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보장되는 '최고의 직장' 인식, 인생걸고 시험에 '올인'

공무원 시험준비 열풍 "합격하면 인생보험 드는 거죠"
정년 보장되는 '최고의 직장' 인식, 인생걸고 시험에 '올인'

“공무원 해서 뭐 하려고?” 공무원 준비하는 이들을 알게 모르게 얕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역전된 상황.

정년과 연금 수혜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공무원이 된다는데 그 무엇인들 못하랴. 그들은 자신의 청춘도, 다니던 직장도 내던지고 달려든다. 이들의 평균 ‘내공 수련’ 기간은 2~3년. 시간은 흐르고 흘러,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공무원보다 든든한 직업은 없다"

수능 한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11월 19일 저녁의 서울 노량진동 고시촌.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길을 가는 그들의 걸음걸이에서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식당에 앉아도 책에서는 좀처럼 눈을 뗄 줄 모르는 그들이다.

삼삼오오 둘러 앉은 주말 저녁상에 으레 보일법한 소주병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생명 보험이 아니라, (공무원 합격하면) ‘인생 보험’에 드는 거죠. 낮아지는 정년 연령과 고용도 불확실한 시대에 공무원보다 확실하고 튼튼한 직장이 어디 있습니까?” 상경 15개월째인 한 고시생의 말이다. 함께 둘러 앉은 이들도 삼겹살 쌈을 먹는 것으로 동의를 대신했다.

수업이 시작되기까지는 30여분이 남은 시간의 모 행정 고시 학원. 두툼한 교재 몇 권씩을 낀 수험생들이 벌써부터 자리를 꿰차고 앉기 시작한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렇게라도 와야 됩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은 강의실에 앉는 자리로 결정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돕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사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손놀림은 분주하다. 앳된 얼굴의 재학생에서부터 서른도 훨씬 넘긴 듯한 삼십대 수강생까지 그 연령층도 다양하다. “학부 때 따뒀던 교원 자격증 있는 사람들은 물론, 번듯하게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이리로 오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며 학원측은 귀띔했다.

드센 공무원 취업 열풍은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상장 기업 직장인 7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메일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273명(36%)의 직장인들이 공무원(고시 포함)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동기로는 ‘노후 대책의 막막함 때문(48.8%)’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담당 업무가 지겨워서(14%)’, ‘구조 조정의 위협을 느껴(9.7%)’ 등의 답이 이었다. 특히 피설문자들의 78.4%는 고시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이미 했거나 공무원 취업을 심각히 고려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대학들이 신입생 유치를 위한 학교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캐치 프레이즈를 아예 “공무원 취업을 가장 많이 하는 대학”으로 내건 모 대학의 광고도 눈에 띈다. ‘술 안 마시는 신입생들’, ‘학교 끝나면 다들 학원행’, ‘대학의 고시촌화’ 등 요즘 대학가의 풍속도가 맞장구 쳐 준다.

뿐만 아니다. 학생들의 취업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 대학들은 아예 중앙인사위가 주관하는 ‘공직 설명회’를 자신의 학교에 열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학교 학생들을 얼마 이상 모아 둘 테니 설명회 좀 열어 달라’, ‘강의 대신 설명회에 참석한 학생들에게도 출석 처리하겠다’ 등의 ‘옵션’으로 설명회 유치에 대학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중앙인사위 채용과 관계자의 설명. 너도 나도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쯤되면 그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2004년 7ㆍ9급 공무원 시험에서 그 경쟁률은 또 최고치를 경신했다. 당초 예상 선발 인원 2,121명 모집에 16만1,613명의 응시자가 몰린 지난 2004년 9급 공채 시험. 작년 11만7,000천 여명의 지원자 대비 올해에는 지원자가 38% 늘면서 경쟁이 심화된 측면도 있지만, 최종 선발에서 1,798명만이 합격돼 경쟁률이 더욱 올라가는 결과를 빚는 바람에 결국 89.9대 1로 귀결됐다.

7급 공무원 시험의 경우, 그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2003년 들어 경쟁률이 100대 1에 육박하더니 올해는 무려 136.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작년보다 지원자가 많은 탓도 있었지만, 선발 인원이 예년에 비해 4분의 1가량 줄었기 때문.

그리고 ‘수능보다 어렵다’는 공직적격성평가(PSAT)가 고등고시에 도입되면서 급수를 낮춰?捉?우선은 공무원에 합격을 하고 보겠다는 심산이 작용한 것으로 중앙인사위원회는 분석하고 있다.

2~3년 공부. 100대 1은 기본

‘수련’기간 2~3년이면 대부분이 합격선을 넘어 고만고만한 실력에 이르기 때문에 ‘도토리 키 재기’가 되는 게 공무원 입시의 현실. 여기서 살아 남기 위해 이들은 또 다른 곳에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가산점 사냥’이다.

자격증 가산점(공통 적용)의 경우, 정보 처리ㆍ워드프로세서 등 컴퓨터 활용 능력에 따라 0.5∼3점이 부여되고 기사ㆍ치료사ㆍ회계사ㆍ세무사 등 직종별 자격증은 3∼5점이 주어진다. 또 취업 보호 대상자(국가유공자, 광주민주운동, 독립유공자 자녀)에게는 별도로 만점의 10%가 부여된다. 각종 자격증에다 취업 보호 가산점까지 더해지면 필기 시험 100점 만점에 118점까지 획득할 수 있다.

가산점은 당락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지난 9월에 발표된 인천시 지방직 공채 시험 합격자 226명 가운데 가산점을 받은 사람은 180여명에 이르고, 비슷한 시기에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자료의 의하면 9급 공채 합격자(국가공무원직) 1,883명 가운데 85.5%인 1,611명이 가산점을 받았다.

특히 10명 선발에 3,273명이 응시한 검찰 사무직의 경우, 합격자 10명 모두가 취업 보호 가산점을 받았다. 2001년에는 가산점 때문에 만점인 100점을 넘을 지원자도 속출했다. 이는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서 6급 이하 모든 공무원을 뽑을 때 취업 보호 대상자(국가유공자, 광주민주운동, 독립유공자 자녀)에게 만점의 10%를 가산점으로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산점이 당락 좌우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이 이처럼 핵심 변수로 떠오르자, 가산점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취업 보호 가산점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고 있다. “공무원 시험 지원시 전체 경쟁률을 보기보다는, 국가유공자 자녀가 몇 명이 지원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만점 가까운 시험 점수에 챙길 수 있는 가산점을 다 챙기고도 떨어졌다”며 고시생들은 푸념한다.

그러나 푸념으로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교원 임용 시험의 경우 그 동안 특수직ㆍ전문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취업 보호 가산점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던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지난 3월 시행령이 바뀌어 2005년 임용 시험부터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1, 2차 시험 때 가산점을 주도록 하면서 임용 고사 수험생들의 드센 반발과 함께 일반 공무원직 응시자들로 동조할 움직임을 비추고 있는 것.

“10명 안팍의 소수 인원을 선발하는 시험의 경우, 가점 대상자가 모집 인원보다 더 지원해 시험에 응시해 봤자 안 된다”, “ 소수점 이하 점수에서 당락이 가려지는 마당에 10점을 그저 주다니, 시험 치지 말라는 얘기다” 등 각 고시원과 각 포털 사이트의 카페에는 수험생이 ‘국가 유공자 가산점 헌재 소송’이란 카페까지 개설해 취업보호가산점제의 부당성을 제기하는가 하면, 조직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국가가보훈처는 관련법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교원이라고 해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 나아가 교원 임용 시험이 자격 시험이 아닌 교원을 채용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가산점을 주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미미한 문제점은 있으나 법으로 규정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가산점에 우는 김정호씨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집에 어머니께서는 이라크로 파병된 자이툰 부대에 가서 밥이라도 하고 싶다, 하십니다.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던진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하네요."

가산점에 대한 생각을 묻자, 올해 세번째 고배를 마신 김정호(28ㆍ가명)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11월 초에 겪은 낙방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그의 말끝은 시종 떨렸다.

"정보 처리 기사 3점, 워드 1.5점(1급), 컴퓨터 활?2점(1급). 딸 수 있는 점수는 모았습니다. 설에 추석까지 반납하고 준비했는데, 또 떨어지니 정말 살맛 안 나는군요. 죽기 살기로 매달렸지만, 열리지 않는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100점 만점에 10점을 더 주고 어떻게 경쟁을 하라는 겁니까? 일반 기업에서 보훈 자녀들을 합격 비율을 정해놓은 것처럼 공무원도 보훈 자녀 할당제를 둬서 그들끼리 경쟁하게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건 애초부터 게임이 안 되는 일입니다."

허송한 세월에 감정이 북받쳐 그의 목소리에는 한층 더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는 공무원들의 질적 향상도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2000년 전까지 군복무자들에게 5점의 가산점이 있던 시절, 상이 용사들은 이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생긴 게 이 유공자 가산점입니다. 군복무 가산점도 위헌 판결로 없어진 마당에 이들에게는 다른 방법으?예를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관련 법이 바뀌지 않는 한 노력해도 더 이상 나아질 것 없다는 판단에 그는 지금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공무원의 꿈'을 접은 것이다.

"한 땐 계란으로 왜 바위가 깨지지 않느냐며 이런 저런 객기도 부려 보았지만, 공무원 시험만은 그게 아닌 것 같네요. 공무원 시험하면 떠올리던 것이 직업취득의 공평한 기회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민승인턴기자


입력시간 : 2004-11-24 10:10


정민승인턴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