 비법이라면 좋은 간장과 도수가 높은 소주를 사용하는 정도다.

더하기보다는 빼는 음식을 만들었다. 맛이 담백한 이유다. 한번 맛을 들인 사람은 꾸준히 찾는다. 단골이 많은 이유다.

“모든 음식은 식재료의 맛”이라고 믿고 있다.

“고기는 두 곳에서 늘 받고 있습니다. 한 집은 개업할 때부터 족발을 공급하던 곳입니다. 오랫동안 한집에서 물량을 받다가 구제역 파동으로 두 집으로 늘렸습니다. 한곳에서 받으면 좋은데 돼지고기 파동이 나면 그 집 족발로 부족한 일이 생깁니다. 미처 물량 확보가 어렵고, 또 질이 떨어질 때도 있고. 그래서 두 집으로 늘렸습니다. 늘 좋은 물건을 공급하지요. 오랫동안 거래한 곳이니 믿는 부분도 있고요.”

고춧가루는 반드시 국산, 그중에서도 고향인 전북 임실에서 위탁 재배한 것을 사용한다. 매년 늦가을 전북 임실에서 1년 치 고춧가루를 준비한다.

가게 벽면에 “모든 식재료는 국산을 사용한다”고 써 붙였다. 맛있는 음식은 좋은 식재료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말이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다.

족발의 맛도 재료에서 시작된다. 족발 피 빼기만 잘해도 반은 성공한 셈이다. 좋은 재료, 제대로 만들면 고기 맛이 살아 있는 제대로 된 족발을 얻을 수 있다. 그뿐이다.

세 아이를 떼놓고 서울로 오다

지지리도 가난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1970년대 전북 임실. 누구나 다 겪었던, 평범한 이야기다. 가난한 농촌의 어느 부부가 있었다. 전북 임실 출신인 강종희, 김순애씨 부부. 강종희씨는 임실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다. 임실 읍내도 아닌 깊은 시골 청웅면이다.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시절이다. 세탁소에 맡길 옷도 그리 넉넉지 않았다. 세탁소의 운영이 잘될 리 없다. 상경 이유는 간단하다. 먹고 살기 힘들었다. 40년쯤의 시간이 흘렀다.

아내 김순애씨가 지금 ‘오백집모자족발’의 대표다. 1950년생이니 예순여덟 살이다.

“참 열심히 일했네요. 남은 건 온 가족이 먹고 산 거, 아들, 딸 자기들 하고 싶은 것 했던 거, 그리고 여기저기 몸 아픈 거…. 나이가 드니까 온 몸이 다 아파요.”

아들이 둘이다. 강훈, 강승철 형제다. 큰 아들 강훈씨는 외부에서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물갈비’ 집이다. 둘째 강승철씨는 어머니를 도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딸은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식당 일에서는 멀어진 셈이다.

‘오백집모자족발’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돈암동 큰길가에, 다른 곳은 돈암시장 안에 있다. 두 곳 모두 비교적 운영이 잘된다. ‘대박맛집’이었다. 지금도 다른 가게 주인들은 “오백집이 힘들다고 하면 우리는 어떡하누?”라고 말한다.

족발은 이북민 음식으로 알려졌다. ‘오백집모자족발’은 호남 출신이 운영하는 집이다.

“족발이 뭔지도 모르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임실에는 ‘피창’은 있었습니다.” ‘피창’은 피순대의 호남식 표현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택한 상경 길. 세 남매는 김순애 대표의 친정집에 남겨두었다. 당장 서울에 자리 잡는 일이 버거운 판에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미아4동에 사촌이 살고 있었다. 그 집 문간방을 빌렸다. 수도도 없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한 달 월세가 4만원이었다.

“쉽게 서울로 올 생각을 못했는데 마침 포장마차가 하나 매물로 나왔다고 해서 서울로 왔지요. 그걸 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하고.”

포장마차에서 실내포장마차로, 13년 걸려

포장마차용 리어카마저 귀하던 시절이다. 리어카에 포장마차를 할 수 있는 간단한 설비를 얹으면 그것도 ‘시설’이라고 귀했다.

포장마차에서 실내포장마차로, 조금씩 늘려나가는데 13년이 걸렸다. 문간방은 바람이 숭숭 통했다. 겨울에는 냉골이었다. 자고나면 문틀이 얼어 있었다. “춥지 않은 곳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1970년대, 가난한 살림살이는 대략 비슷하다. 뭔가 일을 새로 시작하려면 돈이 없다. 목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일수’를 빌릴 수밖에 없었다. 백만 원을 빌리고 하루에 1만3천원을 백일 동안 갚는 식이다. 일수꾼들이 매일 같은 골목을 다니면 일수 돈을 꼬박꼬박 받았다. 김순애 대표네도 그렇게 살았다.

“사촌오빠가 지금도 미아리에서 ‘흥부족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촌오빠네 가게는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었지요. 지금도 유명하고. 그 오빠한테 족발을 배웠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저도 족발 가게를 냈는데, 오빠네는 잘 되고, 저는 그저 그럭저럭(웃음). 그래서 돈암동으로 왔지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돈암동의 족발 가게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으면서 가격이 싸니까 슬슬 단골들이 모여들었다.

이름을 ‘오백집’으로 정한 이유를 물었다. 인터뷰 도중 한참을 웃었다.

“가난했으니까 장사해서 당장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때도 전주의 콩나물국밥집 ‘삼백집’이 유명했어요. 남편이 그걸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오백집 하자’고 해서 ‘오백집’으로 정한 겁니다. 하루 족발을 오백 개 이상 팔아보자는 뜻이지요.”

맏아들 강훈씨가 ‘칠백집’ ‘팔백집’ ‘구백집’ 등을 운영했거나 지금도 운영하는 것도 바로 ‘삼백집’ ‘오백집’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오백집’은 장사가 잘 된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잘 팔리긴 하는데 이문이 남질 않아요. 물가는 오르고 족발 재료값도 오르는데 손님한테 파는 족발 값은 매년 그대로고. 그렇다고 올릴 수도 없고…. 그래도 음식이 변하면 안 되니까 재료는 꾸준하게 받았던 곳에서 같은 걸 받고, 늘 같은 음식 내고….”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오백집모자족발’의 김순애 대표와 둘째 아들 강승철씨와 인터뷰 도중 사진을 찍었다. 김순애 대표 올해 에순여덟 살. 40년 정도의 길지 않은 업력이지만, 꾸준히 수준급의 족발을 내놓고 있다.

-온몽이 아플 정도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자영업자들은 어렵다. 직접 일을 하지 않으면 운영이 되지 않는다. 김순애 대표도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족발은 한 종류. 3만원이다. 물가는 꾸준히 오르고 족발 값을 올리기는 힘들다.

-오백집모자족발

- 고기를 썬 단면이 둥근 것이 ‘앞족’이다. 전지 부분.

족발 맛집 4곳

동광식당_강원도 정선

외형부터 다르다. 썰어서 내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찢어서 내놓는다. 맛은 찢는 쪽이 좋다. 부드럽고 은은한 고기 냄새도 아주 좋다. 황기를 넣었다는 장점이 있다.

김주연왕족발-대구 서남시장

대구 서남시장에는 족발집이 여러 곳 있다. 그중 ‘김주연왕족발’이 유명한 집. 외부 행사가 있을 때 족발을 주문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늘 솥이 끓고 있다.

장가네족발-전주 한옥마을

업력이 긴 집은 아니다. 상당히 촉촉한 족발을 선보이고 있다. 1층과 2층 구조. 젊은 층들이 많이 찾는 집답게 인테리어도 깔끔하다.

평안도족발집과 장충동뚱뚱이할머니집-서울 장충동

족발의 원조다. 두 집 모두 대단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늘 같은 식재료, 같은 맛을 보장하고 있다. 한반도에 널리 족발을 퍼뜨린 공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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