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외식업 3대, 54년 전승… ‘기본’에 새 요리ㆍ방식 더해 ‘새 길’ 열어

창업주 ‘평안냉명’, 2대‘동신면가’, 3대 ‘동신화로’변화ㆍ발전

실향민 부친 호구지책으로 고향서 먹던 냉면으로 가게 열어 성공 운영

2대 박영수씨 대기업 그만두고 가게 이어…떡갈비, 평양막국수 등 신메뉴 호평

아들 외식업 나서, 직화 돼지고기 전문점 ‘동신화로’ 만만찮은 경쟁력 갖춰

일본 식당들의 ‘3대 100년 전승’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래 운영하는 경우가 없느냐고 한탄한다. 한쪽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와 발전은 한국인에겐 동의어다. 한반도 정세는 늘 바뀐다. 바뀌어야 살아남는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음식점 3대가 있다. 3대가 각각의 가게를 운영했고 한다. 메뉴, 운영법도 다르다. 이제 사라진 ‘평안냉면’과 암사동의 ‘동신면가’와 상암동 ‘동신화로’ 이야기다. 3대 54년의 전통이다.

3대 전승, 50년의 업력

창업주인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실향민이었다. 평안도 정주 출신. 남쪽 사람들은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 정주는 시인 백석의 고향이다. 국수를 이야기하면 늘 백석의 시가 소개된다. 정주는 북관(北關)이다. 북관, 서북관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뜻한다. 대 중국 통로다. 한반도와 중국의 외교사절단은 이 길을 이용했다. 중국의 앞선 문물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곳이다. 정주는 그 중 핵심적인 도시다. 음식도 좋고 문화적인 혜택도 일찍부터 받았다.

현재 ‘동신면가’를 운영 중인 2대 사장 박영수씨는 1953년 생, ‘휴전동이’다. 여동생이 하나 있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1917년생입니다. 북에서는 건축 관련 일을 하셨고요. 한국전쟁 전에 북에서 결혼을 하셨지요. 혼자서 피난 와서 어머님하고 다시 결혼을 하셨고요. 어머님은 황해도 출신입니다. 제가 맏아들인데 아버님이 36살 때 저를 낳으셨죠. 그때는 아버님이 대전에서 건축 일을 하고 계셨으니 저도 대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대전에서 보내고 1960년대 초반 아버님이 건축 일을 그만두시면서 동두천으로 이사를 했지요. 아버님이랑 저랑 띠동갑입니다. 36살차이. 아들하고 저도 꼭 36살 차이입니다. 역시 띠동갑이지요. 묘한 인연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향민, 음식점을 열다

1964년, ‘동신면가’ 업력 54년의 시작이다. 피난 온 창업주는 대전을 거쳐 동두천에서 식당 문을 열었다. ‘평안냉면’. 말하자면 평양냉면을 파는 집이었다. 이름을 ‘평안냉면’으로 정한 것은 얼마쯤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평양’이 아니라 ‘평안도’ 식이라는 뜻이다. 장사는 그럭저럭 운영이 될 정도였다.

창업주는 자신이 잘 알던 음식, 평소에 먹었던 음식으로 가게를 열었다. 국수, 냉면은 북에서 매일 보던 음식이었다. ‘내가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 냉면집을 열었다.

냉면은 일제강점기 이미 경성(한양, 서울)을 강타했다. 지금이 평양냉면의 전성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평양냉면 붐’이 있었다.

박영수 대표는 ‘냉면집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 그는 단 한 번도 냉면집을 운영하리라 믿지 않았다. 집안의 분위기도 그랬다. 부모님들은 맏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번듯한 직장 다니길 원했다.

맏아들은 부모님 속을 특별히 썩이지 않았다.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공부를 하고, 부모님들이 원하는 대로 군대를 다녀와서 ‘번듯한 대기업’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그동안 부모님들은 아들의 공부를 위해서 대단한 지원을 했다. 그 열매가 맺힌 것이다.

창업주가 음식점을 운영한 것은 그야말로 호구지책이었을 것이다. 먹고 살려고 운영한 음식점. 아버지는 아들이 음식 장사를 한다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 1980년 무렵, 국민소득이 막 1천불을 넘어서고 있었다.

2대 사장, “아버지, 회사 그만뒀습니다”

말하자면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대기업에 입사,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아들이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조직의 생리라는 게 맞질 않았지요. 현대건설은 마치 군대 조직 같은 곳이니까, 철저한 상명하복을 견디지 못한 겁니다. 재미도 없고. 아버님은 나름대로 기대도 컸겠지요. 아버님도 건축 관련 일을 하셨고 저도 건설회사의 직원이 되었는데, 아버님은 건축 현장이지만 저는 사무직이었으니까. 어머님도 강력하게 반대하셨고, 아버님도 반대하셨죠.”

음식점을 운영하려고 회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음식점 운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아들은 달랐다. 아버지 옆에서 일을 돕던 아들은 1984년 정식으로 가게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창업한 동두천을 떠나 서울 올림픽공원으로 이사를 했다. 업종도 바꿨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따르기로 했다. 냉면집 운영을 지켜보니 역시 고기가 중요했다. 고기를 만져야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먹고 살려고 냉면 집을 했지만 이제 백정 일까지 하라는 거냐?”고 반발했다.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고기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결국 정육점까지 열었다.

이사를 하면서 가게 이름도 ‘동신떡갈비’라고 바꿨다. 이 이름은 2000년, 현재의 암사동으로 이사하면서 다시 한 번 바뀐다. ‘동신면가’.

아들은 냉면이나 국수류보다는 고기로 만드는 떡갈비가 매출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럭저럭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두 번째 이사를 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주 품목이었던 면을 가게 간판에 내세웠다.

‘동신면가’의 메뉴에는 점심특선으로 ‘떡갈비 정식’이 있다. 소, 돼지 떡갈비를 선택할 수 있고 가격은 1만1천원부터 1만9천원까지, 소, 돼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메뉴판의 첫머리에는 ‘평양막국수’라는 묘한 이름의 메뉴가 있다. 평양, 평안, 냉면, 막국수가 뒤섞인 이름이다. 평양냉면과 강원도 산 막국수의 조합 같다는 느낌도 든다.

“올림픽공원 옆 그리고 암사동으로 이사 오면서 냉면, 막국수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우선 ‘평안’이라는 이름은 많이 친숙하지 않으니 평양으로 바꿨지요. 문제는 막국수와 냉면의 혼란스러움입니다. 냉면을 냈더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대체적으로 메밀을 70% 정도 사용하고 여름, 겨울에 따라 밀가루와 전분의 비율을 조정합니다. 당연히 국수 발이 부드럽고 잘 끊기지요. 이게 무슨 국수냐는 항의가 많았어요. 입술로 툭툭 끊기는 정도인데 아직도 가위 찾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냉면도 아니고 막국수도 아닌 그야말로 냉면, 막국수의 혼합이죠.”

아버지가 운영하던 ‘평안냉면’의 냉면을 서울 소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사하면서 냉면이라고 하지 않고 이 지역에서 친근한 막국수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물론 여전히 항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꾸로 ‘이게 무슨 막국수냐, 냉면이지’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요. 결국 이름에 냉면을 연상케 하는 ‘평양’을 붙이고 뒤에는 막국수를 붙였지요.”

‘평양막국수’란 이름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3대 사장, “음식점 장사와 사업형 외식업까지”

2대 박영수 사장은 스스로를 ‘임시직, 알바, 주차요원’으로 부른다.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아 음식점을 운영하기로 했지만 실제 가게 운영을 한 것은 아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 상당부분을 가게 바깥에서 보냈습니다. 외식업 중앙회 일도 했고 대학교에서 외식업 관련 교수 일도 하고, 한때는 백파 홍성유 선생님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돕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음식공부, 음식점 경영 일도 많이 배웠지요. 농담 삼아 스스로 ‘돌아온 탕자’라고 합니다.”

1980년대 후반이니, 박영수 대표가 막 ‘동신떡갈비’의 문을 열었을 때다.

“가게 운영은 아내에게 맡겨두고 바깥으로 나돌았습니다. 백파 홍성유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서 그분을 따라 다녔지요. 술을 좋아하시니까 음식점에 가면 메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드셨어요. 그분 원고 재료인 메모는 상당부분 제가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외식업 중앙회에서 일도 하고,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일도 맡았고. 가게는 어머님, 아내, 여동생이 주로 맡아 했지요. 뒤늦게 돌아오니 남은 일자리가 주차대행이에요. 대표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임시직 주차대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박영수 대표는 부모님들이 반대했던 음식점 운영의 길로 들어섰다. 이제 아들이 또 그 길을 걷는다. 반대하지 않았지만 권하지도 않았다. 아들 스스로 찾아 나선 길이다.

“아버님과 저처럼 꼭 서른여섯 살 차이가 나는 아들이 상암동에서 음식점을 열었습니다. 올해 스물아홉 살인데 저희 세대와는 생각이나 사는 방식이 다르지요. 음식점을 대하는 태도도 다릅니다.”

한때 대중음악 관련 대학을 다니기도 했던 아들 헌웅씨.

“아내 판단이 맞았지요. 국제통상학과에 진학하고, 어느 날 재미없다고, 그만 두겠다고 하고, 또 대중음악 관련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그만두고. 여러 가지 굴곡을 겪을 때마다 아내는 ‘언젠가 자기 일을 찾을 테니 가만히 지켜보자’고 했지요. 아내 말대로 가만히 두었습니다. 2년 정도 알바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식당이었어요. 이자카야, 고기 집 등이었지요. 어느 날 외식업 관련 학과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진학을 하더니 불쑥 음식점을 낸다고.”

서울 상암동의 직화 돼지고기 전문점 ‘동신화로’. 업력이 길고 널리 알려진 브랜드와 맞붙어 조금도 밀리지 않고 가게를 확장하고 있는 아들이 대견하다.

“아들이 늘 아버지는 음식점 장사를 하셨지만, 자기는 외식업 사업을 한다고 해요.”

얼마쯤은 건방진 표현이다. 아버지 박영수 대표는 한때 외식업 중앙회에서 일했고 지금도 신한대학교 외식, 조리 등의 과정을 책임지는 교수다. 그런 아버지에게 20대 후반의 아들이 건방지지만 참 의젓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호구지책부터 사업까지. 한국형 외식업 3대, 54년 전승의 이야기다. 동두천, 올림픽공원 옆, 암사동. 이제 3대 아들이 운영하는 상암동의 ‘동신화로’를 가볼 참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설명

- 주방 앞에서 박영수 대표, 김문자씨 부부가 포즈를 취했다. ‘동신면가’의 안주인이자 총주방장인 김문자씨는 경기도 출신이지만, 황해도 출신인 시어머니에게 북한음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 만두를 빼면 ‘동신면가’의 점심 떡갈비 세트메뉴다.

-2대인 박영수 사장이 고집을 피운 고기 메뉴. 왼쪽이 쇠고기 떡갈비, 오른쪽이 돼지고기 떡갈비다.

- 냉면, 막국수를 놓고 혼선이 있었던‘평양막국수’

- 메밀 70%의 국수가락을 만든다. 여름, 겨울에 따라 밀가루와 전분 함량이 달라진다.

[떡갈비 맛집 4곳]

해남천일관-서울 역삼동

일일이 칼로 다져서 만드는 떡갈비가 수준급이다. 믹서 기 등으로 만드는 요즘의 떡갈비와는 달리 예전 방식대로 일일이 칼로 고기를 다진다. 고기 입자, 맛 모두 다르다.

송월관-경기도 동두천

떡갈비 전문점으로 업력도 길다. 1945년 창업, 이미 70년을 넘겼다. 쇠고기 여타 부위의 살이 아니라 순수한 갈비살만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통식당-전남 담양

담양읍내에서 소쇄원 가는 방향에 있다. 떡갈비를 비롯하여 음식 대부분이 정갈하다. 홍어 등 호남의 음식들을 내놓는다. 반찬 종류나 짜임새가 수준급이다.

완주옥-전북 군산

떡갈비 위에 마늘을 얹은 모습이 특이하다. 맛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내놓는 모양도 아주 좋다. 군산의 유명한 떡갈비 중 하나. 노포다. 군산여행 시 필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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