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빚은 북한식 만두 고수… ‘전국구 맛집’ 유명세, 더 나은 음식 노력

대를 이은 만두 전문… ‘어머니의 음식’ 되살려 전문화

아침에 빚은 만두 당일만 판매… 만두전골, 빈대떡 ‘각광’

손님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두부전골. 가게에서는 두부전골이라고 부르지만 몇몇 손님들은 여전히 어복쟁반이라고 부른다. 김명원 대표는 '유통이 빠진 어복쟁반은 없다'는 입장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다. 광화문 ‘평안도만두집’. 열다섯 평 쯤 되나 싶은 좁은 공간. 이른바 ‘전국구 맛집’ 중 하나다. 여의도에서 유명했던 집이다. 광화문으로 왔다.

북한식, 평안도식 만두를 내놓는다. ‘어복쟁반’은 말이 많다. 정작 식당 측에서는 ‘만두전골’이라고 부른다. ‘평안도만두집’의 주인 김명원, 방혜숙 부부를 만났다.

접시만두라고 부르는 북한식찐만두다.
만두전골인가, 어복쟁반인가?

가게에서는 메뉴판에 분명히 ‘만두전골’이라고 적어 두었다. 손님들 중에는 ‘평안도만두집의 어복쟁반’이라고 말한다. 내용물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고, 인터뷰 전에 ‘만두전골’을 청했다.

각자 덜어먹는 앞 접시가 나왔다. 손으로 앞 접시를 잡아본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뜨겁게 보관하던 그릇이다. 세심한 배려. 작은 가게가 널리 유명해진 것은 이유가 있다. 사소한 일인 것 같아도 이런 작은 배려가 소비자, 손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복쟁반이나 만두전골 모두 만두가 주인이다. 만두전골에는 만두가 여섯 개 들어 있다. 생선전도 눈에 띈다. 동태전이다. 동태전 만으로도 요리 한 접시가 된다. 그런데 무심하게 만두전골에 들어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이 가게에서는 미리 동태 전을 만들어 두었다가 만두전골에 넣는다.

1인분 만둣국이다. 왼쪽은 빈대떡
'평안도만두집'의 만두 속이다. 두부, 숙주, 돼지고기 등이 들어간다. 담백한 맛이다.
“녹두로 만들지 않으면 빈대떡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월남한 이들은 늘 이 부분이 불만이다. 녹두와 곱게 간 돼지고기를 섞어서 푸짐하게 부쳐야 녹두전, 빈대떡이다. 녹두만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빈대떡의 주인공은 녹두다. 불행히도 녹두가 아니라 각종 빵가루, 부침개 용 밀가루 등을 사용한 빈대떡이 많다.

‘평안도만두집’에는 별도의 빈대떡 메뉴도 있지만 만두전골에도 작은 빈대떡을 넣는다. 역시 녹두로 작은 전을 미리 부쳐 두었다가 사용한다.

‘배추 잎사귀’도 재미있다. 김치다. 김치의 고춧가루를 털어내고 물에 곱게 빤 것이다. 김치의 곰삭은 맛은 취하되, 매운 맛이나 여러 가지 다른 맛들은 덜어낸 것이다.

‘만두전골’에 기울인 정성이 놀랍다.

어복쟁반에는 원래 유통(乳筩)을 사용했다. 유통은 암소의 젖가슴 살을 이른다.

“특이한 맛이 있지요. 유통의 맛과 향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지만 원래는 유통을 썼습니다. 제대로 어복쟁반을 만들어 보려고 유통을 알아봤더니 큰 덩어리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복쟁반이 아니라 만두전골로 만족해야지요.”

유통 대신 쇠고기를 사용한다. 양지살이다. 곱게 찢어서 사용한다. 고소하면서 담백한 맛이 있다.

오른쪽은 동태전이고, 왼쪽은 작게 빚은 빈대떡이다. 모두 만두전골에 들어간다.
어린 시절 신당동에서 먹었던 어머니의 음식

“사업을 하다가 그야말로 쫄딱 망했지요. 돈이 하나도 없으니 당장 살 집이 문제였지요. 창피하지만 어머니 집에 얹혀서 살았습니다. 어머님께 얼마간의 돈을 빌려서 장사랍시고 여의도에 작은 만두가게를 냈습니다.”

호구지책. 1992년, 여의도에서 한때 유명했던 ‘평안도만두집’의 시작이다.

“평소에도 휴일에는 제가 가족들 음식을 만들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만두는 잘 빚었습니다. 물론 집안에서 해먹는 음식이랑 식당의 음식 만들기는 전혀 다릅니다. 가게 문을 열고나서 무척 고생했습니다. 처음에는 만두를 세 판 정도 찌면 한 판만 그럴 듯하고 두 판은 망가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작은 가게고 손님들이 무던하게 기다려주시곤 했으니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퍽 고마운 분들입니다.”

부모님들의 고향이 모두 북쪽이다. 고 김영린(1914년 생) 씨와 이옥진(1923년 생) 씨. 아버지는 평북 용천 출신이다.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지만 중국 천진 출신이다. 부모님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나서 결혼했다. 특이한 만남이다.

만두전골. 만두, 양지살, 김치를 물에 행군 것, 대파, 떡국 등이 들어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 선생님이 중매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신당동에 살 때 저의 집에 자주 놀러오셨습니다.”

권기옥(1901∼1988년) 씨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자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다. 평양 출신.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석방 뒤 국민정부 군정부본부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권기옥 지사는 두 사람을 중매하여 결혼에 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귀국한 김영린ㆍ이옥진 부부가 서울 신당동에 살 때도 자주 찾았고 인연을 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저도 잘 모르지만, 아버님은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은밀한 심부름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백범일지’에도 그 내용이 남아 있고요.”

“백범일지”에는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나는 그 길로 조상섭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에게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홍코우 공원 거사 직전, 백범은 도산 안창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곧 무슨 일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검거될 듯 하니 피신하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도산이 사는 집에 전한 사람이 바로 김영린 씨다.

“부모님은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해 신당동에 자리 잡으셨습니다. 아버님이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귀국한 후에 태어났고요. 제가 어렸던 시절 신당동 집에는 늘 손님들이 들끓었습니다. 아버님이 중국 상해에 계실 때 만년필 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부유했지요. 독립운동에 자금도 내놓으셨다고 들었고요. 귀국하신 후에도 주말마다 손님들이 집에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토요일에는 많은 분들이 모여서 신당동 집에서 마작을 하면서 노셨고요. 집에 직접 짜서 만든 마작판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주말에 마작하러 놀러 오시는 손님들 음식상을 늘 차려냈고요. 지금 생각해봐도 음식이 참 정갈하고 맛있었습니다. 제가 사업이 망한 후 여의도에서 선뜻 만두 전문점을 냈던 건 어린 시절 신당동에서 어머님이 차려내신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안도만두집'의 김명원 대표. 올해 예순아홉살로 요즘도 새벽 5,6시 무렵 가게에 출근해 그날 사용할 만두를 직접 빚는다.
여의도에서 시작, 일산 거쳐 서울 광화문으로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은 자리를 잡았다. 식사시간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같은 건물 내 좀 더 넓은 장소로 옮겼다. 손님들은 점점 늘어났다. 이쯤에서 ‘현상유지’를 택해야 했다.

가게를 일산으로 옮겼다. 음식 내용도 바꾸었다. 만두가 아니라 중국음식. 부모님들은 중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북한음식뿐만 아니라 중국음식에도 익숙하다. 신당동에서도 손님들에게 북한음식뿐만 아니라 중국음식도 내놓았다. 부모님들이 손님에게 접대하던 음식. 어린 시절 먹었던 그 중국음식을 선보이고 싶었다.

“제가 음식을 만들 줄 모르니 주방에 중식 조리사들을 채용했지요. 어머님에게 들은 풍월을 종업원들에게 들려주고, 그대로 만들자고 했지요.”

대실패였다. 조리사들은 자신들이 그간 만들었던 음식이 아니니 거부했다. 건성으로 만들었다. 신당동 시절 어머니가 내놓던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정성어린 음식들이었다. 조리사들은 제대로 정성을 쏟지 않았다. 마지못해 흉내만 냈다.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었다. 손님들은 발길을 끊었다. 가게가 텅텅 비는 날이 많아졌다.

“문 열고 나서 오래지 않아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버틸 재간이 없지요. 임대료도 밀리고 보증금까지 까먹는 상황이었으니까요.”

2005년, 지금의 광화문 ‘평안도만두집’으로 옮겼다. 음식도 중식 아니라 북한음식, 그중에서도 만두로 되돌렸다. 일산 가게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게 문을 닫았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당장 가게 비품 등 짐을 옮길 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광화문 ‘평안도만두집’ 자리를 정한 후, 주방 설비를 하나하나 옮겼다. 현재 ‘평안도만두집’의 주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설비의 상당수가 일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이제 아내가 가게로 나옵니다. 저 혼자서 하기 벅차니까. 저는 아침 5시, 6시 무렵에 출근해서 만두를 빚습니다. 오후에는 1시 무렵에 일단 퇴근했다가 오후 5시 무렵에 다시 출근합니다. 붐비는 점심시간이면 같이 있다가 한가해지면 교대하는 식이지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가게에서 직접 빚은 만두를 씁니다. 그 전날 만두를 만들면 마르기도 하고 맛이 달라집니다. 이른 아침에 빚은 만두를 당일에만 팝니다. 만두가 다 팔리면 더 이상 음식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광화문에서도 10년을 넘겼다. 변하지 않고 꾸준히 같은 방식으로 음식을 내놓는 것은 놀랍다.

'평안도만두집' 입구
다행히 둘째 딸이 평안도 만두를 물려받고 있다

둘째 딸이 가게에 나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음식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음식은 닮았다. ‘신당동 시절’의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게를 하지 않았지만 가게 음식보다도 더 깊은 정성을 기울였다.

만두는 가게에서 직접 만들어야 한다. 가게를 시작한 후, 아무리 힘들더라도 단 한순간도 만두를 사다 쓰자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는 아내와 교대하는 식으로 운영하고 가게가 작으니까 근근이 버티는데 딸아이는 언젠가 혼자서 해야 할 테니까 새벽부터 만두 빚고 하루 종일 근무할 수는 없지요. 건물 내에 작은 공간이라도 있으면 구할까, 생각 중입니다. 딸아이가 오전에 만두 빚고 점심부터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습니다. 어머니 음식, 그리고 제가 만들었던 음식보다 더 나은 음식을 만들겠지요. 지금은 둘째 딸아이가 스스로 그런 음식 내놓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북한식 만두 맛집 4곳]

이북식만두국밥
대중적인 만둣국 전문점이다.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 있다. 골목 안 허름한 식당이지만 독특한 만둣국을 내놓는다. 만두가 크다. 국물에 만두와 밥을 말아먹는 방식이다.

목동 개성집

목동개성집
만두와 빈대떡 등이 유명하다. 수육도 좋다. 만두가 상당히 크고 단단하게 들어간 만두소도 좋다. 식사와 술자리를 겸할 수 있는 음식들이다. 2대 전승되고 있다.

반룡산
북한, 그중에서도 함경도식 전문음식점이다. 가릿국밥(갈비국밥)으로 유명하다. 동해안 해안가의 가자미식해 등도 추천할 만하다. 함경도식 농마국수도 내놓는다.

개성만두궁
인사동 토박이로 업력도 제법 긴 편이다. 개성식 조랑이 떡국, 만두가 유명하다. 북한식 만두로 비교적 큰 크기다. 양도 푸짐하다. 밑반찬 등도 정갈하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