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 뛰고 공방 뛰지만 한심한 빠순이는 아녜요"

스타에 열광하는 팬 "나름대로의 문화랍니다"
[이색지대 르포] "사생 뛰고 공방 뛰지만 한심한 빠순이는 아녜요"

강남구 대치동 SM엔터테인먼트 앞에서 서성대는 열성팬들

지난 11월 27일 저녁 6시경. 무심결에 서울 강남구 청담동 대로변을 거닐던 기자는 50여명의 여학생들이 몰려 있는 현장을 발견하게 됐다. 심지어 모포를 두른 채 추위와 맞서고 있는 한 여학생까지, 초겨울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의 정체는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동방신기의 열성팬들. 이들은 미용실을 찾은 동방신기 멤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과연 이들이 이다지도 스타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팬들이 스타를 만나기 위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단연 그들의 스케줄에 따른 각종 무대. 인기 가수의 팬 클럽에서는 이런 이들은 소위 ‘공방 뛰는 애들’이라 부른다. 주로 가장 잦은 공식 스케줄인 스타들의 공개 방송을 따라다니며 방청객을 메워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를 빛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열성 팬들은 소위 ‘사생 뛰는 애들’이라 불리는 이들. 스타의 방송 스케줄 이외의 시간, 다시 말해 그들의 사생활을 뒤따르는 팬들이 바로 ‘사생 뛰는 애들’이다.


소속사 앞에 진 친 열성팬들
동방신기의 열성팬들을 만나기 위해 찾은 곳은 하루 종일 팬들이 몰려있다고 알려진 SM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부근. 지난 11월 30일 밤 7시경 청담동 소재의 SM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은 취재진은 그곳에 몰려든 50여명의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건물 정면 현관 부근에 30여명이 몰려 있었고, 뒤편 주차장에도 10여명이, 그리고 주변을 서성이는 팬들도 여럿이었다.

문제는 역시 추위였다. 다행히 평년 기운을 웃돈 덕택에 초겨울 치고는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였지만, 몇 시간 씩 건물 밖에 서있기에는 다소 힘든 상황이었다. 아무리 스타가 보고 싶다지만 쉽지 않은 날씨. 두터운 파카에 모자까지 눌러 쓰고 마스크까지 총동원해 초겨울 바람을 피해 본다. 하지만 교복 치마에 달랑 외투 하나를 걸친 여학생들도 많이 눈에 띈다. 견뎌내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초겨울 바람이 휑한 거리였지만, 그들은 태연스레 오가고 있다.

“일본 아줌마 팬들은 배용준을 보려고 몰려 들다 사고가 났다는 데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우리는 멤버들을 보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에요. 멤버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지요.”한 여고생의 당당한 항변이었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 주기 위해서 모여 있다니, 예상 외의 대답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오빠 부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서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팬들이 대부분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니.

“멤버들이 요즘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럴 때 응원해 주는 팬들이 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은 거예요”라는 이 여학생은 “매니저들은 추우니까 집에 가라고 하지만 은근히 우리가 여기 있어 주기를 바랄 겁니다”라고 한다. 최근 멤버 교체, 멤버 보강, 중국인 멤버 보강 등 동방신기가 다양한 소문에 휘말렸던 터라 팬들이 상당한 마음고생을 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 다섯 명 멤버만의 동방신기만을 원한다’며 강한 반발 의사를 밝혔던 팬들은 결국 SM엔터테인먼트의 공식 부인이 있는 뒤에야 가라 앉았다.

데뷔 앨범을 정식으로 발매하기 이전에 이미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등극해 정상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방신기가 맞이한 첫번째 위기. 게다가 팬들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더욱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미 사실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여학생 팬들은 “다만 SM 엔터테인먼트가 멤버들을 흔들지 못하게 팬들이 더욱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를 도와 주는 소속사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팬들에게는 상당한 불신을 산 것으로 보인다.


오빠부대에서 동생부대로
놀라운 사실은 SM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부근에서 만난 여성팬 가운데 절반 가량이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현재 대학교 2학년이라는 한 여성팬은 “사생활 뛰는 애들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는데 요즘에는 수능 끝난 고3 애들도 많이 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덧붙여 “동방신기 멤버들도 최근 수능을 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미 수능을 치룬 대학생 입장에서 열띤 응원을 보내줬다”고 말했다.

그 동안 열성 팬들을 두고 통상 ‘오빠부대’라고 불러왔지만 이제는 이런 호칭도 바꿔야 할 듯. 자신들보다 어린 스타들에 열광하는 요즘 여대생들의 모습에서 ‘동생부대’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HOT’, ‘젝스키스’, ‘god’, ‘신화’ 등 남성 하이틴 그룹의 전성기에 중고교 시절을 보낸 요즘 대학생들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나타난 정통 남성 하이틴 그룹이 친숙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실제 열성 팬클럽 층인 중고교생들만큼이나 대학생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실제 현장에서 만난 여성팬들 가운데는 HOT의 열성팬 출신이 상당수였다. 이미 HOT의 해체를 경험한 이들이 동방신기 멤버 교체 관련 소문이 나돌자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에 강한 불신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중고생들이 덜 적극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최근 수능이 끝난 뒤 자주 이곳을 찾는 다는 한 고3 여학생은 “학교에서도 동방신이 열풍이 대단하다”면서 “공개 방송에 가보면 수업이 끝난 뒤 몰려든 중고생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사생 뛰는 애들’의 주축은 대학생이고 ‘공방 뛰는 애들’은 중고생 위주라는 애기.

자세히 팬들을 접하다 보니 이들이 각자 서너명씩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됐다. 물론 수업을 마치고 같은 학교 친구들끼리 무리 지어 찾아 온 이들도 있었지만, 정통 ‘사생 뛰는 애들’의 경우 서너명이 한 무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각 무리별로 준비해 온 선물도 다르고 심지어 자신들만의 플래카드를 준비해 온 이들도 있었다.

기획사 벽에는 팬들이 적어놓은 스타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소속사나 미용실 등을 따라 다니며 가까워졌다”는 한 무리의 열성팬들은 “아마 동방신기도 우리를 보면 누군지 알아볼 것이다. 조금 더 열심히 활동해 우리가 갖고 다니는 플래카드에 멤버들의 사인을 직접 받는 게 소원”이라고 애기한다. 결국 스타를 직접 보는 것보다 자신들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응원하는 게 더 큰 소망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망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열성적인 팬들은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동방신기의 숙소인 청담동 소재의 한 아파트 부근에서 만난 이들이다. HOT가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당시에는 자주 숙소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새벽마다 숙소 주변으로 몰려드는 열성팬들로 인해 이웃 주민들의 원성이 잦아져 하는 수 없이 이사를 떠나야 했던 것. 하지만 요즘 팬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의 존재, 연예인에게 알리기
주변 상가 슈퍼 업주는 “이 아파트에는 연예인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 예전에도 많이 살았었다”면서 “요즘에도 팬들이 많이 몰려드는데, 시끄러워서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다. 스스로 조용히 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잘라진 분위그를 전했다.

직접 만난 팬들 역시 같은 얘기를 한다. “우리는 스타를 보고 소리나 지르는 한심한 ‘빠순이’가 아니다”는 한 여성팬은 “우리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멤버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SM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부근에서 만난 여학생들과 비슷한 반응. 실제 전날 밤에 그곳에서 만난 여성 팬 몇몇을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동방신기 멤버들은 숙소로 들어간 상황. 이미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 이들이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날을 세우며 기다리겠다는 애기일까. “멤버들이 들어간 뒤 1시간가량 더 기다리다 들어 간다”는 한 여성팬은 “가끔 멤버들이 창밖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운이 좋은 날은 멤버 한두 명이 바람을 쐬러 밖에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스타가 있는 한, 거기에 열광하는 팬들도 있기 마련. 그들을 단지 ‘한심한 여학생이 한동안 정신 나간 짓’ 정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나의 취미 생활이자 문화 생활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들의 모습에는 당당한 자기 주장이 담겨 있었다.

세상이 변하면 거기 사는 이들의 행동 양식도 달라지는 마련. 일찍이 1960년대부터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축 역할을 해 온 ‘오빠부대’ 역시 21세기라는 신세대에 걸맞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있을 따름이다.

조재진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2-08 21:48


조재진 자유기고가 dicalazzi@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