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지휘하는 '나는 새'클래식 음악회 대중화에 앞장 선 유라시안 오케스트라 CEO

[리더탐구 성공의 조건] 지휘자 금난새
행복을 지휘하는 '나는 새'
클래식 음악회 대중화에 앞장 선 유라시안 오케스트라 CEO


‘행복이 흐르는 음악회’, ‘음악그림’, ‘음악 속의 수수께끼’. 제목부터 톡톡 튀는 음악회의 지휘자이자 벤처오케스트라를 표방하는 유라시안 오케스트라의 CEO.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한 연주자. 그가 바로 금난새다. 그는 무엇보다도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앞장 선 사람이다. 클래식을 딱딱하고 무겁게 느끼는 일반 사람들에게 친절한 해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발상은 신선하다. 덕분에 그가 하는 연주회는 늘 만석이다.


- 치밀하고 이성적인 음악가

‘나는 새’라는 뜻의 순 우리말 금난새. 광복 이후, “나라도 찾았는데 우리 말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 는 의미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세모시 옥색치마…” 로 시작되는 유명한 그네를 만든 금수현씨가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한동안 그는 금난새란 이름보다는 금수현의 아들로 인지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작곡가, 선생님, 관료 등 다양한 경력을 가졌고 국회의원에도 도전했었다.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이디어가 많고, 시대를 앞서는 생각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아버지셨다. 그의 어머니는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 피아노를 혼자 칠 정도로 음악적 소질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유전인자는 중요한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실감난다. 아버지는 정치적 야망을 접은 후에는 음악관련 잡지를 내는데 평생을 바쳤지만 경제적으로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가정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정릉의 300평 집을 개조해 유치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여 자식들을 키웠고 아직도 유치원 경영을 맡고 있다. 어머니는 적극적이지만 섬세한 성격이고, 아버지는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고루 닮았다. 아버지로부터는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현실에 몸을 담고 세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상주의자 아버지,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어머니 밑에서 ‘꿈은 필요하지만 너무 멀리가면 안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상주의자지만 황당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치밀하고 이성적인 음악가이다.


- 형의 죽음과 인생관의 변화

4남 1녀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위의 형이다. 그의 형은 전형적인 엘리트였고 집안의 기둥이었다. 일류학교를 다녔고, 음악적 소질이 있어 바이올린 연주를 잘 했다. 또 그것을 응용해 톱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다. 덕분에 당시 유명했던 MRA 소속(도덕재무장운동)으로 세계를 누비며 연주를 하기도 했다. 한 번도 동생들과 다툰 적이 없고, 문제를 가져오면 늘 해결하는 것도 형의 몫이었다. 애국심도 강해 충분히 안 갈수도 있었던 군대를 자원 입대하기까지 했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한 마디로 완벽한 형이었다. 형은 그에게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넘지 못할 큰 산이었다. 그래서 늘 투정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던 형은 귀국을 얼마 앞두고 큰 사고를 당했다.

1974년은 그의 인생에 가장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부상당한 형이 귀국하는 것을 보자 그는 독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유학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입학시험에 떨어져 청강생 자격으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감도 상실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에서 그는 낙담?하며 지낸다. 그러던 그에게 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에게 하늘 같았던 형의 죽음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한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방황한다. 형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 이전의 금난새는 책임을 지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남에게 책임을 넘기는 사람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그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무엇보다 책임감이 그를 엄습했다. 자신이 집안의 장남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했다. 더 이상 믿을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형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겠다, 형의 몫까지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고,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오래 전의 얘기지만 형의 얘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직도 형은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형의 죽음으로 그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 현실에 대해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열심히 살기로 결심한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청강생 자격이었지만 1년 만에 정식으로 입학이 허락되고 급기야 수석 졸업을 하는 영광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공부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동네 노인 합창단의 지휘를 했고, Silver Orchestra를 이끌었으며, 발레교습소에서 피아노반주를 하기도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독일 사회를 알고 싶은 목적이 더 컸다. 독일은 그에게 제 2의 고향과 같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형의 죽음, 독일의 영향으로 금난새는 다시 한 번 태어난다.


- 음악가 이전에 경영인

그는 사소한 것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청중이 몇 명이고 어떤 사람이든, 음악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음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1977년 카라얀 국제 콩쿨대회 당시의 일이다. 그는 3위에 입상했고 입상한 사람에게는 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할 자격이 주어지고 오후로 지휘 스케줄이 잡혔다. 그런데 그 동안 돌보던 동네 노인 합창단의 발표회 날짜가 공교롭게 지휘 스케줄과 겹쳐진 것이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노인 합창단 단원들은 안 와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는 마음이 편칠 않았다. 몇 시간 빈 틈을 이용해 연주회장을 빠져 나와 노인 합창단 연주회를 지휘하고 다시 시상식장으로 돌아왔다. 사라진 그 때문에 난리가 났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도 노인 합창단 지휘도 똑같이 중요한 연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지휘자가 아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기업처럼 운영하는 경영인이다. 명함에도 CEO라고 새겨서 다닌다. 고객이 누군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알고 이를 만족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음악은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것이란 철학을 갖고 있다. 뜻도 모르는 연주만 지루하게 듣다 가는 일반인을 위해 음악회에 해설을 깃들였다. 무겁고 딱딱한 클래식음악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만들었으며, 앞 부분은 어떤 의미이고 뒷부분은 무엇을 묘사했는지를 알면 다르게 들린다. 알면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도 클래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또 어려서부터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10년 전부터 청소년 음악회를 꾸준히 열어왔다. 그의 남다른 생각은 무대 위에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그는 지휘자이지만 가장 늦게 퇴장한다. 지휘자만 청중의 많은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고, 나머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쓸쓸하게 조용히 퇴장하는 음악회의 관행에 씁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 함께 열심히 연주했으니 청중의 박수도 다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 지휘자가 마지막에 퇴장하는 새로운 원칙을 만들었다. 청중이 마지막까지 감동의 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물론이다.


-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가치 중심적인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치에 합당하면 어려운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KBS오케스트라의 전임지휘자로 12년간 정상의 자리에 있었던 그가 무명의 수원시립 오케스트라를 맡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금난새가 ?겨났다” 라는 말도 들었고 여러 구설수에도 시달렸다. 그의 원칙은 간단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는 간다는 것이다. 당시 수원오케스트라는 여러 어려움에 빠져 있었고 무언가 돌파구를 찾으려 했고 그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청중이 있어야 하고, 청중과 좋은 음악을 나누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가 많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수원으로 향했다. 연습실도 없고 관객도 별로였던 수원시립 오케스트라를 야외음악당까지 있는 일류 오케스트라로 변모시켰다. 유라시안 오케스트라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그와 단원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현재는 연 90회에 이르는 연주회를 하고 있다. 무모한 도전은 위험하다. 그러나 뜻이 있는 도전은 아름답다.

그의 가장 열렬한 팬은 가족이다. 떨어져 살기는 하지만, 가족들의 응원은 그에게 가장 큰 힘이다. 그의 가족은 또 하나의 작은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가이며 두 아들 수준급의 피아노실력을 자랑해서, 다같이 모일 때면 가족연주를 하기도 한다. 특히, 경영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은 이번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 드보르작 5중주를 연주하기도 했다. 음악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음악과 함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온 가족이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건전한 오케스트라의 모델을 보여주고 싶다,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악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유학시절 지휘자가 되겠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온 한국 청년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음악을 가르쳐 주었던 독일 선생님처럼, 자신이 가진 지식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것도 그의 소망이다. 바쁜 일정에도 오디션을 원하는 젊은 음악도의 요청을 아무 조건 없이 수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게 음악은 취미이자 일이자 삶의 전부이다. 연주를 하고 청중들에게 에너지를 받으며 열정을 교감한다는 그는 많은 연주일정에도 불구하고 밝고 활기에 넘쳤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에 ‘행복’ 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다. 행복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행복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그는 ‘행복을 지휘하는 나는 새’, 금난새다.

입력시간 : 2004-09-0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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