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중심국 아닌 교량국 돼야"한·중·일 3국 '소통' 이끌어낼 보편성 필요, 담론 선점 중요

[인터뷰] 권용혁 교수의 ‘한국발 동아시아 담론’
'동북아 중심국 아닌 교량국 돼야"
한·중·일 3국 '소통' 이끌어낼 보편성 필요, 담론 선점 중요


‘동북아 중심국가’. 노무현 정부가 21세기 한국의 중장기 성장모델로 제시한 슬로건이다. 그러나 당초의 국가적 열망만큼 이 슬로건은 아직 구체적인 생명력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ㆍ중ㆍ일 동북아3국 비교연구를 2년째 주도하고 있는 권용혁 교수(46ㆍ울산대 철학과ㆍ동아시아 연구센터 소장)는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밑그림 자체가 21세기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국가전략이라는 것이다.

‘중심국가’라는 슬로건은 변방의식과 피해의 기록으로 점철된 한반도 역사에 일대 반전을 위한 민족적ㆍ국가적 염원을 담은 것이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다름없이 자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재편을 시도하는 과거지향적 패권주의 욕망과 코드를 같이 한다. 권 교수는 21세기 동북아 주도권은 힘을 내세운 위계적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의 논리가 아닌 주변부의 논리로 동북아의 ‘자유롭고 수평적인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는 ‘보편적 담론(Logic)’을 누가 선점하는냐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선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21세기 한국은 ‘동북아 중심국가’ 보다는 중심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동북아 교량국가’라는 것이다. 지난 3일 서울아산병원에 위치한 동아시아 연구센터에서 권 교수를 만났다.

동북아 공존의 캐치프레이즈 들어야

-세계화의 전(前) 단계로 유럽연합(EU), 미주 대륙 등 지역통합이 활발한 가운데 한ㆍ중ㆍ일 3국의 평화적 협력은 물론 지역공동체까지 염두에 둔 ‘동북아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다. 권 교수가 주도하는 소위 ‘한국발(發) 동아시아 담론’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나.

“동북아 현실을 볼 때 한국은 패권주의 세력들과 동거할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역사 왜곡이나 일본의 우경화 등에서 보듯 그들이 동아시아를 보는 논리나 밑그림은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이다. 역사적으로 중ㆍ일은 패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은 마치 레슬러들이 어깨싸움을 하는 동안 빈틈을 이용해 달리는 마라토너가 돼야 한다. 주변 강국이 힘 싸움에 익숙해 방기한 평화적 협력과 공존의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달려야 한다. 대안의 키워드는 또 다른 패권 추구가 아닌, 한ㆍ중ㆍ일 3국인의 삶 속에서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수평적, 다층적 소통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한국발 동아시아학’은 우선 동북아 3국인의 총체적 삶에 대한 기초자료부터 축적하자는 뜻에서 가족ㆍ기업ㆍ시민사회 등 3영역의 의사소통 구조를 경험적으로 비교, 전망하고자 한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객관화를 위해 한ㆍ중ㆍ일 지역학,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전공자들의 공동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

-최근 21세기 동북아 평화공동체 논의 과정에서 나온 ‘중심 해체주의’ 혹은 ‘탈(脫)민족주의’로 대표되는 비정치적ㆍ비군사적 접근에 대해 현실 우회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리고 동북아 지역문제의 상수인 미국의 문제는 어떻게 보나.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관건을 정치 구도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즉 평화 모색의 길은 경제ㆍ문화 등 다층적, 동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적 문제를 우회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과잉’을 완화하자는 것이다. 현재 정치 외에 경제ㆍ문화적 소통은 놀랄 만큼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협력을 위한 전제인 소통은 기본적으로 중위적, 다층적이다.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중층적이고 다각적인 틀 속으로 유도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강국을 6자 회담 틀로 묶은 것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수평적 소통을 바탕으로 한 다자 관계에서는 힘을 바탕으로 한 중심국 논리 보다 평화 지향적 ‘보편 논리’를 선도하는 측에 주도권이 있다. 우리 목소리의 진원지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

-21세기 한국이 요청 받는 과제는 세계화의 다른 모습인 동북아 공동체 모색뿐 아니라 그에 앞서 민족통일의 문제가 있다. 외견상 동북아 공동체와 통일의 함의인 민족주의적 국가의 완성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의 미래는 뭔가.

“통일 한국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열린 민족주의’이다. 민족의 내용을 혈연, 언어, 문화적 단일성만으로 등식화 하는 닫힌 민족 인식은 곤란하다. 단일성에서 유래하는 단점을 극복하고 타문화와 개방적 소통을 위한 틀을 마련해야 한다. ‘민족 애국주의’로 치닫는 통일은 한국 사회의 급격한 우경화와 동북아 대결의 새로운 불씨가 될 것이다. 이런 우려는 근대사에서 충분히 경험한 사실이다. 열린 민족주의가 통일의 미래다. 관용(Tolerance)을 법치화한 ‘헌법 애국주의’로 치환되는 열린 민족주의는 민족을 뛰어넘어 21세기형 국민국가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또한 동북아 중심을 꿈꾸는 통일한국 보다 동북아 평화를 꿈꾸는 동북아의 주변부라는 논리를 견지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한국발 동아시아 담론은 주변부가, 즉 다양한 소수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구성의 논리를 기초로 한다.”

-동아시아 연구센터의 동북아 3국 가족ㆍ기업ㆍ시민사회 비교연구 프로젝트중 지난해 가족 연구가 일단락 됐고 올해는 기업 비교연구가 진행 중인데, 주목할 만한 내용들이 무엇인가.

“3국 공히 가족의 화목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겠다는 가족주의 전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 정도로 치면 한ㆍ중ㆍ일 순이다. 3국이 가장 현격한 차이를 보인 부문은 가족내 의사소통인데, 일ㆍ중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경우가 각각 49%, 31%인 반면 한국은 18%에 머물렀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한국의 20대와 50대 간의 가족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가장 심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20대 대부분이 가장이 되는 향후 20년 내 한국의 가족은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탱해낼 사회 정체성 변화도 예상된다.”

문화적 보편성은 미래지향성에 있다

-중ㆍ일 중심으로 불고 있는 욘사마 신드롬으로 상징되는 한류 열풍을 어떻게 보는지.

“1848년 아편전쟁 이후 주변부로 전락한 아시아는 필사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의 손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한국이 동북아 3국 중 동양적 미덕을 덜 잃어버린 나라라는 것이 한류 열풍 배경이다. 한국의 매력은 명(明) 멸망 후 조선이 ‘소(小)중화주의’를 주창하며 동양의 양심을 자처했던 데서 역사적 맥을 찾을 수 있다. 비록 한국이 정치적ㆍ경제적 주변부이자 소수이지만 동양적 미덕이 묻어 있는 삶의 테마를 집요하게 추구함으로써 동북아인에 내재된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문화 콘텐츠를 만들 때 중ㆍ일도 염두에 둬야 한다. 동북아 3국인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은 문화우월주의가 교묘히 결합된 역사적, 국가주의적 내용이 아닌, 자유롭고 수평적인 소통에 의거한 미래지향성에 있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1-12 16:37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