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철, 적자철, 개텍스…'꿈의 속도혁명' 수식 불구 끊임없는 고장과 운행장애도 안팎서 질타'혁명적 조직개선' 없이 만성적자 등에서 못 벗어날 듯

'오명천국' 고속철,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망신
고장철, 적자철, 개텍스…
'꿈의 속도혁명' 수식 불구 끊임없는 고장과 운행장애도 안팎서 질타
'혁명적 조직개선' 없이 만성적자 등에서 못 벗어날 듯


'스타’의 이름 앞에는 으레 수식어가 붙는다. ‘ 국민 배우 OOO’, ‘ 만인의 연인 XXX’, ‘ 칼립소의 제왕’, ‘ 정치 9단’…. 이들 수식어는 당자의 기량과 업적이 장구한 시일 동안 대중적으로 검증 받으면서 이름과 한 몸을 이루게 되고, 더러는 역사에 남기도 한다.

수식어는 그래서, 대중적 검증이 이루어지기 전에 조작되는 경우도 많다. 선전ㆍ선동의 수단으로 혹은 우수마발과의 차별화 방편으로 그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 디스코의 제왕’이라면 코 푸는 몸짓조차 현란한 춤 동작으로 착각하는 이가 없지 않은 게 현실이고, 돈줄 막겠다며 후보자들의 입까지 봉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지난 총선에서도 ‘수식어의 마력’으로 재미를 본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 범죄사회학에서는 ‘낙인(烙印)이론’으로 설명한다. 동생 과자 뺏어먹는 꼬맹이에게 “ 어이구 내 새끼, 착하~지!”라는 한 마디로 제 입에 든 것까지 내어주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선험적 이미지로서의 수식어는 폭발적 상승 작용이 아닌 파괴적 자멸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선험적 수식이 경험을 통해 과장된 것으로 확인되고 실망으로 이어지면, 이번에는 흠집내기와 트집잡기가 과도해진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 지경에 이르면 ‘스타’ 본인이야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미화할 지 모를 일이나, 대중들에게는 낯뜨거운 에피소드의 우스꽝스러운 엑스트라 정도로 얼마간 기억하다가 잊어버리기 십상. 이후 비슷한 촌극이 재현될 때 기억력 좋은 전문가들이 반면교사의 사례로 한 두 차례 환기시켜 주는 행운이 있을 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 현란한 수식의 덫에 걸린 고속철

두고 볼 일이긴 하나, 단군성조 개국 이래 최대의 역사(役事)로 불리는 ‘ 고속철’의 수난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개통 전까지 고속철은 ‘ 속도 혁명ㆍ생활 혁명’, ‘ 21세기 최적의 교통 대안’, ‘ 꿈의 열차’, ‘ 첨단 기술의 총아’ 등 상상력의 한도를 치받는 현란한 수식어를 늘 동반했다. 철도청이 수십억원의 홍보 예산을 쏟아 부으며 신문과 방송을 현혹시킨 성과였다. 또 사업 성격과 의미로 보나, 외형적 규모로 보나 고속철은 그 정도의 대접이 필요했던 것도 한 편으로는 사실이다.

프랑스 알스톰이 제작해 국내에 들여온 고속철 동차는 프랑스 선로 시험운행에서 시속 500㎞를 거뜬히 주파했고, 좌석을 들어 내고 이뤄진 국내 전용선로 시운전에서도 20량 객차를 달고도 350㎞를 넘나 들어, 가히 육상교통 지존의 하드웨어다. 1899년 국내 최초의 증기열차 ‘모걸(mogul)1호가 서울-인천 간의 경인선 33㎞를 시속 20㎞의 속도로 1시간 40분만에 주파하자 당시 독립신문은 ‘ 나는 새도 따르지 못하더라’며 경탄했지만, 고속철은 서울-부산 408.5㎞를 2시간40분만에 간다는 것 아닌가. 2010년 전용선이 완공되면 1시간56분 거리라니, 가히 ‘ 나는 새’다.

1989년 5월 고속철도 건설사업이 국책사업으로 결정된 뒤 정권의 부침과 경제위기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2년 만에 이뤄졌다는 극적인 효과와 국민 1인당 약 43만원(4,300만명 기준)의 세금을 들였다는 자부심도 한몫했다. 이론상 교통 혼잡비용과 교통경비 절감효과가 연간 1조8,500억원(2005년 기준)에 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먹혀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통 직후부터 반복된 고장과 운행 장애, 형편없는 서비스와 불편한 시설, 역방향 좌석, 전시 수준에 그친 장애인 편의시설 등 숱한 문제들로 화려했던 수식어들은 자취를 감추고 ‘고장철’ 등 오명만 난무하고 있다. 고속철 등장으로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 일반 열차는 선로 지분의 대부분을 내어 줘 2ㆍ3등 열차로 명맥만 유지하게 됐고, 통일호는 아예 운행을 중단했다. 하루 아침에 값싼 열차의 선택권?빼앗긴 승객들의 불만은 거세다. 그들에게 고속철은 ‘귀족철’이다. 그러다 보니 승객도 당초 예상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실정이다.

연간 철도 수송수입으로 3만여명 직원들 월급 주면 남는 게 없고 시설 투자ㆍ보수는 정부 예산에 대부분 의존, 1조5,000억원의 빚을 진 게 철도청의 장사였다. 거기다 고속철 도입으로 10조2,000억원(지난 해 말 현재)의 부채가 얹혔으니 ‘ 만성 적자 탈출의 견인차’로 칭송됐던 고속철은 이제 ‘ 적자철’이라는 새로운 오명까지 쓰게 될 판이다. 좌석을 더 만들어 이문을 챙기자며 채택한 역방향 좌석이 소탐대실의 전형으로 철도청 내ㆍ외부의 질타를 받고 있다. 그 뿐인가. 나쁜 점, 부족한 점은 철저히 감추면서 좋은 점만 떠벌리고, 수천만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제작예산까지 지원 받아 가며 공중파 방송을 고속철 홍보 수단으로 이용했던 KTX(한국고속철도)는 이제 “ 개텍스”라는 모멸적인 칭호까지 얻어 듣고 있다.

- 아직 멀었다

따지자면 철도청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고장에 따른 연착 등 정시율만 하더라도 초기 선진국 수준보다 양호한 편이다. 역방향 좌석 역시 포항공대 연구 용역 결과 ‘ 진행방향을 약 3배 가량 선호하긴 하지만 역방향에 대한 불만도 크지 않다’고 나타났다. 프랑스 TGV와 유로스타, 스페인 AVE, 독일 ICE 등이 모두 고정식(역방향 좌석 포함)이라는 사실도 선전됐다. 하지만 완벽한 개통준비와 하루 평균 2차례 꼴의 고장은 체감지수상 엄청난 편차가 있다. 철도청은 역방향 좌석도 유럽 사례만 예를 들었지, 초기 고정식을 선택했다가 모두 회전식으로 바꾼 일본 신칸센의 경우는 함구로 일관했다. 구시대적 의사 결정 구조와 낡고 편의주의적인 홍보 전략의 업보다.

다만 한국 고속철이 주장하는 바, “ 반쪽 성공의 원죄는 정치권에 있다”는 항변만은 귀담아 들을 만 하다. 고속철의 연원은 1973년 철도차관 도입과 함께 세계은행(IBRD)의 경부 축에 대한 새로운 철도 건설 건의가 나오면서부터. 78~81년 총리실과 교통부(당시) 주관의 연구용역 결과가 일치하자 정부는 83년 경부고속전철 도입 타당성 조사를 시작했다. 88 올림픽 직후 넘쳐 나는 외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정부는 이듬해 경부고속철과 신공항을 건설한다는 단안을 내렸고, 89년 7월 고속전철 및 국제공항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천안-대전 시험선 구간 착공은 92년 6월부터.

하지만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정치권이 아니어서 93년 대선당시에는 백지화공약이 나오기도 했고, 투자예산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당초의 100% 전용선 계획이 ‘기존선 활용’으로 변질됐다. 여타 국가의 경우, 고속철 초기에는 전체 수송 수요의 10~20%선에서 편성하고, 일반 열차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고속철 개통과 함께 일반 열차의 대폭 감축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게다가 DJ정권 출범이 한몫 더 했다. 즉, 국토 균형 발전의 명분으로 예정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투자 효율성마저 무시된 채 호남 고속철 사업이 시작됐던 것이다. 우려는 현실화됐다. 호남 고속철은 4월 개통 이후 지난 주말(18일)까지 평균 39.8%의 승차율(좌석대비 승객수)에 그쳐, 경부선(67.9%)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속철이 상업 운전을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안된 상황인 만큼 고속철 개통의 성적을 매기는 것은 이를 지 모른다. 고속철에 대한 여론의 향배 역시 아직은 유동적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철도청과 내년에 출범할 철도 공사의 체질 개혁 없이 고속철의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한국철도 105년의 역사는 시속 20㎞의 모걸 1호에서 300㎞대의 KTX로 ‘하드웨어 혁명’을 이뤘으나, 조직의 경영ㆍ개혁 소프트웨어는 아직 멀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최윤필기자


입력시간 : 2004-04-27 21:44


최윤필기자 walde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