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아닌 몸이 익힌 대로 음식 만들어…식재료에 정성, 최상의 맛 유지

고기 곤 곰탕과 뼈 곤 설렁탕 합해 더 맛 있는 양지설렁탕 내놔

형 운영하는 설렁탕 맛집 주방 일 하면서 현재 식당과 인연

반찬 특이하고 맛있어 더 유명…직원ㆍ친척과 ‘한길’가기로

‘마포양지설렁탕’. 지금은 평범한 간판이지만 처음 문을 연 1970년대 후반에는 ‘희한한’ 이름이었다. ‘양지설렁탕’은 곰탕과 설렁탕을 합친 이름이다. 고기 곤 국물이 곰탕, 뼈 곤 국물이 설렁탕이다. ‘양지+설렁탕’은 곰탕과 설렁탕을 합친 이름인 셈. 1980년대 후반부터 ‘마포양지설렁탕’의 주방 일, 운영 일을 해온 김경만 대표를 만났다.

'마포양지설렁탕'의 김경만 대표. 지금도 파김치 등은 주방 식구들과 함께 장만한다.
형님이 운영하던 가게를 인수하다

‘마포양지설렁탕’은 1970년대 후반 문을 열었다. 지금의 ‘마포먹자골목’이다. 마포구 용강동. 수협 옆에 있었다. 창업 공간이자 20년 동안 숱한 사람들이 찾았던 공간이다. 좁고 긴 건물. 입구는 좁지만 뒤편으로 공간이 제법 넓었다. 봉놋방 스타일의 방이 있고 입식 좌석도 별도로 있었다. 가게 안쪽으로 주방이 있고 그 뒤에 또 손님맞이 방이 있는, 복잡한 스타일이었다.

인근에서는 유명한 맛집이었다. 매스컴도 많지 않았고 오늘날 같은 SNS도 없었다. 음식점을 소개하는 매체는 거의 없었다. 카페니 블로그니 하는 디지털 미디어도 없었다. 인터넷이 성행하기 전이다. 입소문으로 알려졌다. 여의도와 마포 인근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가게를 찾았다. 시쳇말로 ‘맛집’이었다. 김경만 대표는 창업주는 아니었다. 창업주는 김 대표의 형이었다. 김 대표는 이곳에 종업원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주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서울로 갓 올라왔을 때고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으니까. 저의 부부는 ‘마포양지설렁탕’에서 일하다가 가끔 여의도 너머 대림동의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기도 하고, 대부분 음식점에서 일을 했습니다. 아내는 홀, 주방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저는 주로 주방에서 일을 했지요.”

1988년 무렵의 일이다. ‘마포양지설렁탕’과의 인연은 ‘형님이 운영하는 설렁탕 맛집’의 주방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마포양지설렁탕'의 설렁탕. 2018년 1월 촬영한 것이다.
염색 일을 하다가 서울로

부산 언저리 기장 출신이다. 평범한 농촌 출신. 1954년생이니 배고픈 보릿고개도 겪었다. 먹고 사는 것이 당장 문제였던 시절. “하루에 나무 세 짐을 해오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던” 일이 일상적이었다. 찢어지도록 가난했다.

5남매의 중간이다. 가난한 살림살이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학교 다닐 돈도 없었지만,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이 굶을 판이었다. 형님 둘은 일찍 외지로 나갔다.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이 하나씩. 가장 아닌 가장이었다.

소 꼴 먹이는 일도 했다. 우리 집 소가 아니라 남의 소였다. 대신 밥을 푸짐하게 얻어먹었다. 톱 하나 들고 산으로 가서 애매한 나무 밑동을 슬쩍슬쩍 잘라두었다. ‘생솔가지’를 꺾거나 잘라오면 무거운 벌을 받던 시절이다. 나무 밑동에 톱질을 해두면 나무는 서서히 말라죽는다. 말라죽어, 누런 끼가 도는 솔가지는 땔감으로 가져와도 무방했다.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게 근근이 살았다.

군대 제대를 하고 나니 스물다섯 살. 1978년. 서울에서 유명한 ‘설렁탕 맛집’을 운영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1978년, 1인당 국민소득이 막 1000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굶는 이가 사라지는 시대. 절대빈곤이 사라지는 시절이었다. 앞으로 먹고 살 길은 기술을 배우는 것뿐이었다.

마침 고향 기장에 모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염색공장이 있었다. 무턱대고 공장에 입사했다. 취미, 적성을 따질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상사인 과장을 한분 만났습니다. 성실하다고 생각하셨든지 그분이 ‘부산으로 일자리를 옮기는데 따라갈거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던 분이었으니, 그분 따라서 부산 전포동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부산 공장에서 대형 보일러 사고가 터지면서 다시 대구로 옮겼습니다.”

1978년 제대한 후, 1988년 서울로 오기 전까지 기장, 부산, 대구로 직장을 옮기며 10년 동안 나염, 염색공장 일을 이어갔다. 대구에서 일하던 시절 아내를 만나고 결혼했다.

식탁에는 이런 형태로 3종류의 김치가 있다.
형이 운영하던 설렁탕 가게를 인수하다

1993년 무렵 형이 운영하던 ‘마포양지설렁탕’을 인수했다. 주방장에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때도 권리금을 주고 인수했지요. 저는 마포 용강동의 그 가게를 나올 때 권리금을 못 받았지만.”

서울로 올라온 1988년부터 약 5년간의 세월은 ‘서울 적응기’였던 셈이다. 애당초 대구의 염색공장을 떠난 이유도 참 엉뚱하다.

“제가 ‘가방 끈’이 짧아서 대구를 떠난 셈입니다.”

염색공장 경력은 늘어나는데 1980년대를 넘기면서 새로운 기계가 자꾸 들어왔다. 염색공장은 불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힘든데 새로운 기계의 설명문은 전부 영어였다. 설명문의 영어해독도 힘들고 일은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 설렁탕 집을 운영하고 있는 형의 전화를 받고 서울로 상경했다.

5년간 주방 일을 하고 아내도 꾸준히 홀, 주방 일을 했다. 김 대표는 건축현장 ‘노가다’ 일을 하는 등 외도도 있었지만 결국 식당 일로 되돌아왔다.

“‘마포양지설렁탕’ 주방에서 5년쯤 일을 하다가 가게를 인수했지요.”

쉽게 이야기하지만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재건축을 하고 나서, 다시 가게를 주겠다는 말을 믿고 용강동 가게를 비웠다. 복잡한 상황을 거쳐 결국 그 가게로 돌아가지 못했다. 2006년 무렵의 일이다.

두 번째 자리인 공덕역 1번 출구 앞으로 가게를 이전했다. 가게는 넓어지긴 했지만 장소 이전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단골손님들의 연락처도 없었다. 막막했다. 김 대표는 엉뚱한,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옮긴 가게 앞에 의자를 내놓고 마냥 앉아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이들이 창문을 열고 ‘가게 이쪽으로 옮기셨어요?’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제 얼굴을 알아보는 분들이 많았지요. 그중에는 갑자기 가게가 문을 닫고 사라졌으니 한동안 찾아 헤맨 분들도 있었고요. 차를 타고 가다 저를 본 분들은 거의 다시 찾아왔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분들이 새로 옮긴 가게로 찾아오는 일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효과는 있었습니다. 실제 그렇게 해서 예전 단골들이 대부분 옮긴 곳으로 따라오셨습니다.”

파김치와 배추김치. 30년 이상의 깊은 맛을 고집하고 있다. 파김치는 지금도 이 집의 자랑스러운 메뉴다.
이론은 모르지만 몸이 익힌 대로 음식을 만들다

바탕에는, 당연히,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설렁탕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배운 것도 없다. 유명 가게에서 전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가게 이름을 유별나게 지은 것도 아니다. 그저 형에게 인수받은 가게를 좀 더 잘 관리하자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식재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정리해본 적도 없다.

국물을 내보면 한우, 육우는 수입고기보다 낫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다. 수백, 수천 번 국물을 내고 그 맛을 봤다. 음식을 남기고 간 사람이 있으면 오랫동안 그 이유를 곰곰이 되새겼다.

고기 곤 국물은 곰탕이고 뼈 곤 국물은 설렁탕이라는 표현도 나중에 들었다. 그저 뼈 곤 국물에 고기 곤 국물을 더하면 맛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익혔다.

고기 곤 국물을 더하면 국물은 쉬 상한다. 회전율이 좋으니 별다르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지만 지금도 날이 더워지면 늘 국물 상황에 온 신경을 다 쏟는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표현이 있다. ‘WAG THE DOG’이라는 경영학의 표현이다. 설렁탕 집은 설렁탕이 주력 메뉴다. 당연히 설렁탕이 유명해야 한다. 가끔 설렁탕 집의 설렁탕 대신 반찬이 돋보일 때가 있다. ‘마포양지설렁탕’은 반찬이 특이하고 맛있어서 유명해진 경우다. 파김치. 젓갈 냄새가 은은한, 아주 좋은 파김치다.

“재료가 90%죠. 좋은 젓갈을 구해서 정성스럽게 손질합니다. 사실 배추김치나 무김치와는 달리 파김치는 손이 많이 갑니다. 젓갈도 중요하지만 좋은 쪽파를 구해서 종업원들이 일일이 다듬고 손질해야 합니다. 인건비 등을 생각하면 못할 짓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단골손님들이 많아서 대부분 얼굴을 기억합니다. 누군지, 뭘 하는 분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 단골이라는 사실은 알지요. 막상 단골들 얼굴을 보면 파김치 내놓는 걸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손님들이 좋아하시니까요.”

'마포양지설렁탕'의 두번째 가게. 공덕역 앞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사한지 3년째다.
공덕역 1번 출구 앞의 가게에서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곳도 장소를 옮길 때 조심하고 선택했던 곳인데 결국 권리금 주고 들어가고 권리금 못 받고 재개발로 나왔습니다. 임대 보증금이나 권리금을 줄 때 역시 돈이 부족해서 빌렸습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장사해서 겨우 빚 갚고 나왔죠. 지금도 친척들이 가게에서 같이 일합니다. 직원들도 오래된 분들이 많고요. 저나 제 처 봉급 가져가고 직원들 봉급 주고, 4대 보험 다 내주고, 세금 내고, 그걸로 만족합니다.”

‘모아둔 돈’은 없다. 한때 LPG 가스 값으로 500∼600만 원을 냈던 적도 있다. 지금도 160석 식당에 하루 수백 명이 드나든다. 음식 가격을 쉬 올리지 못하니 매년 세금을 분할로 내는 판이다. 좋은 음식을 내놓는다는 자부심은 있다.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아들은 음식점에 관심이 별로 없다. 딸은 공덕역 1번 출구에 가게가 있을 때부터 가게에 자주 나타났다. 누구를 정해서 물려줄 생각은 없다. 딸이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서울 상암동에 매장을 내고 딸을 점주로 내세웠다.

“예전 용강동에서 일하던 친척이 지금 상암동 매장의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방 일을 잘 하시는 분이니까 상암동 음식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딸아이가 대표로 있지만 친척들이 주변에서 도와주니까 잘 버티겠지요.”

직원들, 친척들과 더불어 꾸준히 이 길을 걸을 것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설렁탕 맛집 4곳]

이문설렁탕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게다. 이미 110년의 역사를 넘겼다. 설렁탕 국물이 맑다. 내포, 지라 수육 등이 유명하고 수준급이다.

하영호신촌설렁탕
설렁탕 후발 주자지만 조미료를 배제한, 심심하고 깔끔한 국물이 특징이다. 사골을 위주로 잡뼈 등을 배합하여 곤다. 도가니 등을 잘 이용하여 국물 맛이 깊다.

잼배옥
서울에서도 퍽 오래된 노포. 남대문 옆 ‘잠바위골’에서 시작했다. 잠바위가 ‘잼배’가 되었다. 예전 설렁탕 맛. 깊은 맛을 두고 ‘고기 냄새’ 난다고 싫어하는 이도 있다.

우작설렁탕
진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꼬리곰탕 등도 수준급이다. 밑반찬인 김치도 깔끔하고 맛있다. 진하면서도 깔끔한 국물 맛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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