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 그 이상의 정통 사누키우동… 저렴하나 질 높은 ‘새로운 우동’ 꿈꿔

日‘야다마야’에서 8년 공부…형제가 빚는 고품질 우동 유명세 타

수타우동 섬세하고 따뜻, 기계식과 섞어 일반도 즐기는 ‘새 우동’ 모색

따뜻한 한국식 우동, 새로 오픈할 ‘우동가게-당산동이야기’에서 만날 예정

‘사누키우동’은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사누키’는 일본 시코쿠(四國)섬 가카와 현(香川 懸)의 옛 이름이다. ‘사누키우동’은 ‘가카와 현 방식의 우동’이라는 뜻이다. 면발이 굵고 탄력이 강하다. 일본인들은 “사누키우동은 마치 떡국 같다”고 표현한다. 한반도 상륙 20여년. 짧은 기간에 사누키우동은 한반도에서 ‘일본우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통 사누키우동을 내놓는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우동’을 꿈꾸고 있는 서울 합정동 ‘교다이야’의 이계한 대표를 만났다.

개업을 준비하고 있는 '우동가게_당산동이야기'의 이계한 대표. 분당 '야마다야'의 주방을 거쳐 형과 같이 '교다이야'를 창업, 목동, 영등포구청역, 합정동을 거치며 사누키우동 명가를 만들었다.

교다이야? 형제가 하는 가게

“서울 목동에서 처음 ‘교다이야’를 낼 때 형하고 같이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먼저 사누키우동 공부를 했으니까 그때는 제가 형을 가르치는 입장이었지요. 그동안 목동에서 영등포구청역으로 그리고 지금의 자리인 합정동까지 두 번 이사를 하고 세 군데에서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늘 형하고 같이 했지요. 가르치고 배우고, 일을 나눠서 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지난해부터 형한테 합정동 가게를 넘겼습니다. 형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젠 온전히 형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산동에 자그마한 가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15평 정도 됩니다. 요즘도 바쁠 때는 형네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알바’입니다. 형이 잘 합니다. 형 나름대로의 우동을 만들고 있습니다. 음식은 저랑 좀 다르지요. 면발의 탄력도나 육수 내는 것도 얼마쯤은 다릅니다.”

장유에 비벼먹는 사누키우동

이계한 대표는 “그건 형의 길”이라고 했다. 이계한과 형 이계성 씨. 두 살 터울이다.

목동에서 우동 가게를 낼 때, ‘교다이야’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도 바로 두 형제가 운영을 했기 때문이다. ‘교다이야’는 ‘兄弟屋(형제옥)’이다. ‘옥’은 가게, 집 등을 뜻하니 결국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라는 뜻이다.

“형제는 가족을 뜻합니다. 저희는 형제 둘밖에 없습니다. 크게 싸우지도 않았고, 비교적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 가게 이름을 형제옥이라고 지었고, 한편으로는 가게에 오시는 손님들을 가족처럼 대하겠다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사누키우동 중 자루우동

형제는 우동을 만들었다

굴곡이 없는 삶은 없다. 이계한 대표도 마찬가지.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겪었다. ‘사누키우동을 아주 잘 만지는 사람’으로 이름났지만,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 이야기를 해보면 ‘나이에 비해 속이 깊고, 편안한 사람’이다.

고향은 전북 무주, 깊은 산속이다. 부모님이 제법 부농이었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전으로 유학도 떠났다. 어머니가 두 아들의 대전 유학 뒷바라지를 했다.

호텔리어가 되고 싶었다. 관광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아무래도 일본 유학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오던 시절이다. 호텔, 여행, 관광 등에는 일본어가 필수였다. 일본어를 배우든 호텔 경영을 공부하든 일본유학은 필요했다. 마음속으로 와세다 대학을 꿈꿨다. 그러나 당장 와세다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이시가와 현의 자그마한 단기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어 공부도 하고, 와세다 대학에 진학 준비하는 ‘다리’쯤으로 생각했지요.”

불행히도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본업인 농사보다 조합장, 의회 의원 등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였다. 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여행사에 들어갔습니다. 크게 재미있는 직장생활은 아니었습니다. 호텔리어가 되고 싶었는데 그것도 힘들어졌고. 어린 시절부터 음식에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니 일본에서 먹었던 우동도 생각이 나고요.”

운이 닿았다. 지금도 유명한 사누키우동 가게, 경기도 분당 ‘야마다야’의 주인이 이모부 친구였다. 그 연줄로 ‘야마다야’에 들어갔다.

“주방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스물네 살 무렵이었는데 우동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하나씩 배웠습니다. 고맙지요. 꾸준히, 모두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휴가 때는 일본에 있는 ‘야마다야’ 본점에 가서 면발 공부를 했고요. 나중에 제 가게 문을 열기 전에 3개월 동안 우동 면 만드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야다마야’에서는 8년 동안 일했다.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사누키우동은 쫄깃한 면발이 특징이다. 일본인들은 마치 떡국 같다고 표현한다./

“가게와 사이가 나빴거나 불만이 있어서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제 가게, 제 방식으로 손님들을 대하는 그런 공간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당시 봉급과 지금 버는 걸 비교하면 오히려 봉급 받았을 때가 나았겠지요.”

손님들이 기다리는 것이 불편했다

가게를 그만 둔 구체적인 이유를 캐물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손님들이 줄을 서면, 식사를 하는 이들도 불편하게 여긴다.

두 번째 가게인 영등포구청역의 ‘교다이야’에서도 손님들이 20∼30명씩 가게 바깥에서 기다렸다.

“가게를 촬영하겠다는 제안이 많았습니다. 손님이 적당히 찾아오실 때였습니다. 장사로 치면 고만고만하게 잘 되는 정도였고요. 가게가 20평 남짓이었는데 형과 제가 일을 해내기 딱 좋을 정도였습니다. 방송 출연하라고 하는데 거부했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 슬쩍 찍어서 방송에 내보냈습니다.”

줄이 수십 미터 쯤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100명씩 되는 날도 있었다. 못 견딜 상황이었다.

“돌아가시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고, 멀리서 왔다고 하고.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우동을 많이 마련한다 해도 부족하고, 저랑 형이랑 둘이서 해내기엔 벅차고,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유명 프로그램 작가들이 여러 차례 출연을 졸랐다. 결국 “방송 출연은 하되, 가게는 방송에 내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출연했다.

“방송 소개되고 손님이 늘어나면 돈 많이 벌고 좋지 않으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진 않습니다. 우동집은 1∼2년 정도만 잘 운영하면 단골이 생깁니다. 일주일에 꼭 한두 번 오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야 가게가 오래, 잘 운영되지요. 방송 보고 오는 사람들 중 단골이 되는 분들은 그 숫자는 적습니다. 복잡하면 단골들이 불편하게 여깁니다. 반짝 손님보다는 적은 숫자의 단골이 낫습니다. 단골들을 위해 꾸준하게 음식 준비하는 것이 낫습니다.”

수타우동에는 섬세함과 따뜻함이 살아 있다

수타우동은 따뜻함이 있다. 섬세함도 있다. 기계는 정확하지만 차다. 잘 만든 기계 우동은 수타우동을 넘어선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사누키우동 중 찌구다마붓가케 우동. 비벼먹는 우동으로 계란 등이 더해진다. 장유와 더불어 맛있는 소금을 더해도 좋다./2017-09-22(주간한국)

최근 합정동 ‘교다이야’에 우동 반죽하는 이가 새로 들어왔다. 여자다. 사람들은 “힘든 일을 여자가 해낼까?”라고 하지만 여자가 오히려 낫다. 일본 만화의 우동 이야기에는 늘 나이든 할머니와 운동선수가 등장해서 면 반죽 내기를 한다. 운동선수들은 힘으로 반죽을 한다. 할머니는 그저 조몰락조몰락 반죽한다. 나중에 우동을 썰면 할머니의 우동가락이 더 쫄깃하고 낫다.

“여자들은 느리고 약하지만 꼼꼼하게 반죽을 합니다. 족 반죽을 할 때도 여자들은 꼼꼼히, 천천히, 치밀하게 밟습니다. 힘이 약하니까 아무래도 여러 번, 천천히 하지요. 그게 남자들이 힘으로 반죽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기계도 마찬가집니다. 더 정확하고 꼼꼼하게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나중에 반죽을 잘라보면 사람이 만진 반죽이 더 촘촘하고 균일합니다. 기계는 정해진 대로 할 뿐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기계 반죽 속에는 빈 공간, 기포도 있고, 수분과 밀가루가 제대로 섞이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수타로 반죽하는 것이 더 섬세하고 따뜻합니다.”

다시 꿈꾸는 ‘우동가게’

그럼에도 그는 기계우동을 내놓는 가게를 해볼까, 라고 준비하고 있다. 가게 자리도 얻었고 10월 중하순에는 문을 열 생각이다. 아직 내부공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바깥에는 가게 문패를 붙였다. 큰 글씨로 ‘우동가게’라고 쓰고 오른쪽 아래에 조그맣게 ‘당산동 이야기’라고 썼다.

시골출신이다. 시골에는 정미소, 이발소, 양조장, 구멍가게, 어물전, 전파상 등이 있다. 특별한 가게 이름이 필요치 않다. 구멍가게는 하나밖에 없으니 별도의 이름이 필요 없다. 그저 구멍가게다. 전파상도, 정미소도, 이발소도 마찬가지다.

영등포구청역 부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동네 손님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늘 마음 에 걸렸다. ‘동네 우동가게’이고 싶었는데 외지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합정동도 마찬가지. 동네 사람들도 왔지만 지방 사람들, 홍대에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인건비를 줄여야 하니까, 기계식과 수타를 섞을 생각입니다. 대신 우동 값을 4000천 원대로 낮추고요. 가격이 비싸면 동네 분들이 오시기 힘들지요. 동네 ‘우동가게’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가격이 싼 우동, 그럼에도 먹을 만하고 제대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우동은 일본 음식이다. 김치는 한국 음식이다. 김치는 일본으로 건너가 ‘기무치’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수출도 썩 잘 하고 있다. 한국에 온 우동이 일본 기무치보다 못할 리 없다. 한국식 우동, 한국 서울의 당산동 사람들이라고 제대로 만든 우동을 먹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우동가게_당산동이야기'의 외부 모습. 아직 내부공사 중이지만, 외부는 거의 완성됐다./2017-09-22(주간한국)

꿈을 꾸고 있다. 꿈은 한국사람인 그가 만드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국식 우동이다. 그 꿈은 목동, 영등포구청역, 합정동을 거쳐 당산동에 닿았다. 조만간 우리는 한국사람이 만드는, 따뜻한 한국식 우동을 ‘우동가게-당산동이야기’에서 만날 것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일본우동 전문점 4곳]

우동일번지-경기 수원

수원에서도 외진 ‘호매실’ 지역에 있다. 외곽 지역이다. 벽에 방송출연을 하지 않는다고 써 붙였다. 단골들이 상당수다. 기계면임에도 사누카우동을 제대로 보여준다.

겐-경기 성남 분당 야탑

재일교포 3세인 전직 야구선수 출신의 박봉수 대표가 일본 본토의 우동을 보여준다. 아버지 대 때부터 우동을 만들었으니 2대 전승인 셈. 교대역에도 직영 우동집이 있다.

댕구우동-서울 마포구 동교동

한국에 일본 사누키우동을 처음 알린 공로가 있다. 한때 ‘일본 카가와 현의 한국 홍보대사관’이라는 별칭도 사용했다. 가장 대중적인 사누키우동이다.

가미우동-서울 홍대지역

홍대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자그마한 우동집이다. 단골이 아주 많은 가게.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야 한다. 일본 전통 우동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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