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역사, 피순대로 유명세… ‘맛’과 ‘정성’으로 업력 쌓아가

막걸리 좌판에서 순대국밥 전문으로…맛과 후한 인심으로 손님 줄이어

어릴적 먹었던 피순대 특화, 널리 퍼져… ‘조미료 없는 순대’ 고수해

'정순순대'는 업력 45년을 넘겼다. 한시동 박정순 부부가 순대를 만든 세월이 합산 100년에 가깝다.
순대는 서민적인 음식이다. 힘든 시절, 순대는 우리 곁에서 보양식 노릇을 했다. 서울도 아닌 지방, 전북 익산에서 순대로 50년 가까운 업력을 쌓았다.

밥은 하늘이고 더불어 나누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는 더러 밥값도 받지 않고 순댓국 한 그릇을 내놓았다. 익산의 구도심, 중앙시장 부근 ‘정순순대’의 한시동· 박정순 부부를 만났다.

피순대, 허드레 고기와 .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전남 강진으로 그리고 익산으로.

가난의 역사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남편 한시동 씨. 이제 일흔의 아내 박정순 씨.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곧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가난의 그림자는 길다. 힘들게 도망쳐도 그림자는 따라다닌다. 빨리 가면 그만큼 빨리 따라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또 그만큼 느리고 짙게 따라온다. 참 질기다.

가난한 시골 살림.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사방 천지에 가난한 이들 천지. 소녀 박정순은 부안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열예닐곱의 나이, 어린 소녀는 강진으로 건너갔다. 부안은 전북의 북쪽이고, 강진은 전남에서도 남쪽이다. 멀고도 먼 길이다. 그 먼 길을 열예닐곱의 소녀는 혼자서 건너갔다.

“고향은 부안의 동진면이라는 곳이여. 내가 집안의 둘째지. 그때는 어느 집이나 모두 농사나 조금 짓고 할 때구먼. ‘아는 이’가 소개해서 해남으로 갔어.”

박정순 씨는 얼마 전 뇌수술을 받았다. 오래된 이야기들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아물아물 할 때가 있다. ‘아는 이’가 누군지 기억할 법하지만 그저 ‘아는 이’라고 눙친다. 굳이 누구 소개로 갔는지 되물어볼 필요는 없겠다.

“식당에서 일을 했지. 아는 사람 소개로. 거기서 남편을 만났어. 남편도 강진이 외지여. 원래 진도 사람인데 강진에서 일하고 있었지. 진도랑 강진은 멀지 않으니까.”

내장, 염통이 들어간 순댓국과 국밥 한 그릇.
두 사람의 차이점은 한가지뿐. 남편 한시동 씨에게 식당은 ‘외삼촌이 운영하는 가게’였고 아내 박정순 씨에게 그 식당은 타지에서 만난 일터였다. 식당에서 궂은일과 심부름을 하다가 두 사람은 만났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신부는 열아홉 살이었다.

결혼 후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거처를 익산으로 옮긴다. 익산에 박정순 씨의 시누이, 남편의 누나가 살고 있었다.

1970년 대 초반의 익산은 상당히 큰 도시였다. 익산의 예전 이름은 ‘이리’. 나이가 든 사람들은 익산은 몰라도 이리는 기억한다. ‘이리 역 폭발사건’이 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그 시절, 젊은 부부는 익산에 있었다. 마침 시누이가 익산 중앙시장 언저리에 살고 있었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살 집이 마땅치 않았다. 사글세방을 얻어서 신혼살림 겸 익산에서의 살림을 시작했다.

'정순순대'의 피순대
선술집, 막걸리 팔던 집에서 순대국밥 집으로

인근에 익산에서 가장 크고 유명했던 중앙극장이 있었다. ‘반은 영화를 보여주고, 반은 쇼를 하던’ 시절이었다. 대처인 익산에는 중앙극장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객들은 쇼나 영화를 본 다음, 인근의 좌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첨부터 순대 장사를 한 건 아녀. 막걸리 좌판을 했지. 양은 주전자에 양은그릇을 놓고, 막걸리를 잔술로 팔았어. 간단한 안주거리로 돼지내장과 국물을 내놓았지.”

문도 없는 노점이었다. 정식 허가를 낸 것도 한참 후였다. 메뉴도 순대국밥이 아니었다. 비교적 가격이 싼 돼지내장을 삶아서 국물을 내고, 삶은 돼지 내장이나 허드레고기를 내놓았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정순순대’ 50년 역사는 희미하다. 정식 허가를 냈는지, 메뉴가 뭐였는지를 따지면 40년을 넘겼고, 밥장사, 술장사 한 것을 모두 합치면 50년이 가깝다. 간판에는 오래 전에 써둔 ‘40년 역사’가 남아 있다.

“이제 가게가 얼추 50년쯤 되고, 방송에도 소개되고 하니까 자꾸 비법을 묻는 사람들이 많아. 비법이랄 게 뭐 있어? 편하게 이야기해줘. ‘형제간이나 친한 친구도 맛없으면 안 온다’고 이야기해줘. 한두 번은 오겠지. 안면이 있으니. 그런데 맛없으면 세 번, 네 번은 안 와. 한두 번 오고 그만이지. 비법이랄 게 뭐 있어? 맛있어야지. 음식이라는 게 결국 맛과 정성이야.”

밥 한 공기와 시래기 국 한 그릇. 여기에 막걸리 한잔을 더했다. 통으로 막걸리를 사다가 잔술로 팔고, 병에다 넣어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20원, 30원을 받고 팔았다. 어쨌든 손님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중앙시장 양쪽에 큰 청과물 경매시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단골들이 생겼다.

“내가 덩치는 ‘쪼깐’해도 손이 커. 음식을 넉넉하게 주니까 좋아했지.”

음식을 후덕하게 내놓았다. ‘인상이 사납지 않은 이가, 수더분하게, 음식을 손 크게 내놓으니’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피순대는 우연찮게 시작했다.

순대국밥 한 그릇
어린 시절 이모 집에서 먹었던 피순대

“어린 시절이었지. 부안 살 때, 이모 집에서 피순대를 먹었던 기억이 있어. 맛있었지. 소는 잡기가(도축하기가)힘들었지만 돼지는 가끔 마을에서 도축해서 먹었어. 그때 이모 집에서 피순대를 먹었던 적이 있어. 이쪽에서는 언제나 피순대를 해먹었으니까. 가난해도 동네에 크고 작은 일이 있으면 돼지를 잡고, 피도 버리지 않고 피순대를 해먹었지. 가게에서 순대를 할 때도 당연히 피순대를 했지.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이니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있지만 만들 줄은 몰랐지. 자라면서 배운 적이 없으니까. 가게에 내장이랑 돼지창자 갖다 주는 사람이 있었어. 아직 순대 만드는 법을 잘 모를 때니까 그이한테 물어봤지. 순대 어떻게 만드느냐고. 처음엔 그이한테 배워서 해봤지. 나중에는 이것저것 내 맘대로 만들어봤어.”

궁금했던 것은 호남의 피순대와 함경도 식 곡물, 나물이 많이 들어간 ‘아바이순대’의 차이점이었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 식 순대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내려온 이들이 속초에 ‘아바이마을’을 만들고 그곳에서 함경도 고향음식인 아바이순대를 만들었다. 곡물과 나물이 많이 들어간다.

호남의 피순대는 간단하다. 피가 잔뜩 들어간다. ‘정순순대’의 피순대는 100% 피만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순도 100% 피순대.

'정순순대'의 순대국수 한 그릇.
피순대와 곡물순대

피순대와 곡물순대.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늘 궁금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이 부분을 물어볼 참이었지만 대뜸 “선지와 내장을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피순대를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모 집에서 먹었던 순대가 피순대다”라는 대답에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피순대는, 적어도 호남에서는,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추측이다. 남쪽 지방 특히 호남은 기후가 온화하다. 나물들이 잘 자라고 늘 나물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태백산맥 지역, 북쪽 지역은 나물이 귀하다. 추운 계절이 길고 나물은 금방 사라진다. 나물을 저장할 필요가 있다.

나물이 귀한 지역의 사람들은 나물에 대한 ‘욕심’이 크다. 나물이 지천인 호남에서 순대에까지 나물을 넣을 이유는 없다. 순대에 나물을 넣지 않는 이유다.

순대가 ‘기마민족의 휴대식량’이라는 설도 있다. 말린 순대는 찌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말린 순대를 가지고 달리다가 간단하게 찐 다음, 먹었다는 추론이다.

피순대 만들기는 쉽지 않다. 창자가 조금만 찢어지면 피가 흐른다. 피순대의 군데군데를 묶어둔 이유다.

‘정순순대’의 순대는 고단한 작업의 결과다. 찢어진 곳, 흠이 없는 상태에서 창자에 피를 넣고 묶어야 한다. 순대의 군데군데 묶은 표시가 있으면 그 부근에서 순대가 터졌음을 의미한다.

“냄새가 문제야. 하루 정도 창자를 묵히면 바로 냄새가 나. 순대 만드는 건 정성이야. 당일 창자를 받아서 바로 정리를 해야지. 지금도 이른 새벽 가게에 나오는 이유야. 정성껏 씻어서 준비를 해야지. 밀가루로 닦기도 하고, 여러 번 헹구고. 대창은 특히 약해. 하루 묵히면 바로 찢어지는 일이 생겨. 순대는 당연히 돼지선지, 돼지창자로 해야지. 소피를 넣어보면 선지가 퍽퍽해. 돼지선지도 하루만 냉장고에 넣어두면 퍽퍽해져. 음식은 묵히면 안 돼. 냄새가 나고 색깔도 좋지 않고. 대창을 손질하다가 찢어지면 대창볶음을 하지. 그건 밀가루로 닦기만 하고 소금도 안 써.”

1970년대 초반, ‘정순순대’ 부근에는 초가집이 즐비했다. 바로 앞, 새마을 금고 자리에서 장사를 했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 자리부터 ‘몸은 쬐깐해도 손이 커서’ 음식을 많이 퍼주는 덕분에 오늘날 같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고 믿는다. 비법도 없고 대단한 레시피도 없다. 그저 열심히, 한 결 같이 새벽부터 일을 시작했고 순대만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았다.

2017년 11월의 '정순순대' 입구. 여전히 20평이 되지 않는 작은 규모다.
아들 셋을 두었다.

“며느리들이 착하니까 아들들이 순대 집을 내고 일을 하지요. 요즘 세상에 여자가 못하겠다고 하면 못하는 거잖아요. 며느리들이 착해서 맏이는 지금 ‘정순순대’ 일을 하고 있고, 아들 하나는 원대(원광대학교) 대학로에서, 또 하나는 부천에서 순대 집을 해. 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계속 일을 할 생각이야. 맏이가 지금 일을 잘 배우고, 잘 해내니까, 옆에서 도와주고, 새벽부터 몇 가지 작업은 같이 하고.”

긴 세월, 조미료 없이 순대국밥을 말아냈다.

“시대가 변하네. 이젠 조미료 없이 해달라고 하면 조미료 없이, 조미료 넣어달라고 하면 조미료 넣고 해줘. 조미료 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필자를 위해서 순대국밥을 말아내면서 말했다. “마음이 희한해. 점점 더 ‘변하지 말자, 변하지 말자, 변하지 않을 꺼다’ 이런 생각만 들어. 희한하지. 내가 이제 일흔인데.”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순댓국, 국밥 맛집]

단골식당
경북 예천의 유명 순대국밥 전문점이다. 가게 한쪽 면에서 늘 토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댓국, 순대 추천. 오징어불고기는 호불호가 갈린다. 당면이 많은 순대.

선릉순대국
강남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순댓국 전문점이다. 좁은 골목 안의 가게이지만 지하에 별도의 넓은 공간이 있다. 변하지 않는 맛으로 단골이 많은 집이다.

약수순대
약수동, 신당동 일대에는 서민적인 순대, 순댓국 전문점이 많다. 그중 널리 알려진 집. 상당히 깔끔한 순댓국을 내놓는다. ‘바쁜 시간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는 팻말이 있다.

순대실록
대학로에 있는 순대 전문점이다. 신흥강자. 주인이 순대를 철저히 공부, 분석하고 문을 연 집이다. 긴 순대를 그대로 내놓는다. 강추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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