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마음’ 담아…좋은 식재료, 정성으로 버무려 손님 줄 이어

전(煎), 매운 양푼갈비찜으로 유명… 쉽지 않은 음식, 변함없는 맛 유지

“손님은 귀신이고, 지인은 염라대왕”…음식에 정성 쏟고, 정직하게 운영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서울 신사동의 전집 '동인동'의 김홍숙 대표.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식재료를 구하고 사들이는 일은 직접 하고 있다.
현재 자리로 이사 오기 직전의 '동인동'이다. 현재 자리의 바로 옆 건물이다.
1944년생이다. 일흔네 살. 일흔을 넘긴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가게에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60대 초반으로 보인다.

서울 신사동 전(煎) 전문점 ‘동인동’의 김홍숙 대표. 대표적인 서민의 음식인 전(煎)과 매운 양푼갈비찜을 내놓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전, 귀한 음식에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서울 강남에서 전 혹은 매운 대구 동인동식 갈비찜을 먹을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몇 해 전 군데군데 전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가 곧 문을 닫았다. 매운 갈비찜도 마찬가지. 여러 체인점이 생겼다가 곧 문을 닫았다. 한때 매운 음식이 유행을 타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동인동’. 묵묵히 견디고 있다. 문 닫았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곧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곤 한다.

다섯 종류의 전 중 일부는 먼저 내놓고 일부는 나중에 내놓는다. 갓 부친 전을 내놓기 위해서다.
비 오는 날은 전 먹는 날이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슬며시 번지면 누구나 뜨듯한 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궂은 날도 마찬가지. 궂은 날의 전 두어 조각과 막걸리는 별미다. 시골 생활을 해본 이들은 비 오거나 날 궂으면 자연스럽게 전을 떠올린다.

‘동인동’의 단골 중 일부는 ‘동인동’을 ‘매운 양푼 갈비찜’ 집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모둠전과 더불어 갈비찜을 주문한다.

전은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으로 기억한다. 일부 맞는 말이지만 전이 그리 간단한 음식은 아니다. 고귀한 음식이었다.

애호박전과 깻잎전이 눈에 띈다.
정조 18년(1794) 3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정조가) 선희궁의 작은 화단에 돌아와서 화전(花煎) 놀이를 하면서 칠언 절구로 시를 짓고 군신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정조 18년이면 정조의 권력이 막강할 무렵이다. 이때 정조는 궁궐 내에서 ‘화전놀이’를 한다. ‘꽃잎으로 장식한 전’이다. 음력 3월이니 양력 4월경이었을 것이다. 화전놀이는 국왕이 직접 주재할 정도로 대단한 행사였다. 민간에서도 화전놀이는 대단한 행사였다. 전을 중심으로 한 행사는 이토록 의미가 깊었다.

명재 윤증(1629∼1714)은 조선시대 유교 법도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제사에 대해 한 유훈이 재미있다.

“제사상에 떡이나 유과, 전을 올리지 마라”. 떡은 일손이 많이 든다. 차리기 힘들고 번거롭다. 유과나 전은 당시 귀했던 기름을 많이 사용한다. 제사를 간략하고 검소하게 모시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전은 결코 간단한 음식이 아니었다.

기름과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전은 비교적 흔한 음식,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과연 전은 대중적이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일까? 그렇지는 않다. 숱하게 많았던 전 전문점들이 사라지고 전 체인점들이 사라지는 이유가 있다. 쉬워 보이는 음식, 대중적으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음식이지만, 결코 간단치 않은 음식이다. 전 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성공하기는 힘든 아이템이다.

모듬전이다. 큰동그랑땡, 깻잎전, 굴전, 애호박전, 두부 등이 있다.
평양 출신, 인천, 영등포 거쳐 결혼하면서 대구에 정착

술술 풀어낸다. 미리 “연도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 일흔넷의 나이면 적지는 않다. 오래 전의 일을 제대로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다. 몇 년의 일이냐고 물으면 “내가 몇 살 때의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대구 동인동에서 가게 이름 ‘동인동’을 따온 것은 사실이다. 오랫동안 이 집을 드나들면서 주인이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 토박이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 김홍숙 씨는 평양 태생이다. 얼마쯤 혼란스럽다. 북한 평양 출신이 대구 이름으로 전 집을? 곧 그럴 사연이 있다고 밝힌다. “평양 출신인데 대구로 시집을 갔지요. 시어머님이 대구 동인동에서 장사를 했어요. 음식은 시어머님 하는 것 어깨 너머로 배우고 서울로 오면서 이름을 ‘동인동’이라고 붙였지요.”

1944년. 해방 직전이다. 김홍숙 씨의 친정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도 경제적으로 그리 쪼들리지는 않았다. 평양에서도 2층 양옥집에서 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에서 살 상황이 아니었다.

1ㆍ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다. 북에서 남으로의 피란. 피란지는 인천이었다. 여섯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피란살이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대단히 힘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방직회사에 취업했고 그때부터 다시 평탄하게 살았다. 인천에서 영등포로 다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서 옮긴 것.

“영등포에 살 때,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제가 스물서너 살이었을 때니 1960년대 후반 무렵이었지요. 큰 아이가 1968년생이니 그 무렵 결혼했습니다.”

다양한 전을 부치는 모습.
시댁이 대구. 대구로 갔다.

“무난한 결혼생활이었지요. 대구 계산동에서 살았고 1남1녀를 낳고, 큰아들은 농구를 하겠다고 하더니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고 골프로 바꾸었지요.”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은 순전히 ‘아이들 교육 때문’이었다.

“운동을 하겠다고 하니 부모로서 뒷바라지는 해야겠고, 사업이라는 게 늘 굴곡이 있지요. 좋을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서울로 이사했는데 문제는 경제적인 뒷받침이지요. 나라도 나서서 아이들 뒷바라지하겠다고 음식 장사를 시작했지요.”

그게 지금 ‘동인동’의 시작이었다. 지금 자리의 지하층.

“가게 터를 얻으려고 여기저기 다니는데 지금 ‘동인동’ 자리의 지하층이 나왔어요. 얻으려고 했더니 부동산업자가 ‘뭘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간단하게 김밥 집을 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김밥은 간식 같은 것이라서 지하에서 하기에 좋지 않을 거’라고 조언을 해주더라고요. 결국 양념갈비를 내놓자고 생각했지요.”

마침 대구의 시어머니가 양념갈비 장사를 했던 기억도 났다. 서울에서 대구 동인동식 양념갈비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칼칼한 매운 갈비찜. 대구 동인동식 갈비찜은 그렇게 탄생했다.

대구 동인동 스타일의 매운 갈비찜. 현재 신사동 '동인동'은 매운 갈비찜과 덜 매운 갈비찜 두 종류를 내놓고 잇다.
음식에는 ‘마음’을 버무려야 한다

전을 만들고 매운 갈비찜을 내놓는 ‘동인동’. 지하에서 하다가 대치동으로 이사를 해서 얼마간 운영하다가 또 현재 자리의 옆으로 이사를 왔다. 좁은 공간이지만 1층이었다.

필자도 지금 자리 옆의 좁은 장소에 ‘동인동’이 있던 시절, 전과 매운 갈비찜을 먹으러 여러 차례 갔다. 추운 겨울,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자리로 옮기면서 그런 마음의 빚 하나는 덜었지요. 기다리는 손님들이 보이면 늘 미안했는데 자리를 조금 넓히고 나니까 그렇게 기다리는 손님들은 줄었습니다.”

더 좋은 일도 생겼다. 3년 전부터 맏아들이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 김홍숙 대표가 막 일흔을 넘겼을 때다. 언제까지 가게를 운영할 수는 없다. 아들은 농구를 하다가 골프로 전향해서 한동안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시기를 늦출 수는 없었다.

술국 스타일의 해장국
아들이 어머니의 가게를 물려받기로 결심한 순간 어머니 김홍숙 씨는 아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운동을 잊어라. 취미로 하는 건 좋지만, 돈을 벌 목적으로 운동을 하는 건 반대다. 운동이든 음식점이든 하나만 해야 한다. 한 가지에 몰두해야 하나라도 제대로 한다.”

음식점 경영.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쉽지 않다. 처음 ‘동인동’의 문을 열었을 때 김홍숙 대표는 전철역에서 전단지를 돌렸다. 전단지로 광고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쉰 살을 넘긴 여자 사장이 직접 전단지를 돌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인근 전철역에서.

“가게가 이름을 얻고 장사가 잘 되는 데는 최소 3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서 불평하고, 가게가 명성을 잃어버리는 데는 석 달이면 충분합니다. 하루 장사 하고 그만둘 것 아니면 늘 좋은 식재료를 구하라고 충고합니다. 지금도 중요한 식재료는 전부 제가 정하고, 사들이고, 관리합니다. 아들이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기를 바랍니다. 음식은 주 재료와 양념을 합친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하나를 더 넣어야 음식이 된다고 말한다. ‘마음’이다.

“아들에게나 종업원들에게 이야기하는 건 ‘음식에는 마음을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유식하지도 않습니다. 표현이 다소 투박하지만, 늘 ‘손님은 귀신이고, 지인은 염라대왕’이라고 말합니다. 손님들이 모를 것 같지만 다 압니다. 막연한 느낌으로 다 알지요. 알면서도 한번, 두 번은 속아줍니다. 단골도 세 번은 속지 않습니다. 지인도 마찬가집니다. 한두 번은 안면으로 옵니다. 지인들은 잘못이 있더라도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더 무섭지요.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동인동'의 밑반찬
문을 연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H 식용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한통에 1만 원대였던 그 식용유는 5만 원대까지 가격이 올랐다. 싼 걸로 시험을 해본 적이 있다. 고소한 맛이 떨어졌다. 다시 원래 식용유로 바꿨다.

전을 부치고 나서 5분만 지나면 그 전은 손님상에 내놓지 않는다.

“제가 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을 아이템으로 정했지요. 갓 지은 밥이 맛있듯이 전은 막 부쳐서 먹어야 맛있습니다. 손님들이 전을 먹다가 식어서 다시 부쳐달라고 하면 그건 해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부친 전이 5∼10분 정도 지나면 그건 절대 손님상에 내놓지 않습니다. 식은 전, 두 번, 세 번 덥힌 전은 맛이 없습니다. 가까운 이웃에 나눠 줍니다. 시간이 지난 전을 다시 데워서 내놓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갓 부친 전이 맛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시간이 지난, 식은 전을 내놓을 수는 없지요.”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신사사거리 부근 맛집 4곳]

진동횟집
마산시 진동면 출신 일가친척들이 운영하는 집이다. 서울에 갈치 회를 소개한 공로가 있다. 세꼬시 전문점이다. 단골들은 모두 큰 그릇에 퍼주던 미역국을 잊지 못한다.

한성돈까스
30년의 역사를 가진 노포다. 일본 돈가스 방식으로 미리 썰어서 나온다. 소스를 찍어서 먹는 구조. 돈가스는 양도 푸짐하고 좋은 편. 국물 등은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노독일처
만두가 좋은 중식당이다. 개봉만두는 부추가 많이 들어간 특이한 만두다. 2층은 크고 작은 방이 있다. 낙타만두나 사희교자 등 특이한 만두를 추천한다.

전주청국장간장게장
업력이 오래된 노포다. 24시간 운영하는 장점도 있다. 청국장이 아주 좋다. 나물을 큰 그릇에 담고 청국장을 내준다. 가격도 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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