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국수는 다양…외국과 교류, 갖가지 방법 사용, 끊임없이 진화
콩가루를 사용하는 것과 또 다른 방법으로 국수를 만드는 것. 오래 전부터 있었던 방식이다. 오래 전부터 국수를 만들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한반도의 국수는 다양하다. 한반도의 국수는 끊임없이 외국과 교류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홍사면’은 지금은 보기 힘든 국수다. 홍만선(1643∼1715년)은 조선 숙종 때의 사람이다. 400년 쯤 전이다. 홍만선은 <산림경제>를 남겼다. 이 책 “제2권_치선(治膳)”편에 ‘홍사면(紅絲?)’이 나온다. ‘붉은 실 국수’다. 당시 많이 쓰던 메밀이 주재료지만 콩가루도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날 새우다. 곡물 가루에 날 새우를 더한다. 그리고 숙성시킨다.
“(전략) 홍사면은, 날 새우(鮮蝦) 2근을 깨끗이 씻어 노그라지게 갈고, 천초(川椒) 30알, 소금 1냥, 물 5되를 한데 폭 익혀, 천초는 가려내고, 즙을 걸러 맑게 가라앉혀 메밀가루 3근 2냥, 콩가루(豆粉) 1근을 반죽하여 한동안 베로 덮어 두었다가 열어 다시 반죽하여 굵기를 적당히 썰어 삶으면 그 국수가 자연 붉은 색을 띠게 된다. 즙은 임의로 넣되 돼지고기를 써서는 안 된다. 이것은 풍기를 일으킬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후략)”
지금으로서는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호화롭다. 수입산 새우라면 모를까, 국산의 싱싱한 날 새우라면 ‘제조원가’에 공임까지 셈하면 시판용으로 내놓기는 불가능하다. 날 새우를 갈아 넣고 숙성시킨 붉은 색의 국수? 대단히 호화롭다. 이걸 ‘한반도의 국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쨌든 조선 중, 후기에는 이미 색깔까지 감안한 국수가 있었다. 물론 ‘우리 것’ 혹은 ‘우리만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날 새우를 곱게, 축 처지게 갈아서(노그라지게) 산초(천초), 소금, 물 등을 넣고 익힌다. 다음 과정은 전분을 얻는 과정과 동일하다. 거르고 가라앉혀 아래에 고운 분말을 사용한다. 여기에 메밀가루와 콩가루를 넣어서 반죽을 한다. 염도도 적당하고 새우의 향과 맛, 산초의 매운 맛, 메밀의 맛과 향, 콩의 고소함이 잘 배인 국수였을 것이다. 국수 색깔은 붉다고 했다. 고운 핑크빛일 것이다. 국수를 먹을 때 사용하는 국물(즙)은 식성대로 쓰되, 다만 돼지고기 국물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베로 덮어둔다는 것은 숙성을 위함이다. 숙성반죽은 반죽을 차지게 해서 국수 성형이 쉽도록 만든다. 밀가루 반죽을 숙성시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숙성시켜야 면 반죽이 쫄깃해진다. 더하여 소화에도 좋다. 하물며 고운 가루가 힘들었던 시절의 메밀가루다. 반죽을 성형시키지 않으면 국수는 불가능하다. 콩가루도 넣고 새우를 갈아서 넣지만 역시 숙성을 시켜야 국수 성형이 가능했을 것이다. 국수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 선조들은 부단히 노력했다. 그나마 국내 개발도 아니고 외국인 원나라의 기법을 도입한 후 발전시킨 것이다.
면의 종주국은 유럽이다. 국수가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만의 주장’이다. 유럽, 일본학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파스타는 이집트에서 이미 5000 년 전에 시작되었다.
밀의 원산지 혹은 최초 경작지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근방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터키에서 자연산 밀이 처음 등장했다는 설도 있다. 밀은 중동,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중국 서부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이 유럽 측의 정설이다. 현재 밀, 밀가루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 러시아, 캐나다다. 지금 우리의 밀도 주로 미국 등에서 수입된다.
대규모 밀농사는 이집트의 나일강 범람 때문에 가능했다. 로마의 번성은 값싼 아프리카의 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아프리카는 로마의 빵 바구니”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집트의 각종 유물에서 밀가루 반죽들이 출토되었다. 역사도 5000년∼7000년으로 추정한다. 인간이 밀을 먹은 역사는 상당히 길다.
밀은 쌀처럼 원형을 보존한 채 먹기는 힘들다.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가루반죽을 쥐어주면 인간은 황홀해진다. 뭔가를 만든다. 반죽을 펴고 혹은 둥글게 말고 원형, 삼각형, 사각형, 별꼴로 만든다. 더러는 길게 가락을 늘이기도 한다.
한반도에는 국수, 막국수, 냉면, 칼국수, 수제비, 각종 떡과 경단이 존재한다. 시기 별로 사용하는 식재료가 달라지면서 국수의 내용이나 모습도 달라졌다. 우리가 발전시킨 것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외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전해졌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것을 개발하는 한편 외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얻은 정보를 더하는 식이다. 어쨌든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 진화한다.
몽골의 한반도 침략기 이전에도 ‘고려의 국수’는 호평을 얻는다. 12세기 초반, 몽골의 침략기 이전 고려시대 풍속을 보여주는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고려 국수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송나라 등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음식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으로 국수가 등장한다. 고려 국수가 맛있다는 표현도 나온다.
왕, 사대부도 귀하게 여긴 국수
조선시대 기록에는 국수에 대한 내용들이 많다. 태종 17년(1417년)5월, 때 아닌 서리가 내렸다. 초여름의 느닷없는 서리다. 날씨가 고르지 못한 것도 ‘임금의 죄’다. 제사 모시는 것을 두고 이야기가 오간다. 내용 중 “내 어찌 양(梁)나라 무제(武帝)같이 국수(?)로서 희생(犧牲)을 대신하겠는가?”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무제는 양나라 고조다. 불교를 심하게 숭상해서 재위 48년 동안 제사의 희생에 고기 대신 국수를 사용했다. 국수는 귀한 고기 대신 사용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여성위(礪城尉) 송인(1517∼1584년)은 중종의 사위다. 중종의 딸과 결혼했으니 이른바 ‘부마’다. 중종 34년(1539년) 10월의 기록에는 ‘국수 접대 금지’ 내용이 나온다. 앞뒤 복잡한 정치적인 내용이 있을 수 있으나 이날 중종의 이야기는 분명하다.
이때 송인은 철원부사로 있던 아버지 송지한을 만나기 위하여 강원도로 내려간다. 중종은 철월부사보다 상급자인 강원감사 정순붕에게 지시한다. “(여성위 송인)을 위하여 먹을 것을 내놓을 때 국수와 떡은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다. 내놓지 않도록 하라.”
사위가 사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부마가 바깥나들이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아마 송인이 아버지를 만나는 일도 자주 있는 행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모처럼의 귀한 나들이다. 그런데 국수, 떡은 지급 금지다. 국수는 그토록 귀했다. 식재료도 문제지만 만들기 힘들고 까다로웠다. 중종이 ‘백성의 피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인조 2년(1624년)의 기록이다. 함경감사 최관이 병으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인조는 “지금 북관(함경도)의 일이 중한데 맡길 사람이 없다. 사직하지 마라”고 말한다. 사관이 뒷부분에 ‘의견’을 남겼다. “최관은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이다. 최관이 별미로 폐군(廢君, 광해군)에게 아첨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충(李?)의 잡채(雜菜), ‘최관의 국수’라고 말하면서 비난하였다.”
이충은 광해군에게 잡채를 받쳐서 벼슬살이를 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이른바 ‘잡채상서’다. 이에 빗대어 최관은 국수를 받쳐서 광해군의 총애를 얻었다는 뜻이다. 국수는 이토록 귀한 음식이었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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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