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돼지고기 문화 고려말부터 시작… 제사, 손님맞이 필수 음식

돼지고기를 양념한 모습.
가히 삼겹살 천하통일이다. 골목마다 삼겹살 전문 식당이다. 수육에 대한 수요도 만만치 않다. 수입산 돼지고기도 유행이다. 한반도의 돼지고기 문화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돼지고기에 얽힌 이야기다.

고려시대의 돼지고기 문화

하필이면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도 않는 돼지의 고기였을까? 고려의 고기 먹는 풍습에 대한 이야기다. 1123년 경 집필된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 高麗圖經)> 제23권_잡속(雜俗)2_도재(屠宰)에 나오는 ‘고기’ ‘돼지고기’ 이야기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중략)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양념한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
<고려도경>은 서긍이 사신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뒤 송나라 조정에 보고용으로 쓴 글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돼지고기에 대한 몇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보여준다.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모순이다. 고려는 공인된 불교국가다. 불교 때문이라면 국왕과 고위 관리들부터 솔선수범, 고기를 피하는 것이 맞다. 중국의 경우, 불교를 신봉했던 왕들이 왕실의 제사에 고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불교 때문이라면 왕과 귀족, 고위 관리들이 앞장서 살생하지 않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도축의 대상은 양과 돼지다. 고려, 조선시대 초기까지 ‘금살도감(禁殺都監)’이 있었다. 살생하지 마라, 가축을 도축하지 마라는 뜻이다. 대상은 소다. 소 도축은 금하면서 대신 닭, 돼지 등을 길러서 도축하자고 권한다. 모순이다. 왜 소는 금하면서 대신 돼지, 닭을 길러서 도축하자고 했을까? 소, 돼지, 닭 모두 생명체다. 다만 소는 농사를 짓는데 필수품이었다. 불교는 핑계일 뿐 실제 도살을 금한 이유는 농사 때문이다.

양, 돼지 등의 고기는 언제 사용하는가? “사신이 올 때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한다”고 했다. 음식의 주요 사용처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의 필수품이 음식이다. 고려나 조선 모두 마찬가지. 국가의 제사는 조선시대 종묘의 제사다. 국가의 손님은 중국 사신이다. 송나라 사신이니 미리 양과 돼지를 준비한 것이다.

이른바 돼지고기 중 '마구리' 부분. 짧은 갈비 부분이다.
가축이 귀한 시절이다.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사냥을 해서 고기를 마련하는 일도 잦았다. 국경 부근의 백성들이 사냥에 동원되니 농사를 망친다는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고기는 귀했다. 소와 말을 피하고 나면 겨우 양, 돼지, 닭 등이 남는다. 어떻게 먹었을까?

“국과 구이를 만든다”고 했다. 국(羹, 갱)은 구이보다 발전한 모델이다. 날고기를 썰어서 불에 구워먹는 것보다는 그릇에 넣고 끓여서 먹는 국이 선진적이다. 고려시대에는 국과 구이 모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귀한 식재료를 사용하여 국과 구이를 만들었는데 막상 냄새가 너무 심해서 먹기 힘들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찡그린 얼굴이 떠오른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1037년 태어나서 1101년 죽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돼지고기 장 졸임 ‘동파육(東坡肉)’은 소동파가 시작한 음식이다. <고려도경> 100년 전에 중국에는 ‘동파육’ 같은 선진적인 조리 음식이 있었다.

고구려의 결혼 풍습, 돼지고기가 예물이라

고기는 유목, 기마민족의 중요한 먹을거리다. 깊은 산속 혹은 북방의 너른 터를 떠돌며 살았던 북방 기마, 유목민족들은 고기를 손질하거나 먹는 일이 익숙하다. 고기는 유목민족의 식량이다. 지금도 몽골 인들은 짐승을 유목으로 기르고 또 주식으로 삼는다.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 우리와는 다르다.

돼지고기 꼬치.
우리도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고구려, 부여 등은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의 피가 백제를 통해 한반도에 스며들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1712∼1791년)이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나오는 부여의 돼지 이야기다.

“(부여는) 육축(六畜)으로 관직의 이름을 지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가 있다. 읍락(邑落)에는 토호[豪]가 있어, 백성을 하호(下戶)라 하여 모두 노복(奴僕)으로 삼으며, 가(加)들은 각각 따로 다스리는 땅이 있는데, 큰 것은 수천 집이고 작은 것은 수백 집이다.

부여의 연맹체를 구성하는 중심세력 중 하나는 저가(猪加)였다. ‘저(猪)’는 돼지다. ‘가(加)’는 윗글에 나타나는 대로 지역을 다스리는 이 즉, 족장(族長)을 뜻한다. 돼지 토템을 지닌 부족의 족장이 바로 ‘저가’다. 부여인들의 돼지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아니라 산속 멧돼지일 가능성이 높다. 멧돼지든 기른 돼지든 돼지는 부여사람들의 가까이 있었다. 고구려 시대에는 돼지가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제사상에도 돼지를 사용했다. 돼지는 결혼 예물로도 등장한다. 중국 <북사(北史)> 고구려(高句麗) 편이 전하는 고구려의 결혼 풍습이다. 돼지고기가 나타난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 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불판 위에 올려둔 모습.
지금과 비교해도 낭만적이다. 서로 사랑하면 결혼시킨다. 재물을 받지 않고 돼지고기와 술 정도의 예물(?)이면 넉넉하다 여긴다. 고기는 귀하지만 아주 드문 식재료는 아니었다. 부여, 고구려는 기마민족의 나라다. 고려 역시 백제를 통해 기마민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고려인들이 왜 돼지를 미숙하게 다뤘는지 알 수가 없다.

돼지는 고려 말기 이후, 서서히 우리 역사에 등장한다.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문화, 문물이 활발하게 교류한다. 세계적 대 제국을 세웠던 원나라는 외부의 문물을 고려에 전한다. 고기를 잘 다뤘던 이들이다. 고려의 고기 문화는 급격히 발전한다.

고려시대 고기 문화는 두 차례 한반도에 전래된다. 한번은 몽골의 침략기, 또 한 번은 그 이전의 거란 침략기다. 거란 역시 고기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조선 초기 기록에 거란의 고려 침략과 고기 문화 전래가 나타난다.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다.

“(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중략)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중략)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냥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중략)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후략)”

갈비 부분을 수육으로 삶고 있다.
백정, 화척, 재인, 달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소를 도축하거나 동냥질, 도둑질을 한다.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다. 굶주리는 이들이 늘어나면 도둑이 된다. 사회 질서 방해 세력이다.

이들은 언제 한반도에 왔는가? 5백 년 전 혹은 수백 년 전이다. 5백 년 전은 거란의 고려 침공 시절이다. 거란의 1차 침략이 993년이다. 2차 침략은 1010년, 3차 침략은 1018년이다. 1차 침략기와 상소문을 올린 1456년을 비교하면 460년 전이다. 거란의 침략 때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들이 전쟁 후 한반도에 남았다. 고려의 북방 국경선 너머에는 늘 기마, 유목민족들이 있었다. 이들이 침략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고 고려 땅에 남은 것이다. 생업은 고기를 만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고려 사람들은 고기 만지는 일에 서툴렀다. 그들에게는 한반도가 ‘블루오션’이었을 것이다.

‘수백 년 전’은 몽골의 고려 침략기를 말한다. 이때도 고기를 만질 줄 아는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 고기, 도축에 서툰 고려 사람들에게 도축, 고기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 돼지고기 문화는 고려 말기부터 시작된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돼지고기 맛집 4곳]

안동돼지갈비/서울 등촌동

돼지갈비로 유명한 집이지만 생갈비가 추천 메뉴. 소금을 뿌린 생갈비가 돼지갈비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여러 종류의 밑반찬들도 직접 만드는 것들.

더두툼생고기/서울 상일동

양념갈비도 좋지만 목살이나 삼겹살도 아주 좋다. 소금도 철저히 가려서 쓴다. 고기를 오랫동안 만진 이가 숙성 정도를 직접 조절한다. 밑반찬도 깔끔하다.

성산왕갈비/서울 성산동

돼지 왕갈비는 대략 1-5번의 돼지갈비를 뜻한다. 살집도 넉넉하고 맛도 다른 부분보다 깊다. 제대로 된 왕갈비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4인분을 주문하는 것이 요령.

소주한잔/ 전북 익산시

고기, 숯불이 좋고, 특히 냄비 밥이 일품이다. 삼겹살 등과 더불어 냄비 밥을 미리 주문한다. 냄비밥을 퍼낸 후, ‘쌀밥’을 주문하면 아주 맛있는 누룽지를 먹을 수 있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