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 속의 춤추는 요정처럼'최초'란 수식어로 가득한 한국대표 발레리나

[감성 25시] 강예나
순정만화 속의 춤추는 요정처럼
'최초'란 수식어로 가득한 한국대표 발레리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 사물이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제 한국에 가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어요.” 13살에 영국 로열 발레스쿨에 입학하고 워싱턴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한 여자.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수석무용수를 거쳐 한국인 최초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 무용수가 된 여자. 발레리나로선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희망을 잃지 않은 여자. 자신의 직감에 충실하고, 무서운 추진력을 가진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 발레를 통한 욕망의 충족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집은 친구들에 비해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사립 유치원 때부터 부유한 친구들 틈에 끼어서 자신이 그리 특수한 아이가 아님을 일찍 깨닫는다. 그들과 구별되는 자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소녀를 불안과 초조로 몰고 갔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일찍 한글을 터득해 혼자서 위인전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이 교육을 잘 받은 부잣집 아이들 속에서 더 이상 빛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에게 유일한 낙은 피아노를 치거나 위인전을 탐독하는 일이었다. 소녀는 퀴리 부인이나 헬렌 캘러, 잔다르크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로 읽었다. 그녀들의 고통에 같이 울었고, 그것을 극복했을 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소녀는 훗날 뉴욕의 기숙사 방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걸어 놓고 가슴속에 새겼던 위인들의 삶을 자화상처럼 받아들이며 생활한다. 소녀는 발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나갔고 ‘한국인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자신의 발레 인생을 엮어 나간다. 그 소녀가 바로 발레리나, 강예나다. 욕심 많고 꿈 많던 소녀 강예나는, 어느새 숙녀가 되었다.

“이제 어른이죠. 19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했으니, 사회적인 나이로는 서른 중반에 버금가는 나이죠.” 도도하게 말하지만 아직 그녀의 이미지는 소녀다. 긴 생머리에 길고 아름다운 목선, 커다란 눈망울의 발레리나. 모든 소녀들이 꿈꾸는 순정 만화 속의 이미지를 그대로 지닌 그녀에게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성숙미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녀에서 숙녀로 한번에 자란 느낌이 전해져 온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추진했어요. 그래서 일에 있어선 완벽한 어른이예요. 하지만, 중학교 때 떠나 그 나이가 겪어야 할 사춘기 시절의 갈등이나 사랑, 소소한 일상들은 잘 몰라요. 서투른 거죠….”

그녀에게 성장이란 갑자기 배워야 하는 이국의 언어와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과도 같은 일들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성장하고 일찍 어른이 된다. 모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오랜 이국생활 탓에 잠시 허둥대는 모습을 발견할 때에는, 숙녀 속에서 앳된 소녀가 숨박꼭질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상적인 것들엔 젬병인 그녀. “사실 상실감이 커요. 세금, 보험, 재태크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면요. 아! 나는 발레리난데 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죠.” 이럴 때 그녀는 소녀 같다.

-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입단 직후 첫 작품 ‘돈키호테’의 솔리스트급인 ‘플라워 걸’이 행운처럼 다가왔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늘 상냥하지만은 않았나 보다. 발레리나로선 치명적인 무릎인대 파열사건은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릎에 십자 모양의 나사를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강예나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이게 끝이 아니야. 더 좋은 기회를 위해 나를 시험하는 거야”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녀. “막연하게나마 더 나은 날이 올 거라는 예감 같은 걸 느꼈어요.”

최고의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꾸준한 재활훈련과 개인 트레이닝과 체조, 마사지로도 하루가 모자랐던 그녀는 덕분에 상실의 시간을 바쁜 일정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나란 사람이 발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죠.”

상실의 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눈물을 흘리거나 침울해 하지 않았던 그녀를, 울게 한 사건이 있었다. “여름에, 정말이지 고된 연습 후에, 매점에 갔는데…. 먹고 싶은 복숭아 요쿠르트가 없는 거예요. 지친 내 몸은 그걸 원하는데, 내가 이런 거 하나 맘대로 못 먹나, 주저앉아 엉엉 울?말았어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는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살짝 눈물을 보였다. “웃기죠? 사소한 것에 눈물을 흘리니 말이예요”

그녀는 발레리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버린다. 발레리나인 그녀가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다니…. 그녀는 고된 연습으로 인해 피곤한 몸이 원하는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시켜 주어야 춤도 잘 출 수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녀는 소박하다. 맛있는 집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우울할 때는 혼자 노래방에 들어가 노래도 부르고, 모든 장르의 음악을 소화할 만한 감성을 지녔고,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술을 마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하루키의 감각적인 문체에 사로잡히고, 냉철한 지성과 명료한 분석력으로 영화와 연극을 비평하는 안목 또한 지니고 있다. “발레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한국 영화를 너무 사랑하지만, 제대로 된 발레 영화 하나 없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져서요.” 강예나는 언젠가 영화에서, 혹은 영화의 제작에 참여할지도 모르겠다.

- ‘백조의 호수’ 오데단역에 몰입

그녀는 “발레는 제 인생의 일부일 뿐이예요” 라고 말한다. 그렇담 그녀는 다른 인생을 준비 중인가? 혹시 후배양성에 뜻이 있는지 물어보니 “저는 선생 자질이 부족해요. 왜냐면 발레리나를 꿈꾸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도 슬퍼져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제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죠. 이런 감정을 초월한 자만이 가르칠 수 있는 거예요” 강예나는 자신에게는 냉정한 선생이지만 타인에게는 혹독하지 못한가보다.

얼마 전 한국에서의 데뷔 무대인 ‘라 바야데르’ 에서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비극의 여주인공 니키아 역을 성황리에 끝낸 덕에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그녀는 다음 작품 ‘백조의 호수’의 오데뜨 역할에 몰입할 준비를 한다. “금세 새 작품에 들어가야 해서, 낯설기도 하지만 어느새 오데뜨의 내면에 몰두해 있는 나를 발견해요.”

그녀는 프로다. 그녀가 앞으로 살게 될 제 2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만은 확실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 강예나가, 직감에 충실한 그녀가,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을 현명함으로 바꿀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이야기를 읽은 발레리나 지망생은 그녀를 동경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는 조용히 말하겠지. “얘야, 너의 직감에 충실해라. 네가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고, 너의 판단이 옳음을 세상에 증명해라.” 오늘도 그녀는 무대위에서 춤, 춘, 다.

유혜성 지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3-23 21:25


유혜성 지유기고가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