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한인농장 '아그로 상생', 러시아 진출 4년 만에 첫 결실대순진리회, 러시아 정부와 총 6곳 5만 3,000헥타르 50년 임대계약

동토의 恨녹이는 풍요와 희망의 싹
연해주 한인농장 '아그로 상생', 러시아 진출 4년 만에 첫 결실
대순진리회, 러시아 정부와 총 6곳 5만 3,000헥타르 50년 임대계약


연해주는 한민족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19세기 말 굶주린 배를 부여안고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땅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울분을 삼키며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본거지이다. 신채호(1880~1936) 선생이 광복회를 조직했던 곳도,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결의를 다지며 출발한 곳도 바로 연해주의 주도(州都)인 블라디보스토크이다.

‘400㎞ 이하는 길이라 말하지 말고, 영하 40도가 아니면 춥다고 말하지 말며, 알코올 도수 40도 이하는 술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넓고, 춥고, 독주(毒酒)를 좋아하는 이 땅에서는 풍요와 새로운 희망의 싹이 트고 있다. 대순진리회(종무원장 이유종)가 운영하는 ‘아그로 상생’ 농장이 진출 4년 만에 풍성한 첫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아그로 상생’은 영농(Agriculture)의 러시아식 발음 ‘아그로’에,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인 해원상생(解寃相生ㆍ원통한 마음을 풀고, 조화를 이룸)의 상생을 붙였다.

대순진리회가 러시아 정부와 50년간 임대계약을 맺어 운영하고 있는 농장은 젬추쥐느를 비롯해 코르닐로프카, 루비노브카, 멜구노프카, 일린카, 아방가르드 등 모두 6곳으로 전체 면적은 5만3,000 헥타르. 서울시 면적에 육박하며 충북 경지면적의 절반에 달한다. 창고마다 각종 농작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출하준비에 바쁜 현장을 종단관계자와 함께 11월 5~8일 둘러보았다.

- 벌써 한겨울, 마음은 풍성

야누친스크 군(郡) 그라즈단카 마을에서 대순진리회가 운영하는 ‘아그로 상생’ 젬추쥐느 농장.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250㎞ 떨어진 이 곳은 2002년 이 종단이 처음으로 인수한 국내종교단체의 해외진출 농장 1호이다. 5일 오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버스로 5시간 달려 도착한 그 밤, 첫눈이 내렸다. 지난 해보다는 한 달이나 늦은 것이라고 한다. 새벽녘 멀리서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떠서 창문을 여니 바다처럼 펼쳐진 연해주의 눈 덮인 들판을 힘껏 달려온 칼바람이 코를 사정없이 후빈다.

농장에서 나는 신선한 야채와 우거지 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둘러본 농장은 풍성하고 여유가 넘쳤다. 이곳의 올해 수확량은 벼 1,175톤, 콩 1,000톤, 귀리 725톤, 밀 137톤. 단위당 수확량이 예년보다 5배 이상에 이르러 현지 주정부 관계자들은 공공연히 ‘러시아판 새마을운동’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성공적인 수확은 엄청난 투자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농장에만 트랙터 35대, 콤바인 12대, 트럭 14대, 자동차 11대를 갖추고, 모든 과정이 기계화했다.

야누친스크 그라즈단카 마을 주요 인사들과 ‘아그로 상생’ 젬추쥐느 농장 직원들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기에다 ‘일한 만큼 준다’는 자본주의적 운영방식도 한몫을 했다. 젬추쥐느 농장 책임자인 고종석(60)씨는 “현지 평균 임금이 1,000루블인데 농장직원의 월급은 그 두배인 2,000루블(약 8만원)로 정해놓고 일하는 양에 따라 차등지급을 하자 직원들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일할 정도로 의욕에 넘쳤다”면서 “많게는 1만5,000루블(60만원)까지 타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연해주 농장들은 대부분 그동안 국영 집단농장(콜호즈)로 운영되던 이 지역은 1990년대부터 중국의 저가 농산물이 유입되면서 농작물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고, 거의 버려진 땅으로 남아있었다. 그 동안 새마을중앙회와 고합 등 국내단체와 기업들이 이곳에 여러 차례 진출했지만 현지사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위탁영농식으로 운영해 실패했다.

하지만 ‘아그로 상생’이 콤바인(34대), 트랙터(106대), 트럭(18대) 등 영농장비 구입자금 등 지금까지 110억원 가까이 투자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올해 6개 농장에서 나오는 농작물 생산량은 9,800톤으로 예상 매출액만 28억원에 이른다. 매출은 대부분 러시아 국내에 판매되며 수익금은 모두 재투자된다고 한다.

- 식량위기 대비한 투자

대순진리회가 연해주에 농장을 운영하는 목적은 한 마디로 미래의 식량난에 대비하고 중앙아시아에서 떠돌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현재 국내외 연구기관들의 연구결과 1980~90년대 곡물과잉시대가 지나고 수자원 부족과 중국의 식량재고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위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또 우리나라는 식량 74%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지만 수입상들은 대부분 일본계 종합상사에 명의를 빌려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이라 긴급상황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아그로 상생’ 항카농장 사장인 이동명 사장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지리적 근접성, 비옥한 토지, 저렴한 임금을 활용하면 미래에 훌륭한 식량생산지가 될 것”이라면서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북한지역에 연결되면 부산까지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1937년 소련이 고려인 이주정책을 펴면서 중앙아시아로 떠난 고려인 후손들에게도 자립여건을 마련해주고 있다. 실제로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모두 “꿈 같은 일이 일어났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야누친스키군 고려인협회 대표 김용주(76)씨는 “그동안 많은 고려인들이 설움과 고통을 겪었으나, 이제는 당당히 살게 됐다”고 말했다.

또 루비노프카 농장의 책임자인 고려인 양 알렉산드로 일리야(55)씨는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연해주로 옮겨와 대순농장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러시아 시민권까지 얻게 됐다”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1937년 고려인 이주정책에 따라 모스크바로 옮겨가 살고 있다”는 이아원(79)옹도 최근 농장을 방문, “이웃에 있는 고려인 10여 가족과 함께 내년부터 이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옹은 “소련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과 전투를 벌이고, 1945년 광복직전에도 평양에 진주하기도 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후 “그 동안 설움을 많이 겪었는데 이제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됐다”고 밝혔다.

- “2006년에는 손익분기점 넘을 것”

주정부 관계자들과 현지 러시아 주민들도 농장과 종단을, 지역경제를 살려낸 구세주로 여기고 있다. 그라즈단카 마을의 읍장인 니콜라이 푸센코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지만 지금은 300호 가까이 늘어났다”며 감사의 고개를 숙였다. 또 이 마을에서 유아원을 운영하는 리다 안돕키나는 “4년 전 4명의 한국인들이 특공대처럼 와서 농장을 개척할 때만 해도 제대로 해낼지 반신반의했으나, 이제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농장으로 달려올 만큼 믿고 있다”고 말했다.

종단측은 농작물 판로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특히 올해부터 중국산 쌀 수입이 금지되면서 가격도 오르고 수요도 늘어 이미 상당부분은 계약이 끝났다는 것. 또 콩은 지난 해 현지에서 메주로 가공하여 국내로 반입한 데 이어 올해에는 제3국에 판매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농장 관계자는 “앞으로 4개 농장을 더 인수하여 아예 이 일대를 한민족들의 공동생활터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종단 관계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 뿐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북한의 영농일꾼, 국내 농가까지 끌어들여 상생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추는 게 최종 목표”라면서 “2006년 정도에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최진환 기자


입력시간 : 2004-11-17 17:42


블라디보스토크=최진환 기자 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