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주' 기록, 기와지붕 껍질 닮아 ‘와롱자’라고도… 겨울철 ‘벌교 꼬막’ 최고
꼬막, 오래 전부터 귀히 여겼다
고려시대에도 꼬막을 귀히 여겼다. 엉뚱하게 다산 정약용이 남긴 “목민심서”에 고려 꼬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시대 유석(庾碩, ?~1250)은 문관이다. 고려, 조선 모두 문신이 고위 무관직을 맡았다. 최이(崔怡)의 무신 정권 하, 유석은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가 되었다. 부정부패가 심하던 시절이다. 유석의 전임자 중 한 사람이 최고 실권자인 최이에게 ‘강요주(江瑤柱)’를 바쳤다. 뇌물 전례‘다. 문제는 강요주를 잡는 일이 힘들었다는 점. 고을 백성 50여 호가 강요주를 잡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유석이 강요주 잡이를 강요하지 않으니 이들이 모두 돌아왔다.
유석은 주변 관리들에게도 ‘강요주 잡이 금지령’을 내렸다. 주변 관리들도 최이에게 강요주를 바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이가 말했다. “유석은 제가 내게 바치지 않으면 그만이지, 무슨 일로 다른 이들까지 애써 금하려 하는가.” 유석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하자 백성들이 유임을 원했다. 유석은 3년 더 유임했다.
약 8백 년 전의 이야기다. 고려말기에도 이미 꼬막을 귀하게 여겼다.
유석의 벼슬은 동북면 병마사였다. 동북면은 한반도의 동, 북쪽이다. 함경도 일대를 이른다. 꼬막의 주산지인 남해안과는 거리가 멀다. 조정에 공물로 바치고 실권자에게 뇌물로 바쳤다면 그 지역에서 많이 생산된다는 뜻이다. 즉, 동북면에 ‘강요주’가 많았다는 뜻이다. 강요주는 꼬막일까?
흔히 ‘강요주(江瑤柱)’를 꼬막으로 해석한다. 예전 기록에도 강요주는 꼬막이라고 여겼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전남 벌교와 함경도는 너무 멀다. 예전에는 함경도에서 대량 생산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교산 허균의 <성소부부고_도문대작>에도 ‘강요주’가 나온다.
살조개(江瑤柱) : 북청(北靑)과 홍원(洪原)에서 많이 난다. 크고 살이 연하여 맛이 좋다. 고려 때에는 원(元) 나라의 요구에 따라 모두 바쳐서 국내에서는 먹을 수 없었다.
교산의 이야기대로 북청, 홍원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이 살조개, 강요주라면 유석의 강요주와 아귀가 맞는다. 두 사람 모두 동북면에서 강요주가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두 사람의 강요주는 꼬막이 아니라 ‘살조개’일 가능성이 높다. 살조개는 백합 목, 백합 과의 조개로 꼬막과는 다르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여석(金礪石)이 바닷조개(海蛤) 백 개를 바쳤다. 그 이름은 강요주(江瑤柱)인데, 비인(庇仁), 내포(內浦) 등지에서 생산된다. 날씨가 추울 때에 해구(海口)의 조수(潮水) 머리에 물이 줄어들고 진흙이 드러난 곳에 나는데, 혹시 나기도 하고 안나기도 하며, 그 맛은 보통 조개(蛤)와 같지 아니하다.
충청도 비인, 내포 일대에서 채취한 ‘강요주’를 충청도 관찰사가 바쳤다는 내용이다. 추울 때 해구, 조수 머리의 진흙이 드러난 곳에서 채취한다고 했다. 비인, 내포 지역은 오늘날 충청도 서천, 당진, 서산 일대다. 함경도와 멀다. 서해안이다.
함경도는 동해, 벌교, 고흥 일대는 남해안, 비인, 내포 지역은 서해안이다. 바다마저 모두 다르다.
꼬막은 ‘고막조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고막합(庫莫蛤)’에서 고막조개로, 꼬막으로 변했다. ‘합(蛤)’은 대합조개, 조개 등을 이르는 말이다.
꼬막, 수출품으로 유명해지다 약천 남구만(1629∼1711년)과 서계 박세당(1629∼1703년)은 조선시대 문신이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정치적으로 소론의 핵심 멤버로 사상가, 문인, 정치가다. 사적으로 약천과 서계는 처남, 매부 사이다.
“강요주(江瑤柱) 열 꼬치와 삶은 곤포(昆布) 두 주지(注之)를 약소하나마 이번에 회답하는 편에 올립니다.”
남구만의 <약천집>에 남아 있는, 서계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날짜도 정확히 적혀 있다. 1697년(숙종23) 8월1일(음력)이다. 서계는 벼슬살이를 끝내고 경기도 양주 수락산 언저리에서 ‘촌부’로 살았다.
약천은 영의정까지 지냈던 이다. 높은 벼슬아치들의 선물로 쓰였으니 귀한 물품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굳이 살조개, 꼬막 등을 가르지 않았던 듯하다. 오늘날 같이 , 새꼬막을 가르고 피조개 등으로 굳이 세분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강요주’라고 표현했다.
생산지도 특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 동, 서해안 전역에서 ‘강요주’가 생산된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중종 25년(1530년)에도 오늘날의 보성, 벌교, 여수 등지를 포함하여 남해안 일대와 안면도 등 서해안 일대에서 꼬막(강요주)이 생산된다고 했다. 유석과 교산의 ‘강요주’는 동해안 생산품이다. 동, 서, 남해안이 뒤섞여 있다.
1949년 5월1일 경향신문 내용 중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제목은 ‘약진한국수산좌담회’이다. 해방 직후였다. 이 기사의 내용 중에 꼬막이 있다.
꼬막이라고 하면서 ‘회패’라 표기하고, 중국에서는 혈합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혈합은 피조개다. 꼬막과는 다르다. 우리도 역시 꼬막이라고 하고, 회패라고 했다. 이름이 정확치 않다.
일본인들이 전남 여자만에 꼬막 양식장을 만든 것은 대략 1930년대 언저리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꼬막 양식이 없었다는 뜻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일본의 양식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일본 양식장과 비슷한 여건의 양식장을 찾은 곳이 바로 여자만이다. 여자만은 오늘날 꼬막 주 생산지 중 하나인 벌교, 보성, 고흥, 장흥 일대다.
한반도 꼬막의 역사는 길다. 그러나 꼬막을 다른 조개들과 분리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리 길지 않다. 약천 남구만, 교산 허균, 고려시대 유석 장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자산어보> 혹은 <현산어보> 등의 ‘강요주’ ‘꼬막’은 제각각 꼬막 혹은 강요주를 그리고 있다. 그중 꼬막도 있고 강요주도 있으리라. 혼란스럽지만 꼬막은 존재했을 것이다. 어느 것이 꼬막이고 어느 것이 살조개인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을 뿐이다.
사족으로 꼬막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삶는 방법이 중요하다. “지나치게 익지는 않게, 그러나 잘 익혀서”가 방법이다. 꼬막을 삶을 때 한 방향으로 젓는다. 전체 중 두어 개 정도가 입을 벌리면 다 익은 것이다.
꼬막을 미리 까두거나 꼬막에 양념을 더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공기에 드러나는 순간부터 꼬막 맛은 변한다. 삶은 꼬막을 상에 내면 각자 까먹는 것이 좋고, 양념 없이 먹는 것이 좋은 맛을 즐기는 방법이다.
[꼬막 맛집 4곳]
마시리벌교
대원식당
향토정
국일식당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