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늑대인간이 되어 순수의 영화를 쓴다영화감독이란 수식이 더 잘 어울리는 시인

[감성 25시] 유하
밤마다 늑대인간이 되어 순수의 영화를 쓴다
영화감독이란 수식이 더 잘 어울리는 시인


“사람들은 저를 ‘말죽거리 잔혹사’ 감독으로 알지 시인인지는 모르더라구요. 시로 데뷔하고 시인으로 더 오래 있었는데, 참 아이러니 하죠.”

시인 유하와 비는 잘 어울렸다. 비를 머금은 바람 속으로 그가 피워내는 담배 연기가 모호한 그림을 그려냈다. 소설가 김영하는 그를 ‘늑대인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밤마다 혼자 있을 때 덩치 큰 이 남자는 홀로 ‘기괴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 진이정 시인은 그를 ‘0킬로그램의 요정’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그의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지금 그는 큰 키에 무척 마른 편이다) 깜찍한 이 별명은 모두, 187cm에 거대한 체구를 가진 이 남자가 시를 쓰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이제 밤마다 늑대 인간의 본성으로 또한 요정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쓴다.

- 압구정동을 뜨게 만들었다

‘무림일기’로 데뷔해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를 발표하고,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대중 앞에 나타난 유하. 그가 압구정동을 ‘뜬 동네’로 만든 장본인임을 우린 알고 있다. 첫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실패 이후(그가 애초 구상했던 우디 앨런식의 블랙 코미디가 제작사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변질돼 캐스팅 위주로 흘러갔던 탓, 그리고 1993년 한국 영화를 방화 정도로 생각한 대중의 인식도 결과에 한 몫 한다) 그는 줄곧 시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2002년 결혼 제도에 대한 쿨 한 태도를 보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다시 영화계로 돌아 왔다. ‘말죽거리 잔혹사’ 의 흥행 이후로 시인 유하 보다, 감독 유하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릴 수밖에 없는 남자. 하지만 유하의 영화는 모두 시적이다. 그의 영화 곳곳에는 시적인 장치가 꾸며져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씬(장면)과 씬(장면) 사이에서 느껴지는 여운과 서정성은 시에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생략법과 닮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폭력이 잠재한 학교라는 정글의 공간과 순수한 사랑을 시작하는 멜로의 공간이 대립을 이룬다. 매듭을 짓지 않고 관객에게 묻는 열린 결말 또한 유하가 부러 의도한 구조다. 모든 결말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기.

“도시에 살지만, 제 맘속에 ‘하나대’ 라는 고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저의 핵 체험의 근원지죠. 제 시와 영화는 모두 하나대에서 출발합니다. 그곳은 저에게 이데아 같은 곳이죠.”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라는 시도 ‘하나대에 온 촌놈’이 산책자의 시각으로 압구정 문명의 변화를 기록한 시라고 스스로 말한다. 또한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 현수(권상우)도 강북에서 강남으로 전학 온 순진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 그대로이다. 검고 짙은 눈썹과 두툼한 입술은 그를 야성적인 남자로 만들지만 반면에 잘 정돈된 가지런한 손톱과 다듬어진 턱과 깔끔한 머리 손질, 그리고 시를 쓰는 감성은 그를 부드러운 남자로 만들기도 한다. ‘늑대인간’과 ‘요정’ 두 가지 대립된 모습이 함께 공존해 있는 남자.

“오히려 순수했던 시절이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10대는 20대처럼 경험을 할 수 있는 나이도, 30대처럼 노련함을 가진 나이도 아니죠. 좌충우돌하는 나이. 자신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하니, 몸으로 보여줄 수 밖에요. 패싸움이나 하며 난폭해지는 거, 그러면서 마음을 엉성하게 드러내는 거죠. 상상력을 동원하지 못하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요. 그것이 10대의 비극이고 그들만의 특권이죠. 간절한 떨림이라는 서정이 있으니까요.”

- ‘말죽거리 잔혹사’엣 그린 순수의 사랑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70년대 소년 소녀에게 로망이었다. 그 때 소년은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우연성을 선택한다. 확률은 희박하다. 소년의 고백이 소녀에게 전달되면 잘 될 경우 두 사람은 떨림으로 청춘을 맞이한다. 이것이 70년대식 사랑이다. mp3처럼 다운받아 듣는 선택된 사랑이 아니라, 우연에 기대고 마냥 기다려야 하는 맹목적이고 순수한 사랑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는 조용히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쓴다. 또 좋아하는 여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기타를 연습하는 순진한 남자다. 이런 현수의 모습은 바로 감독 유하의 사춘기 모습이기도 하다.

“어릴 적 저는 무협 영화광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고창에 있던 중앙극장을 가곤 했죠. 자연스럽게 저는 무협지광이 되었고, 사춘기 시절 이소룡을 흉내 내고 좋아하게 된 거죠. 이소룡을 좋아하는 건 그 시대 아이들에게 반항이며 동시에 아름다운 일탈인 셈이죠. 그런 체험이 제 시 ‘무림일기’의 창작 동기가 됩니다.”

유하의 어릴 적 꿈은 영화 감독이었다. 그가 시만 썼을 때는 그저 꿈에 불과했던 말이다. 베개를 장구 삼아 춤을 추고 노래했던 그다. 단지 주목받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건 배우의 끼와는 달랐다. 유독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했던 그는 단지, 스크린 속의 예쁜 여배우들에게 반했고, ‘저 여인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싶다’ 라는 단순한 욕망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유하는 그것을 가리켜 속물적인 욕망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건 오히려 순수에 가깝다)

대학 때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따라 우연히 들게 된 연극 동아리가 그가 영화에 첫발을 들여 논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영어연극 ‘아메리칸 드림’에서 ‘영맨’이라는 주연을 맡게 되었고, 연극을 하면서 느끼게 된 짜릿한 감정과 마쳤을 때의 성취감과 느껴지는 사무치는 감정이 좋아, 4학년 졸업반 때 ‘게으름의 찬양’이란 8㎜ 단편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되었다. 영화를 더 알고 싶어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먼저 시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의 배경엔 언제나 영화가 중심에 서 있었고, 시는 그의 곁에서 숨을 쉬며 세상을 향한 언어의 몸짓을 가르치고 있었다.

- “결혼은 미쳐야 하는 것”

정말 결혼은 미친 짓인가요? 라는 질문에 그는 결혼은 미쳐야만 하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결혼 제도를 비판하거나 결혼한 자신에게 돌리는 말이 아니다. “사랑에 미쳐야 결혼하는 거죠. 무엇을 하든, 무엇이 되든, 미쳐야만 그것을 할 수 있죠. 미치도록 사랑하기, 정말 어렵고도 단순한 로망이죠. 그게 바로 순수 서정의 세계 같아요.” 어쩜, 결혼이야 말로 시이고,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피워내는 순수 서정 로망의 세계일지도. 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게 또한 결혼 아닌가.

“시가 저를 버린 게 아닌지 불안해요. 지금 제 육체는 영화로 만들어져 있죠. 몸을 만들 듯이 시라는 육체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정신을 쏟아 부어야 시가 탄생하죠. 지금 제 육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육체예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시의 육체를 만드는 것은…”

문학이 정말 그를 버렸을까.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백상 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에서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 그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이력도 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대중에게 선사하는 영화는 그의 마음속의 고향 하나대를 근원으로 하는 ‘시’ 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은 사람들…. 비오는 날은 유하를 만나러 싸이더스에 가자. 그가 거기서 순수 로망 청춘물 영화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유혜성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5-04 17:30


유혜성 자유기고가 comet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