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꽃을 피워낸 천상 춤꾼의 빛나는 무모함아시아 최초의 댄스 페스티벌 출범

[감성 25시] SMS댄스 대표 서미숙
황무지에서 꽃을 피워낸 천상 춤꾼의 빛나는 무모함
아시아 최초의 댄스 페스티벌 출범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열리는 학예회. 소녀는 일년에 한번 열리는 학예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만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춤 출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춤이 좋았던 건 아니다. “저 아이 참 이쁘네. 춤도 잘 추고, 무대에 오르면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 게다가 착하기까지 해.” 학교 선생들의 평가를 엿 듣고 부터였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던 소녀는 어느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춤이 좋은 건지, 칭찬이 좋은 건지…. 뭐, 아무래도 좋았다. 소녀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을 때마다 춤을 추곤 했으니까. 소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칭찬 받기 좋아하던 소녀는 자신만의 철학이 생겼다. 훌륭한 일을 해서 타인을 기쁘게 하자. 항상 받은 것의 세배를 남에게 돌려주자. 칭찬이라는 인지 욕망이 업그레이드 되어 타인을 향한 배려심으로 성숙할 시기였다. 남이 기뻐해야만 자신의 일 또한 잘되는 것 같았다. 이런 원칙으로 세상을 향해 발돋움하는 그녀, 서미숙.

춤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닌다.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신세대 컴퍼니 무용단 단장에서 출발해 19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서울 올림픽 개ㆍ폐막식 공연과 각종 TV 쇼 프로그램, 그리고 CF 안무, 대중 춤 행사 기획, 국내 최초 대중 춤 전문지 ‘댄스 댄스’의 발행인이기도 한 그녀는, 현재 국내에서 원조격인 댄스 아카데미 SMS의 대표다.

그녀의 특기는 불모지 개척하기다. 황무지에서도 꽃이 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에 빠지면 ‘올인’하는 그녀의 작은 체구 안에 강한 여전사가 살아 있는 것일까. 서울 강남의 핵심 지역인 강남역 씨티극장 옆 점프 밀라노 7층에 위치한 SMS 댄스 아카데미는 지방을 포함해 전국에 4개점을 두고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아시아 최초 댄스페스티발 DOSI(Dance Ones to Watch SMS International 아시아 대중 춤 페스티발)를 출범시킨 장본인이다. 4회째를 맞는 DOSI는 올해 5월 시청 앞 광장에서 진행된다. 서 대표는 그간 한국, 일본, 홍콩에서 열린 3회 동안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번 4회째 페스티발은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한 페스티발이 될 거” 라고 밝혔다.

서 대표가 국제적인 댄스 페스티발을 창립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무용단 출신이라 누구보다 댄서들의 고충을 잘 아는 그녀다. 그들의 위상정립을 위해 앞장서온 그녀다.

“댄서들의 수명은 길지 않아요. 그들이 정열을 쏟은 만큼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직업이죠. 그렇기에 30대를 넘어서면 딱히 할 일이 없는 것도 댄서예요. 그들이 젊은 시절 흘린 땀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국제 페스티발은 해외시장에 한국의 댄서들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해외 댄서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그들을 지도자로 진출시키고, 한국에 춤을 배우러 오게 하는 것이 일단의 목표다. 한국은 일본, 홍콩에 비해 재즈와 힙합은 이미 수준급이다. 일본보다 기획면에서 다소 뒤져있지만, 개인의 실력면에서는 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댄서들을 아시아 각국에 지도자로 진출시켜 한국의 대중 춤을 보급하고 싶은 취지는 그녀에게 스何?없이 혼자 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다행히 일본과 홍콩에서 뜻이 맞는 파트너를 찾았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페스티발이 성공리에 막을 내리자, 일본과 홍콩에서는 더욱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중댄스로 아시아 젊은이들이 한국에 모이게 하는 프로젝트가 이번 도시 페스티발인 셈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신세대 컴퍼니 무용단 단장을 지내던 시절. 그녀는 무용수들이 딴따라같은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참지 않았다. 단원들의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단장으로서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불합리한 것들과의 전쟁이었다. 여리고 세심한 여자는 제작자와 싸우는 쌈닭으로 변하기도 했다. 단원들조차 그녀에게 놀랬고, 알게 모르게 그녀를 향한 존경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신세대 컴퍼니의 사장이었던 홍승성 대표는(현재 가수 비의 소속사이기도 한 JIP 대표) 그녀에게 신세대 컴퍼니를 맡길 뜻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다. 자신도 없었지만 큰 조직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판단했기 ㏏?甄? 그저 무용수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단원들을 이끌어 갔을 뿐인데 과분한 대우라 생각했다. 그 때 홍대표는 “서단장이기 때문에 맡기는 거”라며 그녀를 설득했다. 그 후 홍 대표와는 돈독한 우정을 지닌 파트너가 된다. 달콤한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곳이 아니면”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그곳은 자신이 이끄는 무용단 뿐이었다.

신세대 컴퍼니 소속의 무용단이 신세대 무용단으로 독립하고 SMS 댄스 아카데미로 변모되기까지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다. 예상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되는 지경까지도 그녀는 언제나 선원들과 함께 하는 든든한 캡틴 역할을 해냈다. 예산에 맞지 않아 무용단이 모델 에이전시로 바뀔 위기도, IMF를 맞아 해체할 위기도 모두 극복했다. 당시 무용단은 일이 없을 경우 월급을 챙겨주지 않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녀는 몇 달 동안 아무 일이 없을 때 조차 꼬박꼬박 월급과 휴가비까지 챙겨주었다. MBC 무용 단장이었던 남편의 월급으로 먼저 아랫사람부터 챙긴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단원들은 여름 휴가와 휴가비 전액을 반납했다. 그날 처음으로 단원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한다.

“오늘은, 내일은, 하면서 용기를 내어 아이들에게 해체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하루는 용기를 내서 말하려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 너무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거예요.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때 결심했다. 한 배를 탄 식구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당시 전세였던 집을 담보로 강남에 댄스 아카데미를 차리려는 그녀를 모두가 말렸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럴수록 더욱 과감해졌다. 강남 일대를 순회하는 버스에 광고를 냈다. 한마디로 “일 저지르기 선수”였던 그녀는 모두가 사업을 접을 99년도 당시 혼자서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서 대표의 영문 이름 이니셜을 창안해 만든 SMS댄스 아카데미는 이렇게 탄생했다.

서 대표의 불모지 개척 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댄스 아카데미는 댄스와 연기, 공연 기획, 제작, 매니지먼트 사업까지 토탈 아카데미(SMS Stardom)로 거듭나는 중이다. 처음부터 남들이 무모하다고 하는 시도를 용감하게 감행한 그녀지만 확장 사업이 겁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만이 터득한 성공의 비결이 있기에 아직, 든든하다. “춤으로 아시아를 하나로, 한국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 대중댄스를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키워나가는 것이 현재 바람이죠. 그리고 제가 하는 일이 훌륭한 일이어서 사람들이 ‘참 잘했다’라고 칭찬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을 내서 더 잘할 거 같아요.”

이 여전사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꽃가게에 들러 여린 감성의 소유자인 자신과 타인에게 줄 꽃을 산다. 꽃을 받을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녀처럼 설레인다고.

환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녀의 진정은 꿈은 “춤으로 소통하는 춤추는 빌딩을 만드는 것”ㅇ이다. 돌아오는 길에 꽃가게에 들러 그녀처럼 꽃을 샀다. 영화 쉘 위 댄스의 한 장면처럼 스탭이라도 밟아볼까. 꽃을 들고서.

유혜성 객원기자


입력시간 : 2005-01-21 10:47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