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력 50년의 제대로 된 ‘집밥’…밥ㆍ반찬 근간으로 ‘우리 밥상’ 모범 보여

1966년 이전 문 열어, 사돈 운영하던 실비형 밥집 물려받아

쌀부터 각종 반찬에 정성… ‘김치찌개 무제한 리필’등 트레이드마크

아는 사람들 다시 찾는 평범하나 진정성 갖춘 우리 시대 가정식 백반집

사무실이나 집 가까이 있으면 매일 가겠다, 싶은 집이 있다. 대단한 반찬도, 진귀한 식재료도 아니다. 그런데 맛있다. ‘집밥’이다. 가정주부들은 더 정확하게 본다. 인천의 ‘명월집’. 이름이 술집 같다. 그런데 가정식 백반집이다. ‘명월집’의 남영신 대표를 만났다. 업력 50년, ‘명월집’의 역사를 듣는다.

‘명월집’ 1966년 이전 문을 열었다

처음 ‘명월집’의 문을 연 것은 남영신 대표의 사돈댁이었다.

“시누이네 시어머니가 처음 문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김복래 할머니라고 들었고요. 1966년 이전에 이미 장사를 했는데 영업등록을 1966년에 하셨고요. 버젓한 식당은 아니고 남의 집 처마 밑에 좌판을 깔고 옹색하기 짝이 없는 장사였겠지요. 저는 한참 후에 가게를 인수했지요.”

사돈댁이다. 아이들에게는 고모 집, 고모부 집이다. 아마도 이북 출신이었던 듯. 그 당시 대부분의 좌판식 식당들이 잔술과 실비형 음식을 내놓았다. 서민들을 위하여 막걸리 잔술도 팔고, 소소한 국물과 음식을 내놓는 좌판.

1960년대 초반 국민소득이 겨우 100달러였다. 누구나 배가 고팠다. 음식점으로는 좋은 자리였다. 인천시청이 가깝고 시청과 관련 있는 크고 작은 사무실들이 많았다. 연안부두도 멀지 않았다. 당시는 인천의 중심이고 상업지역의 중심이었다.

시골 소녀, 서울로 상경하다

남영신 대표의 고향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이다. 경주에서도 멀고, 포항에서도 먼 곳이다. 안강에서 여학교를 다녔다. 3남5녀의 맏딸, 아버지는 평범한 시골 농사꾼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시골에서 ‘곡물 중개상’을 했던 듯하다.

“여러 마을을 합쳐서 행정 관리하는 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의 이장이나 동장처럼. 동네 사람들이 ‘구장님’이라고 불렀어요. 집안에 늘 다른 사람들이 수확한 곡물들이 쌓여 있었어요. 사람들이 와서 그 곡물을 가져가면 돈을 받았다가 곡물 주인에게 대금을 주고. 아마 중개상 같은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낭만적 시대의 시골이었다. 시골버스가 손님을 기다려 주던 시절. 여학교 다니던 남 대표도 자신을 기다려주는 버스와 버스 차장 아가씨가 있었다. 여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서울로 가는 꿈은 4촌, 6촌 오빠들, 친척 아저씨들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방학 때 시골로 오는 서울 사는 친척 오빠들과 아저씨뻘 어른들을 보면서 “서울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안이 그리 넉넉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아버지 어깨가 참 무거웠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골에서 저희 남매들 공부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요. 오빠 둘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동생들도 중학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고. 지금도 어머니가 논밭에서 힘든 일을 하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맏딸이 빨리 학교를 마치는 것만 해도 집안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영등포 사시는 친척 아저씨가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불쑥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970년 언저리의 일이다. 남 대표가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았을 무렵 바로 취직이 되진 않았지만 친척 아저씨 덕분에 보름 정도가 지난 후 취직이 되었다.

완제품 검수하는 일을 하다

흔히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을 두고 “손끝이 맵다” “눈매가 맵다”고 표현한다. 일을 매섭게 잘 해낸다는 뜻이다.

1970년대 중반, 남 대표는 ‘손끝과 눈매가 매운’ 사람이었다.

당시 효성그룹도 방직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날, 효성의 부장 급 간부가 남 대표를 찾았다. 그는 “혹시 효성 대구 출장소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그녀의 봉급은 1만7000원. 대뜸 봉급을 많이, 5만 원 정도 달라고 했다. 현재 봉급의 3배를 달라고 하니 이야기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년 반쯤의 세월이 흘렀다. 그 간부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대뜸 “대구출장소로 가서 근무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봉급을 맞춰 주겠다”는 말을 믿고 대구로 내려갔다. 현지 근무자들이 수군대는 모습이 보였다. 첫 달 봉급을 받았더니 4만2000원이었다. 현지 근무자들 중 상급자들도 그녀만큼 많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그때 제가 했던 일이 완제품 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기계라인에서 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불량품을 가려내는 일이었습니다. 꼼꼼하고 성실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체크하지 못하면 불량품이 출고되니까. 외국 수출품도 많고, 마지막 검수가 굉장히 중요했지요. 검수 인력들이 제법 높은 대우를 받았지요.”

음식도 다를 바 없다. 음식은 주방 실장 혹은 주인의 의도에 따라 다르다. 간이 싱겁거나 짠 경우 최종적인 ‘검수’는 손님이 하는 셈이다. 문제는 손님들에게 잘못된 음식이 자주 전달되면 가게는 점차 망가진다. 최종 조율하고, 검수하는 것은 주방실장 혹은 주인이다.

결혼하다, 인천으로 오다

친척들의 소개로 전기 일을 하던 남편과 결혼했다. 전기 기술자이니 평생 밥은 굶기지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 남편은 성실했다. 일흔 살 언저리까지 일을 하고 지금은 쉬고 있다.

‘명월집’을 인수, 운영한 것은 결혼 때문이었다. 남편의 고향이 인천이어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여전히 ‘검수 기술자’를 찾는 이들은 있었지만 결혼 후 가정살림에만 몰두했다.

‘명월집 인수’가 우연히 닥친 것은 아니었다. 집안 살림을 하면서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1남1녀를 두었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고모, 고모부 집에 자주 놀러갔습니다. 남편한테는 매형네죠. 그때는 예전 제일은행 옆에 ‘명월집’이 있었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시누이가 어른들한테 가게를 물려받아서 운영하고 있었고요. 15평쯤 되는 가게에 늘 손님이 꽉 차 있었죠. 시누이한데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지요. 나중에 가게 그만둘 때 되면 저한테 물려주라고.”

오래지 않아, 거짓말처럼 사돈끼리 가게를 물려주는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 왜 사돈한테 가게를 물려주었냐고 물어봤더니, “제(남 대표)가 시골 출신이라서 힘들어도 가게 운영을 잘 할 것 같아서 물려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로부터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명월집’ 역사의 절반이다. 그동안 15평 가게에서 서른 평 넘는 가게로 이사도 했다.

반찬에도 사연이 있다

매년 김장을 4000포기씩 한다. 예전의 일이다. 어쩌다 보면 더운 기후 등으로 김치가 푹 익는 경우가 있다. 신 김치를 내놓을 수 없으니 돼지고기 숭숭 썰어 큰 냄비에 신 김치를 넣고 연탄불 위에 올려놓았다. 마음대로 퍼갈 수 있게 했다. 연탄불은 풍로로 바뀌었다. ‘명월집’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김치찌개 무제한 리필’의 시작이었다. 배추가 비싼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풍로에 밥을 하다 보니 누룽지가 많이 생겼다. 배가 고팠던 시절의 이야기다. 누룽지에 물을 붓고 풍로에 올려놓았다. 고봉밥을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손님들이 후식으로 내놓는 누룽지를 한 그릇씩 비웠다. 역시 지금도 밥상에 남아 있는 누룽지의 시작이다.

반찬들 하나하나가 모두 스토리가 있다. 7000원 밥상에 나오는 계란말이가 정교하다.

“시누이가 가게를 운영할 때 시누이 시어머님 되시는 분이 며느리 돕겠다고 계란말이는 해줬습니다. 제가 할 때도 마찬가지로 시어머님이 계란말이는 만들어주셨지요. 이젠 연세가 많으시니 못합니다. 다만 그 전에 솜씨 있는 노인 분들이 하신 그대로 해내고 있습니다.”

방송 후, 손님들이 몰리면서 국을 줄였다. 김치찌개가 대신했다. 조만간 국을 ‘부활’시킬 것이다. 한식 밥상에는 역시 밥과 국이 있어야 한다.

결국은 사람이다

생선을 팔러 오는 할머니가 계셨다. 생선을 이고 왔다가 ‘명월집’에서 많이 팔고 나면 잠시 쉬어가곤 했다. 늘 자신의 생선을 팔아주는 가게가 고마워 설거지 등을 돕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시간제 알바’가 되었다. 결국 정식으로 취직을 해서 주방에서 일했다.

쌀은 지금도 당진에서 1주일에 한번 찧어서 배달한다. 부자 2대가 ‘명월집’에 쌀을 공급한다. 부자 모두 성실하고 정직하다. 쌀은 믿고 당진에 맡긴다. 여름철이면 아무래도 쌀이 좋지 않다. 보관기간이 길어지니 밥을 해도 맛이 덜하다.

“한여름에는 아예 쌀에 찹쌀을 조금씩 섞어서 보내줍니다. 당진 쌀로 밥을 지으면 윤기가 나고 기름기가 흘러요. 젊은 총각인데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서 열심히 하고 있지요.”

한때는 밥 짓는데 하루 쌀 두 가마니를 썼던 적도 있었다.

“업력이 길고 꾸준히 음식을 지키니 예전에 오셨던 분이 뜸하다가 나타기도 하고, 외국 생활 오래 하다가 귀국한 분이 급한 일 다 미뤄두고 여기부터 들렀다고 하기도 하고. 장사하는 이들은 늘 남는 것 없다고 한다는데, 저는 얼마간 남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보다는 못하지요. 작년, 올해는 저도 어렵습니다.”

결국은 사람이다. 하찮은 밥상이지만 지방에서 온 손님이 간만에 ‘명월집’ 밥을 배불리 먹고 행복한 표정으로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는 일이 즐겁다.

가정 밥상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밥상을 살리고 싶다. 비싼 고사리 반찬을 고집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무 골지를 반찬으로 내는 까닭이다. ‘명월집’ 주인 노릇. 참 괜찮은 일이다.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싶다. 며느리가 “하고 싶다”고 하니 퍽 다행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1966년 문을 연 ‘명월집’. 현재 남영신 대표는 3대째인 셈이다. ‘명월집’ 역사 50년 중 반은 그녀가 채웠다.

-‘명월집’의 밥상. 정식 반찬이 아닌 ‘밑반찬’이 모두 11종류다. 계절별로 밥상의 구성은 달라진다. 가격은 7000원.

-7000원 밥상에 고사리가 오른다. 뒤에 꽁치조림과 무한리필 김치찌개가 보이다.

-생물 꽁치를 사와서 주방에서 일일이 손질하고 조림을 한다.

-식탁 9개 놓인 식당에서 하루 손님을 300명씩 받았다. 방송 직후에는 하루에 500명이 모였다.

[백반 맛집 4곳]

욕쟁이할머니집

경기도 포천에 있는 오래된 백반 전문점. 욕쟁이 할머니가 계셔서 ‘욕쟁이할머니집’이다. 백반에 불고기나 두부 등을 추가로 주문, 밥상을 차릴 수 있다. 된장이 좋다.

우리옥

강화도의 오래된 백반 전문점이다. 백반만 주문해도 계절 별로, 미역국, 비지찌개, 꽁치조림, 조개젓갈, 순무 등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병어회, 갈치조림 등을 더할 수 있다.

전라도백반

경기도 수원에 있는 백반 전문점이다. 손님들은 대부분 ‘간장게장백반’으로 기억한다. 백반 밥상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잘 담근 간장게장을 백반에 더했다. 반찬들이 좋다.

호남식당

서울 마포의 외진 골목에 있다. 백반 전문점인데 반찬 하나를 더할 수 있는 구조다. 돼지불고기, 갈치조림, 조기찌개 등을 주문하면 된다. 조금 짠 반찬들이지만 푸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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